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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에겐 울타리가 필요없다

[칼럼] 느림의 미학으로 접근해야할 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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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모진한파가 몰아치는 시기에 지나가는 해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다해도 또 다른 해는 어김없이 펼쳐졌다. 하얗게 눈쌓인 나뭇가지를 스쳐오는 “푸르르르~” 바람소리. 을씨년스런 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왠 문풍지 소리?’ 그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집 앞 감나무 가지에 걸린 비닐조각의 바람맞는 소리였다.


기억은 느린 미학으로 접근한다

창호지 문 사이에 달린 문풍지의 떨림이 온몸을 움츠리게 하고 작은 화롯불 하나가 방안에 들여지면 화로를 중심으로 차가운 손을 녹이며 이웃이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는 정겨운 장이 펼쳐진다. 까치밥으로 남겨둔 홍시가 떨어질 때면 살얼음 덮인 동치미국물로 배를 채우던 참담했던 시절마저도 아름다움으로 매우 느린 속도로 스쳐간다.

새벽안개 걷히며 먼동이 터 오를 때면 온동네 굴뚝에선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을은 아침연기와 안개에 덮혀 밝아진다. 처마에 자라나는 고드름을 따서 와작와작 씹으며 왁자지껄한 소란은 역동적인 하루의 시작이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오솔길과 달구지 길이 강과 내를 휘돌아 논과 밭과 산을 잇는 심하게 굽은 길과 이어진다. 그 길들의 조화는 느림의 미학으로 부상한다.

새해에 대한 주관적 의미를 주절거리면 이상한 존재로 보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새해’라는 말에 담겨진 진실을 들여다본다면, 묵은해가 가고 새롭게 한해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떡국을 먹고, 달력을 한 장 넘기고, 1월이 시작된다고 해서 정말 새로운 해가 될 수는 없다. 기성의 무엇과 변화를 동반한 새로움이 없는 해를 새해라고 하는 것은 일종에 관습과 같은 것이다.

한해가 지나고 또 다른 해가 온 현상자체만을 두고 새해의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365일이 지난 다음이라는 이유만으로 새해라고 규정한다면,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희망의 도구에 갇혀버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묵은해가 지나고 다시 등장하는 해는 묵은해의 연장과 반복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노동자계급에게 새해는 관념이며, 줄 거 같지도 않은 ‘새해 복을 받으라’는 인사말도 주술로 들려온다.

이번 연말연시는 더욱 어둡고 침체된 모습이었다. 활기는 전혀 보이지 않고 향후의 경기전망에 대해 희망을 담긴 메시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1인당 국민소득은 떨어지고 실업과 채권부도율, 국가채무, 실업자 수는 치솟고 있다. 빈곤의 숨막힘이 세월의 분계선조차 느끼지 못하게 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이라는 자의 주변은 온통 똥냄새가 진동을 하는데도 ‘완벽한 도덕성’과 ‘역대 최고의 수출을 이뤘다’고 자랑질하고 있는 판이다. 온전한 정신인지 의문이 깊어진다.

기본산업은 통상무역으로 완전히 붕괴되었고, 아이티, 디지털로 변화하는 산업화의 과정을 혁명이라고 한다. 자동화를 핵심으로 하는 ‘과학기술혁명’은 ‘무인생산’과 구조조정, 정리해고 등으로 ‘노동력 배제’의 계기가 되고 있다. ‘고용 없는 성장’, ‘돈 놓고 돈 먹기’에 따른 불안정 노동과 실업 문제는 보다 빠른 속도로 모순을 증폭시키며 질주하고 있다. 여기에 노동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당면한 투쟁과제에 계급적 대응을 하며, 변혁에 대한 노선과 이념과 전망에 대한 체계적 준비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느림의 미학’으로 노동자계급의 새해를 준비하는 길이다.

