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기륭전자, 용산참사 사건 등으로 세 번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와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이번엔 꼭 몇 개월이라도 살다 나가겠습니다.
근 몇 년 넋이 빠져 살았습니다.
어느 땐 백발이 성성하고 허리가 구부러진 평택 대추리 어르신들 곁이었고,
잠깐 눈을 감았다 떴더니 67일째, 94일째 굶고 있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 곁이었고,
잠깐 다시 눈을 감았다 떴더니 용산4가 다섯 분의 시신 곁이었고,
잠깐 다시 눈을 감았다 떴더니 이번엔 내가 기륭전자공장 앞
포클레인 붐대 위에서 죽겠다고 매달려 있었습니다.
잠깐 다시 눈을 감았다 떴더니 내가 폭우를 맞으며 목발을 짚고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잠깐 다시 눈을 감았다 뜨고 나면,
조금은
편안하고
행복하고
안전한,
사람들의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여 제가 무슨 고민이 깊어 그랬을 거라고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다만 사는 게 조금 외롭고 쓸쓸해서였을 거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탁발한 시인의 길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한편, 가끔 시인들은 넋이 좀 빠져 저 세상으로도, 이 세상으로도
좀 왔다 갔다 해야 제 맛인 거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하튼, 거의 사회적으로 시인의 탈을 쓴 “전문시위꾼”으로 낙인찍히던 때
구사일생으로 창비와 신동엽 선생님께서 저를 다시 시인으로 호명해 주셨습니다.
오전엔 체포영장 발부 소식을,
그리고 오후엔 수상 소식을 듣게 되는 기가 막힌 날.
오전 체포영장 소식도 덩달아 무슨 큰 상 소식처럼 들리던 날,
오후 수상 소식이 오히려 엄중한 탄압으로 느껴지기도 하던 날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살고, 쓰겠습니다.
신동엽 선생님의 시 <종로5가>에 나오는 칠흑 같은 밤, 맨발로 빗속에서 고구마 한 자루를 메고 낯선 주소를 묻는 한 시골아이처럼,
장총을 곁에 세워두고 어느 바위 곁에 누워 곤히 잠든 한 동학농민군처럼 그렇게,
조금은 높고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