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침묵은 지금 이 시간,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대한 차별금지가 이미 담겨있는 서울학생인권조례 원안을 사수하기 위해 농성하고 있는 십대 청소년들의 목소리와 대비하여 섬뜩할 정도이기까지 하다. 편견을 깨고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의 다양성을 인정하기 위해 세상이 이렇게 진보하고 있는 동안, 대한민국은 무엇을 했을까?
대한민국, 성소수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세계적 리더?
사실 세계가 이렇게 진보하는 데 대한민국 정부는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지난 12월 15일에 나온 보고서, 정확하게는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적 법과 관행 및 개인에 대한 폭력적인 행위>라는 제목으로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이 유엔인권이사회에 제출한 이 보고서를 촉구하는 데에는 대한민국이 한몫했다.
그러니까 올해 6월 17일, 당시 유엔인권이사회의 이사국으로 있었던 한국 정부는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벌어지는 폭력과 인권침해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는 결의문에 찬성표를 던졌다. 유엔인권이사회 47개국 가운데 반대하는 19개국에 대항하여 찬성에 표를 던진 23개 국가의 하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일본 등과 함께 당당히 인권옹호국의 대열에 섰다.
이 뿐인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서 인정하는 차별금지사유의 하나로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명시한 <일반논평20>에 대해 다른 나라들이 왈가왈부 할 때, 대한민국은 굳건하게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명시해야” 한다는 데에 입장을 표명하고 투표권을 행사하였다. 적어도 세계의 눈에는, 대한민국은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데 앞장서는 나라이다.
사실 그 핵심에는 반기문 사무총장이 있다. 반기문 사무총장은 세계적인 LGBT 인권단체들이 가장 사랑하는 연설문 중의 하나를 남겼다. 작년 세계 인권의 날이었던 12월 10일의 연설문의 일부를 보자.
양심을 가진 인간으로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차별을, 특별히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거부합니다... 폭력이 개입된 일일 때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에 대한 폭행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 대한 공격입니다. 폭력은 가정을 파괴합니다. 한 집단과 다른 집단 사이에 대결 구도를 만들어 사회를 분열시킵니다.
게다가 폭력 가해자들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빠져나갈 때, 그들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보편적 가치들을 비웃습니다. 우리에게는 차별에 맞서고, 우리의 소중한 동료를 보호하고, 우리의 기본 원칙들을 지켜야할 공동의 책임이 있습니다.
문화적 태도와 보편적 인권이 대립할 때에는, 보편적 인권이 반드시 우선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편견에 맞설 때에야 비로소 폭력은 멈출 것입니다. 우리가 목소리를 낼 때에야 비로소 낙인과 차별은 끝날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 모두가 각자의 소임을 해야 합니다; 집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서로 연대하여 함께 일어나야 합니다.
LGBT 인권운동에서 기념비적인 연설로 칭송받는 이 연설이 국내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무 기사도 없었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인지,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벌어질 어떤 일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몰라도, 이 중요한 이야기는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았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말라이, 우간다 같은 나라의 성소수자를 옹호하고 LGBT 인권활동을 칭송하는 동안, 정작 이 땅의 성소수자 청소년들은 인권조례에 있는 차별금지조항을 지키기 위해 찬 바닥에 앉아 인권을 외치고 있다.
반기문 사무총장과 유엔에 있는 한국인들, 그들만 알고 있는 진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사실 유엔인권조직에는 꽤 많은 한국인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유엔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의 강경화 부고등판무관도 한국인이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위원회의 위원(전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위원이기도 함)인 신혜수 유엔인권정책센터 대표, 아동권리위원회의 위원인 이양희 교수도 한국인이다.
이 위원들은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의한 차별이 인권침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 위원들이 하는 일이 각 국가의 인권침해실태를 조사하고 이에 대한 권고안을 작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권고했다. 2009년에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위원회가, 2011년에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와 아동권리위원회가 반복해서 “성적 지향”을 포함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촉구하였다. 이 중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특별히 이 권고사항에 대한 진행사항을 2013년까지 제출하라고 요구하였다. 이 사안에 대한 각별한 관심의 표시이다.
세계인권선언에 담겨있는 차별금지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굳이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명시한 입법을 하라고 촉구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에 대해 침묵하는 동안,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이런 편견에 근거한 폭력과 차별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겪는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들었다. 어느 학생은 교사가 교실에서 동성애자에 대해 험담하고 비웃는 이야기를 매일 견뎌야 하고, 급우들이 더럽다고 놀리고 피하고 때로는 구타하기도 하는 학교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꾹 참고 다녀야 한다. 동성애자이거나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징계를 받고, 입학이 거부되거나 강제로 전학되거나 퇴학당하는 일이 “학생지도”나 “학교질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이쯤 되면 반기문을 만나 직접 물어보고 싶다. 이런 학교현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나라의 전통과 문화에 비추어, 혹은 특정 종교가 내세우는 이유로, 그 정도로 성소수자의 인권을 양보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연설에서 말씀하신 대로, “편견에 맞설 때에야 비로소 폭력은 멈출 것”이므로 “보편적 인권”을 위해,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거부”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각자의 소임을 다해야” 하는 건지.
