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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꼼수다”, 대안 미디어의 맛을 보다

[기고] “나는 꼼수다”가 미디어운동에 주는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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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30일 밤. 나는 여의도 공원에 있었다. <나는 꼼수다>의 토크 콘서트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집에 와서 뉴스를 보니, 나는 한미FTA 반대 집회에 다녀 온 거였다. 콘서트 내내 FTA 얘기는 별로 없었건만. 뭐, FTA를 사랑하시는 가카에 대한 조롱, 아니 찬양은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니, 어찌어찌 그렇게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 옆에 서 있던 밍크코트를 입은 아주머니는 아마 자기가 FTA 반대 집회에 왔다고는 전혀 생각 안 했을 것이다.

주진우 기자가 수줍게 몇 마디 할 때마다 고성을 힘껏 질러내던 여성분들이나, 정봉주 전의원을 향해 “대권주자 정.봉.주.”를 장난스럽게 외치던 넥타이 아저씨들도, 심지어 무대에 올라가 FTA 찬성 국회의원 리스트를 담은 노래를 완벽히 암기해서 불러대던 그 대학생조차, 아마 내 생각엔 자기들이 FTA 반대 집회에 왔다고는 생각 안 했을 것 같다. 그들은 거기 “놀러”왔고, “구경”을 왔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많았다. 처음에 10만 명이 목표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허풍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 날, 상당히 추웠던 그 날 밤에, 내 생각엔 확실히 10만은 될 것이라 “심하게 추정되는” 사람들이, 그것도 비에 젖은 여의도 광장에, 모여 들었다. 그 4명을 보기 위해서.

  2011. 11. 30 여의도 공원 <나는 꼼수다> 콘서트를 보기 위해 모여든 10만 인파

팟캐스트를 통해 오디오 파일 형태로 서비스되는 <나는 꼼수다>는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정봉주 전 국회의원, 주진우 기자, 그리고 김용민 PD, 이렇게 4명이서 골방에 앉아 약 2시간 동안 왁자지껄 떠드는 내용을 담은 프로그램이다. 주로 정치적인 소재를 다루며, 대개는 대통령 등 대한민국 권력자들을 비판, 조롱하거나 잘못된 정부 정책에 대해 신랄한 공격을 퍼붓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방식이, 정치적인 내용을 다룬다고 해서 딱딱하거나 지루한 것이 아니라, 마치 술자리에서 낄낄대듯, 심히 경박하고 시끄러우며 욕설도 나오고, 아무튼 분명한건, 무지하게 “재미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이 4인의 잡담은 4월 28일, 1회가 서비스된 이래,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현재 매 회 다운로드 숫자가 수백만 건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도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상당부분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그 결정타는 지난 10월 26일 서울시장 선거였다. 많은 전문가들은 박원순 후보가 서울시장에 당선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나는 꼼수다>에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요즘 <나는 꼼수다> 4인방은 전국 각지에서 토크 콘서트를 개최하며 오프라인으로까지 활동 반경을 넓힌 상태이고, 콘서트에는 항상 수천에서 수만의 관객들이 들어차며 매진 행렬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까지가 <나는 꼼수다>의 히스토리인 셈인데, 이건 참 굉장한 일인 것 같다. <나는 꼼수다>는 분명 기존의 방송 형태는 아니다. 단순히 팟캐스트니, 오디오 파일이니 하는 형식적인 측면을 떠나서도 <나는 꼼수다>는 기존의 주류 미디어들의 영역에 포함될 수 없는 수 많은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도대체 4명의 중년 남성이 모여서 담배 피우며 욕지거리 섞어 가면서 대통령 험담이나 하는 것을 어느 주류 미디어 시스템에서 소화해낼 수 있겠는가. 그들은 남 눈치 안 보고, 자기들이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비판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비판한다. 이것은 분명히 비-주류적이고 독립적이며, 기존의 것을 대신한다는 측면에서 대안적이다. 그렇다면, <나는 꼼수다>는 분명히 대안 미디어인 셈이다. 김명준 미디액트 소장은 대안 미디어를 이렇게 정의내린 바 있다. “대안적 체계 및 역량을 수립함으로서 주류 미디어의 정치적 변화에 좌우되지 않는 독립적인 목소리, 내용과 형식, 그리고 콘텐츠 생산 주체를 가지는 것.” 어떤가. 이 정의에 <나는 꼼수다>는 정확히 들어맞는다.

