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십대의 성(性)과 학교 교육

[기고] 성정체성과 임신출산에 따른 차별금지, 모두가 당사자다

메뉴보기: 클릭하세요. V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안 서명을 받을 당시부터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학생인권조례를 검색하면 연관검색어가 ‘학생인권조례 동성애’로 나왔다. 학생인권조례 교육청 초안은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으로 인한 차별 금지를 배제한 채로 발표되었고, 논란 끝에 교육청 자문위원회에서 성적지향을 포함시킨 채로 발의하였다. 한 고비를 넘겨 지금은 의회 심의단계로 넘어간 상태이나 여전히 ‘학생인권조례 동성애’ 반대 움직임이 거세다.

학생인권조례를 반대하는 이들은 ‘성적지향’과 ‘임신출산’을 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사람들이 일반적인 폭행보다 성폭행 사건에 대해 (불편하기 그지없는) 호기심을 보이듯, 저쪽 사람들의 거센 관심과 반대에 현재 학생인권조례 논의는 ‘성적지향, 임신출산을 뺄 것인가 넣을 것인가’로 초점이 맞추어졌다. “동성애 조장해서 에이즈 퍼뜨리고 초등학생 임신시키는 학생인권조례 폐지하라”가 반대파들의 구호였다.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안의 원안 통과를 촉구하는 성소수자, 지지자, 인권활동가 등 30여 명이 14일 늦은 2시 서울시의회 의원회관 로비를 점거했다.

십대의 성과 학교가 가르치는 것

한국 사회에서 십대의 성에 대한 담론이 나오는 경우는 성교육 관련해서거나, 혹은 십대들이 얼마나 성적으로 ‘문란’한지 비난할 때뿐이다. 성소수자에 관련해서도 그들을 차별할지 안 할지 비성소수자 중심으로 논쟁이 벌어지는 수준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성(性) 금기는 존재하고, 이는 정상적인 성과 그렇지 않은 성 사이의 권력관계를 형성해서 차별할 사람들을 골라낸다.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분홍색과 빨간색은 여자색, 파란색과 초록색은 남자색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여자 친구들은 그림을 그릴 때 여자색 크레파스를 썼고, 남자친구들은 남자색 칫솔을 가져와 양치질을 했다. 반에서 혼자 파란색을 좋아하는 여자애였던 내게 누군가가 말했다. “넌 남자 같아서 너랑은 놀기 싫어.”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친구들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남학교, 여학교로 흩어졌다. 남녀공학 복도에는 왼쪽은 남학생, 오른쪽은 여학생만 지나다닐 수 있는 ‘윤리선’이 그어졌다. 여학생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바지교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교칙부터 불건전한 이성교제 시 벌점 10점이라는 그린마일리지(상벌점제)까지, 학교는 여학생과 남학생의 성역할을 규칙으로 하나하나 정해두고 가르치는 공간이다.

그 와중에 성소수자로 밝혀지거나 임신 출산한 학생들은 (너무도 ‘비정상적’이라 교칙에도 언급되지는 않지만) 자퇴를 강요당하고 퇴학조치가 으레 가해졌다. 그들이 죽음으로 내몰렸을 때 원인은 주로 ‘시험성적 비관’으로 가려진다. 십대에게 덧씌워진 성역할은 분명하다. 이성애자이면서 이성을 욕망하지 않을 것, 여자답고 남자답지만 무성적일 것, 부모님께 효도하고 아직은 이성 관계에서 ‘순결’을 유지할 것!

그러나 통념과는 다르게, 나와 내 주위 사례들을 보면 이미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다양한 성적 체험과 상상(주로 자위행위이거나 꿈속 환상이기는 했지만)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많았고, 처음으로 연애감정을 느낀 시기도 대부분 십대 초반이었다. 그것은 그들만의 문제일까?

그것은 그들만의 문제일까?

어떤 계층에게 성적 권리를 빼앗는 것은 성 억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십대의 성에 대해 저들이 저토록 완고한 입장을 취할 때, 미성숙과 비정상, 사회 체제의 파괴, 부모에 대한 예의와 아직은 공부할 때라는 둥 온갖 논리가 따라온다. 이성애적 부부가 혼인을 하여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은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성과 결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이것이 통념화 된 삶의 방식이라면, 그리고 그러한 가족 체제가 유지되어야 남성에게는 과잉노동을, 여성에게는 무보수 가사노동을 강요할 수 있다면, 십대의 성은 확실히 금기시되어야 마땅할 테다.

학교는 사회화 기관이다. 그 사회에 적응하여 기존의 가치를 따르고 재생산할 수 있는 인간 양성이 현재 학교의 목적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의 여성과 남성들은 학교에서 취해야만 했던 여성과 남성의 포지션을 신기하리만치 거의 그대로 답습한다. 두 분류로 나누어진 성은 좀처럼 하나가 되지도, 더욱 다양한 분류로 나누어지지도 않는다. 사람마다 고유한 것이어야 할 섹슈얼리티가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름 아래 묶이고, 순결함과 문란함으로 구분되고, 연령과 혼인 여부에 따라 차등 대우를 받는 현실은 분명 인위적이고 차별적이다.

기존 성체계의 폭력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계층은 성소수자와 비혼모를 포함한 ‘보편’적인 성역할 바깥의 사람들이겠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구분된 집단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의 트랜스젠더이고 동성애자이며 정상가족 신화의 피해자다.

나는 학생인권조례의 성적지향, 성별정체성과 임신 출산이 차별금지 사유로 명시되지 않는 문제가 ‘당사자’들의 인권 문제로만 읽히는 것에 반대한다. 정상적인 성정체성을 지정하기 전에는 성소수자도 없었고, 올바른 성행위가 혼인 후로 미뤄지기 전에는 청소년 비혼모도 없었다. 십대 성소수자와 십대 비혼모를 구분 짓고 차별하게 만든 장치들은 무엇인지, 나는 이 고리가 많은 부조리를 찾아낼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출처=인권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