올해는 두 개의 정치 일정이 관심으로 부각되고 있다. 범주의 모호함과 비과학성에서 발견되듯, 노동운동의 이념에 대한 생각들도 세월의 혼란스러움만큼 파편화되고 있다. 진보를 자칭했던 자들의 권력을 향한 과도한 집념은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무원칙한 이합집산으로 나타났다. 진보정치운동의 성과는 바닥을 치고, 보수와 진보에 대한 범주가 뒤죽박죽되었으며, 수구와 변혁의 의미조차 모호해졌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주장의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고전’이 되어 달랑 차가운 길바닥에 뒹구는 꼴이다.

변혁에 대한 조급함으로 속도에만 집착해서 ‘모든 것은 빨라야한다’는 생각이 최선의 가치인양 떠들어대며 논쟁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철지난 생각이지만 그런 조급함이 조건과 상황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할 여유로움을 앗아가 상태를 관찰 할 수 없게 하고 결국 현재의 모호한 범주를 탄생시키는 혐의를 제공한 것 같다.

여행할 때, 마라톤 하듯 급하게 여행하는 사람은 없다. 일부러 먼 거리를 돌아가 보기도 하고 주변 경관에서 빚어지는 오묘함과 신비로움 하나하나를 여유롭게 감상한다. 그 이유는 구체성을 담은 세밀한 미학적 가치를 보유하고픈 욕망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풍부한 감성을 가지려면 대상물을 자세히 정확히 관찰해야 한다. 현상만으로 사안을 규정함은 비과학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역사와 우주와 인류의 시각으로 볼 때, 우리는 달팽이처럼 더딘 행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세에서 비롯되는 계급의 역관계,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의 본질, 진보와 보수의 과학적 개념, 노동운동의 이념과 노선 등을 보다 과학적이고 정확한 관점으로 바라볼 기회를 갖는 것이 느림의 미학이며, 더 많이, 더 정확히 바라보고 분석하는 여유를 갖는다는 데 의미가 있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 느림의 미학이란 차분한 진단과 평가로 돌출되는 과제를 실천하기 위한 결의의 과정이다. 답답해 보이지만 가장 빠른 길 아닐까.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위기국면에 더욱 강화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가 전면화 되자 언론들은 신자유주의적 금융관행을 변화시키는 게 처방이라고 거짓말을 꾸며댄다. 뿐만 아니라 남유럽(그리스 등) 금융위기의 원인을 ‘복지 때문에’ 로 돌리고 있다. 원인분석 자체가 우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둘러대는 지배계급의 태도에서 그들이 가장 경계하고 있는 지점이 그대로 들어나고 있는 것이며, 위기의 본질 그 자체는 신자유주의이데올로기나 복지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안고 있는 모순’ 바로 그것이다.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될수록 자본은 자신들의 울타리를 높이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기본권조차도 말살해가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 진실에 근거하면 ‘늑대에겐 울타리가 필요 없다.’ 울타리는 강자를 보호하기 위해 쌓는 것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짓는다. 양들을 늑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마련되었던 울타리를 가지고 늑대를 보호하겠다는 어불성설은 인디언들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고 보호구역에 가두어 관광수익을 올리는 꼴과 흡사하다.

권력을 향한 무차별 질주 속에 등장하는 근거 없는 복지담론, 진보와 보수에 대한 규정 없이 MB를 반대하면 진보정치로 통용되는 이념 구분의 붕괴, 자본주의가 생산해내고 발전시키는 포섭과 배제의 구조조정, 노동자계급의 전망의 바탕인 이념과 노선의 불분명함 등이 한해를 맞이하는 시기에 해결해야할 과제로 등장한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는 적시한 과제들이 빠른 시기에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럼에도 당면한 투쟁과제들에 계급적 대응을 조직하면서 투쟁의 현장과 일상을 통해, 민주노조운동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와 사회구조와 체제가 갖는 모순을 극복해 나갈 변혁적 대안을 느림 미학의 여유를 회복하며 구체적인 새해를 준비하는 한해가 되길 희망한다.
덧붙이는 말

이 글은 <노동자역사 한내>에도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