  <나는 꼼수다> 멤버 케리커쳐
그렇다. <나는 꼼수다>에 호의적이든 아니든, 일단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나는 꼼수다>가 분명히 대안 미디어일 뿐만 아니라, 기존에 우리가 대안 미디어라 불러왔던 것들과 사실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꼼수다>는 주류 미디어 진영, 그리고 대안 미디어 진영 양쪽에서 모두 버린 자식 취급을 받아왔다. 주류 미디어에서야 당연히 오랫동안 <나는 꼼수다>를 무시해왔다.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꼼수다>가 커버리긴 했지만, 심지어 지금도 <나는 꼼수다>는 주류 미디어로부터 괴담 생산자, 천박한 방송, 한 때의 유행 정도로 치부되고 있다. 수백만 건 다운로드, 10만 인파 등의 이런 수치가 증명하는 데도 주류 미디어에서 <나는 꼼수다>를 무시하고 있는 건, 영향력 축소를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것도 있지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현상에 대한 당혹감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주류 미디어, 즉 매스 미디어는 역사적으로 “언제나” 의제 설정 기능을 담당해왔다. 의제 설정이란, 매스미디어가 어떤 의제를 비중 있게 다루면 일반 수용자들은 그 이슈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중요한 의제로 부각된다는 것이다. 대중사회에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권력이며, 매스미디어는, 자기들끼리만 치고 박고 싸웠을 뿐, 한 번도 이에 대해 다른 경쟁자를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대안 미디어들이 그 동안 꾸준히 활동해 오긴 했지만, 주류 미디어 입장에서는 일주일에 3~40분을 퍼블릭 액세스 프로그램에 양보하며 동정을 베풀어 주어야 하는 가엾은 상대로나 생각할 뿐, 대안 미디어들을 경쟁자로는 꿈에라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꼼수다>라는 이 괴물은 대안 미디어주제에 주류 미디어를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니, 도대체 이놈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헷갈리는 것이다. 그래서 무려 서울 시장 선거가 있던 10월까지 주류 미디어는 <나는 꼼수다>를 전혀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마치 없는 것처럼. 인터넷에 떠도는 **녀 영상 정도의 취급을 했던 것이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일단 그 영향력을 인정하는 추세이지만, 다른 대안 미디어들처럼 그냥 계속 무시하면 곧 사그라질 거라고 믿고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그것의 의제 설정 기능만큼은 어떻게든 빼앗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주류 미디어가 가진 최고의 권력인 의제 설정 기능마저 대안 미디어 따위에 뺏기는 쪽팔림은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들고 나온 단어가 “괴담”이다. 저 족보도 알 수 없는 놈들이 중요하게 다루는 의제들은 다 근거 없는 것이며 공중의 의제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식으로 몰아감으로서 <나는 꼼수다>의 의제 설정 기능 자체를 박탈하려고 하는 것이다.

주류 미디어의 이러한 반응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며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런데 다소 의아한 것은 기존 대안 미디어 진영의 반응이다. 그들 역시도 <나는 꼼수다>를 사실상 무시하고 있으며,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에 대한 어떤 논의나 분석 등도 이뤄지지 않고 있고, 이를 대안 미디어 진영에서 어떤 방식으로 흡수할 것 인지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누가 봐도 명백히 대안 미디어이며 최대의 성공 케이스인 <나는 꼼수다>가 오히려 대안 미디어 진영에서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는 이유는, 사실 주류 미디어가 <나는 꼼수다>를 무시해왔던 이유와 명백히 일치한다.

