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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반도체 공장에 들어가 일 하는 악몽을 꾼다”

[연속기획](1) 반도체에 가려진 그림자 노동 - 이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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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주] “그들은 처음부터 이 화학약품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우리를 신경 쓰지 않은 거예요. 그들은 오직 돈 버는 것에만 신경을 썼어요.”

IBM 반도체 노동자 케이스 버락은 말했다. 그는 IBM에서 일을 한 대가로 고환암에 걸렸다. 20년 후, 반도체 주요 수출국인 한국에 수많은 케이스 버락이 생겨났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한 노동자들은 암과 같은 희귀질환에 걸렸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에 제보된 반도체 직업병 피해 수는 150명에 다다른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반도체 피해자 열전을 총 6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정연(가명)_76년생. 1995년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입사. 디퓨전 공정과 씬 필름 공정에서 오퍼레이터로 3년간 근무. 팔과 다리 마비 증상으로 인해 퇴사. 염증성 다발 신경염 진단.

“반도체 이야기 들으면 지금도 아파요. 아픈 게 일주일이 가요. 아프면 꿈을 꿔요. 꿈에 반도체 공장을 가요. 내가 방진복을 다시 입고 있는 거예요. 꿈인데도 생각을 해요. 내가 왜 여기 왔을까? 왜 여기 와서 교대근무를 다시 한다 그러지? 여기 와서 아팠는데, 다시 아프면 안 되는데... 애가 타는 거예요. 그래도 방진복을 입고 라인에 들어가요. 계속 걱정을 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왜 와 있지, 나 아프면 안 되는데, 집에 가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내가 여기서 일 안 하고 나가면 우리 가족은 누가... 누가 책임지지? 내가 가장인데...”

앉은뱅이 병

“진짜 회사에 뭔가 분명히 있긴 있었어요. 회사 생활이 어땠냐면 만날 졸음이 오는 거예요. 그게 3년 가까이 되니까 사람이 서서도 조는 거예요. 계속 코피를 쏟고 배탈이 나고 먹어도 몸에 살이 안 붙고. 나중에는 몸무게가 40킬로그램까지 가는 거예요. 몸에 뭔가 이상이 왔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나중에는 거의 걸어 다니지를 못하니까. 누가 부축을 해줘야지만 걸어 다녔어요. 6개월 이상을 친구가 부축을 해줘서 회사를 다녔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잖아요? 근데 그때는 그렇게 해야 하는 건지 알았어요.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왔는데, 그때는 걷지도 못하고 팔 한 쪽은 아예 쓰지도 못했어요. 몸에 힘이 없어 가지고, 자려고 누우면 이불이 무거워서 잠을 못 잘 정도였어요.

아프고 나중에 보니까 ‘앉은뱅이 병’이라고 저랑 같은 병에 걸린 이주노동자들 사건이 있었어요. 공장에서 쓴 화학물질 때문에 그 사람들 그랬다고 하잖아요. 직업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죠. 분명한 것은 제가 삼성 반도체 들어갈 때는 정말 건강했거든요. 그런데 퇴사할 때는 부축을 받으면서 나왔어요.”


이정연 씨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디퓨전 공정에서 2년 반, 씬필름(박막) 공정에서 1년을 일했다. 디퓨전 공정에서 그녀가 한 작업은 화학가스를 주입한 고온설비에 웨이퍼를 넣는 작일이었다. 입사 1년 후부터 코피를 자주 쏟는 등 몸이 이상을 보이다가 씬필름 공정으로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열병을 앓았다. 이후 증상은 더욱 악화됐다. 낮은 오르막길도 걷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두 다리를 쓰지 못하고 팔에도 마비 증상이 와 회사를 그만뒀다.

