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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정리해고 노동자, 그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기고] 희망텐트촌 촌민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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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한 달 동안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바쁘고 분주한 연말을 보냈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로 인한 19번째 죽음을 접하고 한기연에서 “쌍용차 희쟁자와 가족들을 사랑하는 기독인 모임”을 꾸려 매일 저녁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 앞 희망텐트촌에서 추모 기도회를 드렸다. 가치와 신념이 아닌 죽음과 절망의 한 가운데에서 해고 노동자들과 함께 희망을 만들었던 나의 온전한 경험으로 나는 이제 사람들에게 함께 희망 텐트촌 촌민이 되자고 이야기 한다.

희망텐트촌 촌민이 된다는 것은 절망과 무기력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희망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이다. 희망텐트촌 촌민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의 죽음을 묵인하고 방조한 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실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텐트촌 촌민이 되어야만 한다.


쌍용 자동차 2646명의 노동자에 대한 살인적인 정리해고 이후 2년 6개월 동안 해고자와 그의 가족, 공장안의 노동자까지 총 19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회적 안정망이 없는 우리 사회에서 해고는 한 가정을 절대적 빈곤으로 몰아넣는 경제적 살인이었다. 해고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며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과 투쟁을 폭력행위로 매도하는 우리 사회에서 정리해고는 사회적 살인이었다. 친형제처럼 지내 온 동료들을 ‘산자’와 ‘죽은자’로 갈라 서로를 향해 쇠파이프를 들고 새총을 겨누게 만든 정리해고는 한 인간에 대한 인격적 살인이었다.

지난 10월 쌍용차 노동조합은 정리해고의 근거가 된 회계 자료가 조작된 것이라는 정황과 증거를 포착해 그 증거물을 법원에 제출했다. 살인적인 정리해고가 회사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해고를 위한 해고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회사를 살려야 한다는 명분 때문에 많은 해고자들이 희망 퇴직서를 써야 했고, 파업 참가자들은 회사를 위기에 빠트렸다는 억울한 누명까지 뒤집어써야 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해고 노동자들은 누구도 귀 기울여 주지 않는 억울함과 울분을 홀로 감당해야 했고 결국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이 해고는 명백한 살인이었다.

이 죽음의 1차적인 책임은 부실경영의 책임을 죄 없는 노동자들에게 넘긴 경영자들, 노동자들을 국민으로 생각하지 않는 무자비한 정권에 있다. 그러나 사람이 19명이나 죽어나갈 때까지 자본과 정권의 살인 행위를 앉아서 지켜보기만 한 우리들 역시 이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19명의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 그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다시는 이런 죽음이 생기지 않도록 함께 연대 하는 것은 살인과 죽음을 방조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당연한 몫이다. 이 안타깝고 애통한 죽음을 이제는 나의 책임으로, 나의 아픔을 함께 받아 안아야 한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문제는 더 이상 이념과 가치의 문제가 아닌 생사의 문제이다.

성실하게 살아온 한 노동자가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일터에서 해고되고,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재취업도 할 수 없게 되고, 생활고와 스트레스로 결국 죽음에 이르는 이 현실을 납득할 수 없다면 지금 당장 쌍용자동차 공장 앞 희망텐트촌으로 달려와야 한다. 이 절망과 죽음의 수레바퀴를 멈추고 싶다면 우리들 한명 한명이 희망이 되어 절망의 공장을 희망으로 포위해야 한다.

희망텐트촌 촌민이 된다면 알게 될 것이다. 절망 가운데에서 희망을 일구는 일에 동참한다는 것이 얼마나 따듯하고 가슴 설레는 일인지. 30일 동안 매일 19개의 촛불을 밝히며 추모의 기도를 드리며 깨달았다. 죽음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것은 괴롭고 힘든 일이 아니라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화해시키는 치유와 회복의 과정이라는 것을.


절망과 무기력함으로 얼어붙어 있던 공장 앞이 함께 하는 사람들의 온기로 조금씩 덥혀지고 사그라지던 희망의 불씨가 조금씩 살아났다. 지난 3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절망의 이유 앞에서도 여전히 희망을 꿈꿔온 해고 노동자들 절망의 공장 앞에 희망의 텐트촌을 세우고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이제는 우리가 함께 희망을 싹틔우고 ‘함께 사는 삶’을 열매 맺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