대안 미디어가 <나는 꼼수다>를 무시하는 이유 역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현상에 대한 당혹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대안 미디어가 이 정도로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을 전에 본 적이 없으니, 이는 우리와 다른 어떤 것이며 차라리 새로운 종류의 주류 미디어로 바라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심지어는 이렇게 가공할 만한 인기를 누리고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들이 주류라는 증거이며, 비-상업성을 중시하는 대안 미디어의 정신에는 어긋난다는 생각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초대박이 났어도 <워낭소리>나 <똥파리>는 여전히 독립영화이며, 인기와 영향력이 크다고 해서 그것이 곧 상업적이라는 말과 등치되는 것도 아니다. 대안 미디어는 그 대안적 체계와 독립성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고 있고 그 결과로 커뮤니케이션의 범위가 대개 좁아왔던 것이지, 커뮤니케이션의 범위가 좁은 것을 대안 미디어의 특징이라고 주객전도하여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나는 꼼수다>는 결국 엔터테인먼트이므로 대안 미디어 진영과는 종류가 다르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또한, 대안 미디어라는 말이 장르를 나누는 말이 아니므로 논리적 성립이 되기는 힘들다. 대안 미디어는 그 대안적 체계와 독립성만을 갖춘다면, 엔터테인먼트여도 상관없고 쇼버라이어티여도 상관없고 토크쇼가 되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물론, 분명한 건 <나는 꼼수다>가 아무리 인기 있어도 이는 수많은 대안 미디어의 한 부분일 뿐이지, 대안 미디어를 대표하는 것이거나, 대안 미디어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정봉주 전 의원이 촛불 때 활약한 <칼라 TV>를 폄하하며 <칼라 TV>는 재미없어서 망했다고 인터뷰를 하여 논란이 되었는데, 이 발언은 물론 적절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것은 <무한도전> PD가 <무한지대> PD에게 시청률 자랑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봉주 전의원의 이러한 발언을 통해 <나는 꼼수다>가 기존 대안 미디어와 선을 그은 것이라고 판단해서도 곤란하다. 오히려 각자의 역할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비디오 액티비즘으로서의 대안 미디어가 있는 것이고, <나는 꼼수다>처럼 해학과 풍자로서의 대안 미디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다 안고 가야만 하는 숙제이다.

  <뉴욕 타임즈>에 실린 <나는 꼼수다> 기사

그렇다면, <나는 꼼수다>가 대안 미디어 진영에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냥 또 하나의 대안 미디어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그 업적(?)이 너무 대단하다. <나는 꼼수다>의 경험이 특별한 이유는 대안 미디어가 “직접” 공중 의제를 설정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의제 설정 기능은 주류 미디어의 전유물이었고, 주류 미디어는 공중의 의제를 설정할 뿐만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의제들을 공중의 의제에서 제외하는 역할마저 해 왔다.

대안 미디어는 이처럼 매스 미디어에서 배제된 이슈들, 매스 미디어에서 생략된 실제 삶의 모습들을 공중에게 적극적으로 의제화하는 것을 그 큰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대안 미디어는 당연히 공중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만나도록 커뮤니케이션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 필요한데, 다시 말하면 인기를 얻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류 미디어만 인기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대안 미디어도 의제 설정을 위해서는 인기(人氣), 즉 사람의 기운이 필요하다. 결국 운동이 어떤 특정한 변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람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고, 그 것은 소통과 설득과 교육과 결정의 과정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대안 미디어는 그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애초에 이를 위해 고안, 설계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없다면 누구와 소통하며, 누구를 설득하고, 누구를 교육하고, 누구와 결정을 나누겠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동안 대안 미디어는 단독으로 사회의 변화를 일으킬만한 규모의 사람들을 모아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대안미디어의 본질적 속성상 매우 소규모이고 매스미디어처럼 대량의 정보를 유포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별로 크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다만, 대안 미디어가 설정한 의제를 매스 미디어가 다시 의제화하거나, 거의 동시에 함께 의제화하여 공중의제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들은 종종 있어 왔다. 이런 것은 대개 전쟁이나 시위, 파업, 재난 현장과 같은 특정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 방송국이 촬영한 경찰의 과잉진압 영상이 화제가 되자, 공중파 뉴스에서 다루어지고, 이를 통해 사회 이슈가 형성이 된다거나 하는 것들.