정연 씨가 일한 반도체 클린룸에는 수백 가지의 화학물질이 사용된다. 특히 웨이퍼에 회로를 증착시키는 디퓨전 공정은 화학물질과 가스 사용의 빈도가 높다. 그러나 정연 씨는 사용한 설비에 어떤 화학물질이 사용됐는지 알지 못한다. 교육 받은 적 없고, 이미 오래 전 일이라 그나마 기억도 없다. 다만 같은 기숙사를 쓰던 회사 선배가 그녀의 병을 보고 “여기서 일했던 내 친구도 이런 병에 걸려서 그만두었는데”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제 주변에 있는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디퓨전에서 일했던 엔지니어도 뇌종양 수술을 받고 퇴사를 했다대요. 저 있을 때도 3조인가 몇 조에 있던 언니가 원인도 모르고 사망을 했어요. 저희 친척 중에 한 명은 아이를 못 나요. 그러려니 했는데 대화를 해보니 삼성반도체에 근무를 했던 사람이고...

디퓨전 공정에 포클 장비 이런 게 있었어요. 화학가스가 많이 들어가는 기계로 알고 있어요. 사람들은 내가 그 장비를 직접 다루지 않아서 큰 영향이 없다고 하지만, 기계 문을 열고 닫고 웨이퍼 넣는 걸 항상 내가 했는데 어떻게 노출이 안 되겠어요? 또 생산량 때문에 웨이퍼를 빨리 꺼내야 해요. 웨이퍼 식히는 시간을 단축하려고 작동 중에 설비를 오픈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것도 사수 선배들이. 그럴 때 사람한테 화학물질 노출이 하나도 안 됐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짜 궁금해요. 대체 무슨 물질을 쓴 건지.”


나 난치병이야?

“제 병은 저도 잘 모르죠. 이런 게 있구나 할 뿐이지. 낫는 병이 아니라는 걸 안 지도 얼마 안 됐어요. 일체 병원에서 그런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에 나을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언제 동네 주민센터 앞에 ‘난치병’이라고 해서 병명이랑 코드번호가 쫙 걸렸어요. 난치병 환자들 지원을 합니다 하면서. 그냥 봤어요. 그런데 제 병명이 거기 있는 거예요. ‘나 난치병이야? 나 못 고치는 병이야?’ 그렇게 해서 병원에 물어본 게, 제 병이 평생 가는 병인 걸 알게 된 거예요. 제가 너무 어렸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가족들도 너무 몰랐고요.

퇴사 직후에 우리 가족은 회사가 어떻다는 걸 생각할 틈이 없었어요. 제 병이 어떤 병인지 찾느라 돌아다니기 바빴어요. 스물 두세 살 먹은 애가 팔은 떨고 다리는 쓰지도 못하게 됐는데, 어떤 부모가 회사에 전화해서 알아볼 생각을 하겠어요? 우선은 나아야 한다는 생각만 하지.”


정연 씨는 몇 차례의 오진 끝에 ‘다발성신경염’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다발성신경염은 말초신경에 이상이 생겨 팔과 다리에 감각장애와 마비가 일어나는 병이다.

“우리 엄마가 딸이 반도체, 그것도 삼성에 간다고 하니까 얼마나 자랑을 했겠어요. 근데 막상 몸 아파서 오니까 이런 불효가 없는 거예요. 우리 집은 빠듯한 살림인데 반도체에서 생활비를 벌어오던 사람이 환자가 돼서 왔단 말이에요. 저 아플 때 돈이 없어가지고 정말 많이 울었거든요. 아파서 집에 왔어요. 그런데 병원비가 없는 거예요.

서울에 있는 병원을 가야 하는데, 동생은 어리고 엄마는 직장 다니고 저를 데려다줄 사람도 없는 거예요. 돈도 없고. 나중에 친척한테 용달차 구해서, 그거 타고 새벽에 병원 앞에 가서 날 새고, 진료 받고 내려오고. 그 병원에 일주일 입원했는데 그때 당시 돈으로 600만 원 이상 나왔던 거 같아요. 엄마가 안방에서 그렇게 우는 걸 봤어요. 그거 보고 내가 병원 안 가겠다 하니까, 엄마 입장은 그러겠어요? 딸이 거의 불구가 돼서 왔는데. 엄마는 엄마가 가난한 게 죄고, 나는 내가 아파서 엄마를 도와주지 못한 게 상처였던 거예요. 그 상처를 최근에서야 풀었어요. 10년이 넘어서... 내가 10년간을 속앓이 하면서도 몰라서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어요.”