성소수자 청소년의 인권, 또 하나의 전해지지 않은 메시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세계인권의 날에 즈음해 역시 반기문 사무총장은 성소수자에 관하여 중요한 연설문을 남겼다. 이번에는 특히나 청소년 성소수자에 대한 의미 있는 발언을 하였다. 아주 최근인 2011년 12월 8일의 연설문의 일부를 보자.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이 그러하시듯, 저도 어리게는 11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이 그들의 짐작된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 때문에 지속적으로 욕설과 조롱, 신체적인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보고들에 계속 낙담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집단괴롭힘은 몇몇 나라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세계 모든 지역의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동성애혐오적 집단괴롭힘이 학교현장과 청소년기에 한정되어 나타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뿌리는 더 깊숙이 있습니다. 사회전반에 만연해 있는 해로운 태도에 그 뿌리가 있으며, 때로는 분열을 조장하는 유명인사와, 국가 당국이 승인한 차별적인 법과 관행이 이러한 태도를 부추기기도 합니다.
이 문제와 맞서는 일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과제입니다. 부모로서, 가족구성원으로서, 교사로서, 이웃으로서, 커뮤니티 리더로서, 언론인으로서, 종교인으로서, 공무원으로서, 우리 모두가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에게 이것은 법적 의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국제인권법에 따라, 모든 국가는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한 것을 포함하여 폭력과 차별로부터 국민—모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반드시 취해야 합니다.
이 연설 역시 트위터 등 SNS를 통해 알음알음 전파된 것 이외에, 대중적으로 주요 언론을 통해 알려지지는 않았다. 이쯤 되면 우리가 얼마나 선택적으로 국제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게 되는지 짐작해볼 만하다. 적어도 인권분야에서 우리가 얼마나 작은 세상 안에 갇혀 있는지, 그 결과 다른 나라에 비해 얼마나 미개한 수준에 있는지, 인권의 관점이 아니라 애국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서울시 의원들에게 가르치는 인권 이야기
그리고 며칠 전, 유엔 최초의 성소수자에 관한 보고서라는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적 법과 관행 및 개인에 대한 폭력적인 행위>가 발표되었다. 이 보고서에는 물론 교육현장에서 일어나는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인터섹스에 대한 폭력과 차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학교나 교육당국이 직접 입학거부나 퇴학으로 가하는 차별, 학교에서 성소수자 청소년에 대해 순수히 편견 때문에 일어나는 괴롭힘을 묵인하거나 오히려 정당하며, 편견과 고정관념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한다.
이런 편견과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좋은 예들도 소개한다. 예를 들어, 브라질 정부가 “동성애혐오증 없는 브라질”이라는 공공교육캠페인을 지원하고 유명인들이 이런 캠페인에서 메시지를 전달했다던가, 호주에서 공적기금으로 <안전한 학교 연합>을 만들어 교사를 위한 훈련과 학습자료를 제공하는 사례도 소개한다. 아일랜드에서는 동성애혐오방지를 위한 비디오를 학교에서 상영하는데, 이 비디오를 시청한 사람이 온라인 상에서 50만 명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노르웨이에서는 LGBT의 권리 보호를 위해 8개의 정부부서를 동원하여 일련의 특별조치를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보고서는 대한민국을 비롯한 회원국가들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차별금지사유에 포함하고 교차 형태의 차별을 인정하는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안타깝게도 우리는 지금, 차별금지법이 아닌 서울시 조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 2007년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포함한 차별금지법이 통과가 되었더라면, 지난 5일 동안 청소년들이 서울시의회 회관 찬 바닥에서 들어도 듣지 못하는 시의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이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앉아 있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경기, 광주에 이어 서울에서, 그리고 각 도시에서 이렇게 청소년들이 싸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지난 4년 동안 이들이 안전하게 학교 다닐 수 있도록 사회가 보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아이들의 싸움은, 농성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에 대한 것이고, 그들이 성장한 후 뒤를 잇게 되는 미래의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이 싸움에 지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의 목소리는 더욱 커진다. 정문진 서울시 부교육위원장은 성소수자를 병리적인 존재로 묘사하며 에이즈를 퍼뜨리고 사회를 문란하게 한다는 편견을 아무 거리낌 없이 교육위원회 회의에서 말하였다. 그것이 실증적으로 근거 없는 사실이라고, 그런 발언이 오히려 인권침해라는 메시지는 차단한 채, 이런 편견과 혐오어린 정보는 교사들 속에, 학생들 속에 더 넓게 퍼진다.
지금 학생인권조례안에 이미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이 차별금지사유로 보호의 대상으로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빼야 한다고 발언하는 의원은, 그 자체로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 그들이 지금은 편견과 혐오로 소리 높이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갇혀 정치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인권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유엔이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니, 적어도 6개월 후 우리나라의 많은 이들이 편견과 인권을 구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이 아이들의 삶에 관한, 인권에 관한 문제를 정치적으로 판단한 분들은 후회하게 될 것이다. 세계인권의 흐름에 무지한 것에 대해서도 부끄럽다고 통탄하게 될 것이다. 혹은, 굳이 정치적인 판단을 하고자 한다면, 인권을 알고 성장하고 있는 우리 청소년들의 눈치를 먼저 보는 것이 순서 아니겠는가.
너무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알기를 바란다. 일단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의 보고서를 먼저 읽어보라. 그리고 서울시학생인권조례를 원안대로 통과시켜라.
[참고] 유엔인권고등판무관 보고서를 보려면,
(영문) http://www2.ohchr.org/english/bodies/hrcouncil/docs/19session/A.HRC.19.41_English.pdf
(한글) http://www.tongcenter.org/nondiscrim/sogi/ohchr19_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