그러나 매스 미디어에서 철저히 배재하였던 의제를 대안 미디어가 단독으로 끌고 나와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알리고 공중 의제화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나는 꼼수다>가 해낸 것이다. 그것도 특정 사건과 관련한 특정 이슈만이 아니라, “정치”라고 하는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의제를, 물론 “가카”라고 하는 구체적인 대상을 목표로 하고 있긴 하지만, 이 땅의 그 어떤 주류 미디어도 해내지 못한 규모로 공론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대안 미디어가 직접 공중 의제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대안 미디어 운동의, 방법적으로는, 최종 목표라 할 만한 것이다. 따라서 <나는 꼼수다>의 이 놀라운 경험은 반드시 논의되고 분석되고 숙고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나는 꼼수다>가 대안 미디어의 “대안”이거나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안 미디어가 직접 공중 의제를 만들어내는 가장 좋은 방안은, <나는 꼼수다>처럼 특정 미디어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제에 대해 다양한 형태의 수많은 미디어들이 반복적으로 내용을 생산해냄으로 그것이 마침내 공중 의제로 떠오르게 되는 모델이다.

방식적인 면에서는 2008년 광우병 사태 때의 촛불 집회가 그 유사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 경우는 주류 미디어와 의제 설정을 나누었고 특정 이슈로 확 불타오른 경우이기 했지만, 의제가 계속 확산되고 공론화되는 데에 <칼라 TV>를 비롯한 수많은 대안 미디어들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게다가 일반 시민들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놀랄만한 규모의 커뮤니케이션을 보여준 역사적 사례였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최근에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어 전 세계로 번져나가고 있는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가 있다. 이 경우는 대안 미디어가 직접 공중 의제를 설정해낸 모범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ACT! 77호]에 실린 “온라인 동영상으로 월가 점령 시위 들여다보기 - 뉴 미디어가 제시하는 새로운 소통 가능성”을 참조해보기 바란다.)

<나는 꼼수다>의 사례는, 그 자체가 바람직한 모델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기 보다는, 무엇보다도 대안 미디어 진영에 특별한 경험을 제공해 주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감을 얻도록 해 주었다는 것, 그리고 일반 대중들이 대안 미디어에 친숙해지도록 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을 수 있겠다. 골방에서 짐승 같은 남자 넷이 한밤중에 낄낄대며 떠들어댔더니, 그것이 6개월 후에 10만 명의 사람들을 그 추운 날, 그 젖은 바닥에 기꺼이 앉게 만들었다는 그 특별한 경험. 이토록 정치와 사회에, 아니 다른 사람의 삶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대인들을 상대로, 대안 미디어가 이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자신감.

지난 수년 간 미디어운동의 지형은 미디어센터와 미디어교육을 중심으로 움직였고, 퍼블릭 액세스를 위시한 대안 미디어는 점점 위축되고 그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는 추세였다. 하지만, 미디어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미디어운동의 꽃은 결국 대안 미디어의 활성화일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올해 퍼블릭액세스네트워크가 부활하고, [단디 TV], [플로그 TV], [복지갈구화적단], 트위터 무비 등의 다양한 시도들이 등장하는 등, 대안 미디어에 대한 관심과 체계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꼼수다>를 통해 올 한 해 대중들은 대안 미디어의 맛을 보았고, 최소한 그것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는 알게 되었다. 매스 미디어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는 의제만을 공론화한다는 것, 거기에 의존하다가는 맥없이 끌려 다니고 만다는 것을 각성하게 되었다. 미디어운동 진영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미디어 민주주의를 향한 발걸음을 더욱 재촉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나는 꼼수다>가 미디어운동 진영에 던져준 숙제와 함의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것일지 모른다. 앞으로 더욱 함께 논의해보고 숙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출처=ACT77호)
덧붙이는 말

[필자소개] 박민욱_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고, 지금은 한국의 어느 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있다. 간간이 단편 영화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