회사가 모를 리가 없어요

치료 후, 증상은 크게 호전되었다. 그러나 평생 약물치료를 해야 한다. 정연 씨는 13년 째 스테로이드계 약을 복용하고 있다. 퇴사 7년 후인 2005년, 정연 씨는 이주 여성노동자들이 노말헥산 중독으로 본인과 같은 앉은뱅이병(다발성신경염)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삼성반도체 회사에 연락을 해 물었다. ‘내가 일한 공정도 노말헥산을 사용했나?’ 회사 담당자는 ‘화학물질은 다 조금씩 쓰나, 화학물질이 인체에 해롭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다’며 답을 피했다. 회사를 통하지 않고 산재신청을 하기 위해 근로복지공단을 찾은 적도 있다. 공단 직원은 그녀의 병을 두고 지병이라 말하며, 발병 시기가 오래되어 산업재해를 인정받을 가능성이 적다고 했다. 그 말에 정연 씨는 산재신청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그때는 너무 아플 때였거든요. 그래서 포기를 했어요. 안 될 일에 신경을 쓸 수가 없는 거예요. 항상 그 생각은 했어요. 나는 아직도 안 나섰는데. 앞으로 재발 위험이 있는데. 억울한데. 아직도 다리가 불편해요. 제가 잘 넘어져요. 몸이 안 좋으면 더 잘 넘어지는데, 그럼 또 다시 시작인가? 재발인가? 오만가지 생각이 몰려와요. 의사도 모르는 이 병을, 나중에 내가 앉은뱅이 되면 그땐 어떻게 하죠?

그 엘리트들만 모인 회사가 모를 리가 없어요. 모른 척 하는 거죠. 한 명을 (직업병이라고 인정)해주면, 다른 사람들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방어를 하는 거죠. ‘우리 회사의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 가만있어라’ 방어를 하는 거죠. 하지만 삼성반도체 다니는 사람들 거의 다 집안 힘든 사람들, 장녀들이거든요. 돈 벌어야 하는 사람들 몸을 그렇게 만들고. 최소한 자기 회사에서 병을 가져왔으면 살게끔은 해줘야죠.”


지금 일하는 사람들은 억울한 것을 알까?

“잊고 살려고 노력을 해요. 안 그러면 제가 힘들거든요. 그냥 나는 건강한 사람이다 생각하고 살려고 해요. 그런데 가끔 한 번씩 몰려와요. 내가 삼성 반도체를 다녔다는 이유로 이렇게 손해를 봐야 하나. 울컥 뜨거운 게 치솟아요. 생각하면 더 아파요. 얼마 전에 반도체공장 정전 됐다는 기사를 봤어요. 정전되면 뭐 얼마가 손해네, 손실액이 얼마네 하는데 울컥하는 거예요. 저 있을 때도 정전이 한번 됐거든요. 반도체 정전되면 어떤 화학가스가 나올지 모르는데. 오년 후, 십년 후 저 노동자들 몸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그런 말은 하나도 없고 화가 나는 거예요. 지금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억울한 것을 알까? 오 년? 십 년? 아니면 병을 앓고 난 후에 그때 알게 되겠죠?”

이정연 씨는 삼성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3년을 일했다. 다리가 마비되는 일명 앉은뱅이병에 걸려 퇴사를 했다. 그때 나이 22살이었다. 13년이 지나, 지금은 일반사람처럼 걷고 생활하지만 여전히 약물치료가 필요하다. 약을 먹지 않으면 예전처럼 두 다리를 쓸 수 없을지 모른다. 재발을 걱정하고 작은 감기조차 두려워한다. 그녀는 요새도 반도체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는 악몽을 꾼다. 반도체 공장 꿈을 꾸고 나면 크게 앓는다고 한다. 그녀의 병, 다발성신경염은 반도체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 이사무애

    이 시대의 거악. 삼성

    소수 경영자와 외국인 주주들을 위해서
    국가경제라는 허울을 인질로 잡고
    정치권력자들을 매수해서
    부를 쌓는 것도 부족해
    이 땅의 힘없는 사람들의 뿌리까지 뽑아 먹는다.
    이 사회는 물론 이 땅의 미래까지 오염시킨다.
    거악 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