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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럼비는 울부짖는다

[다큐멘터리] 100일간의 잼(JAM) 다큐멘터리 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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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를 간직한 제주 구럼비 바위
구럼비에 가 본 적이 있는가. 제주도 강정마을과 그 앞바다를 잇는 거대한 검은 바위. 그 평평하고 널찍한 바위 위에 서면 푸른 제주도 바다가 내 것만 같고, 바다 위 둥실 떠 있는 멋진 범섬이 마치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 것만 같다. 구럼비는 사실 길이가 1.2km에 이르는 단 하나의 바위이지만, 그 표면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오밀조밀 갈라져 있어 겉보기에는 수천 개의 작은 바위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이는, 그 형상이 무척이나 오묘한 바위다. 그 모습이 얼마나 인상적인지, 자연이 빚어낸 그 거대한 풍경화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반나절은 거뜬히 지나갈 정도지만, 그 바위 위를 맨발로 걸어보면 또 다른 사실을 알게 된다. 구럼비는 분명히 살아있다는 것을.

어미 품만큼이나 이토록 따뜻한 구럼비 바위는 파도를 그 안에 품고, 이름 모를 수많은 생명체들을 그 안에 품고, 제주의 사람들 그리고 그 아픈 역사를 그 안에 품은 채 수 만 년 동안이나 묵묵히 살아오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경이(驚異)! 제주의 역사, 그 자체이다. 이 아름답고 신비한 강정마을의 바위는 예로부터 제주도민들과 타지인들의 무한한 사랑과 경탄을 받아왔으며, 올레길 코스 중에서도 단연 제1경으로 꼽혀왔다. 구럼비 바위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민물이 솟아오르는 바닷가 바위이고, 11종의 멸종위기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며, 구럼비를 비롯한 강정마을 앞바다는 정부로부터 절대보존지역에, 유네스코로부터는 생물권 보전지역에 지정되어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인근에서 청동기 유적마저 발견되었으니, 자연과 인간의 모든 역사가 생생히 살아있는 그야말로 보고(寶庫)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지금, 그 구럼비 바위 위에는 포크레인이 올라가 있다. 그 육중한 드릴을 바위에 꽂고 드드드드- 구럼비를 깨부수고 있다. 드드드드- 구럼비가 간직한 신비와 생명과 역사를 깨부수고 있다. 드드드드- 구럼비는 지금 울부짖고 있다.

  제주 구럼비 바위를 깨부수는 공사현장
해군은 남방해양 자주수호를 명목으로 2007년부터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고 있으며, 마을 사람들에게는 기지 개발에 따른 경제적 부흥을 약속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해군의 장밋빛 비전을 믿는 측과 기지건설이 오히려 마을의 피폐를 가져올 뿐더러 마을과 나라의 안녕을 해칠 것이라 믿는 측으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하동하 감독 등 9명의 독립영화 감독들은 강정의 상황을 널리 알리고 구럼비를 지켜내기 위해 강정으로 모여들었다. 2011년 6월. <100일간의 잼(JAM) 다큐멘터리 강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잼 다큐 강정>(2011) 구럼비 촬영 현장
안녕, 구럼비. 구럼비에 안타까운 작별 인사를 고하며 영화는 문을 연다. 9명의 독립영화감독들은 자신의 작업들을 잠시 멈추고 한걸음에 구럼비로 모여들었다. 아직 구럼비에 포크레인이 올라오기 몇 개월 전. 그들은 구럼비 바위 위를 거닐며 구럼비가 간직한 신비와 생명과 역사의 이야기를 직접 느껴본다. 머지않아 파괴될 이 자연의 경이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하지만 현실의 퍽퍽함도, 미래의 불안감도 잠시. 구럼비는 이 모든 걸 자애롭게 감싸 안는다. 경순 감독은 구럼비의 아름다움에 한껏 매료되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구럼비에 고맙다는 작은 인사를 건넨다. 그러나 싸움은 곧 시작되고 만다.

김태일 감독은 평화롭기만 했던 마을의 기억을 아들 상구에게 들려주고 싶어 한다. 바다가 있고, 내가 흐르고, 질 좋은 쌀이 많이 나던 강정. 그 풍요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지금 강정의 노인은 4.3 사건을 떠올리고 있다. 그들이 결코 원하지 않았던 싸움. 그 피비린내 나는 기억. 제주는 한 번도 온전히 그들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다. 일본의 해군기지였고, 학살의 현장이었고, 관광객들의 놀이터였다. 노인은 다시 한 번 제주가 외부인들의 농간으로 분란에 휩싸일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감독은 마을 주민들을 인터뷰하며 노인의 두려움이 이미 현실이 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정부는 강정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을 사람들의 분란을 조장하였고, 평화로운 공동체였던 강정 마을은 이제 형제 사이마저도 서로 인사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갈라지고 분열되어 버렸다. 마을 초입에 있는 코사마트와 나들가게. 서로 가게 안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가까운 이 두 상점 사이에는 지금, 남한과 북한을 방불케 하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해군기지 찬성 측 주민과 반대 측 주민들은 라면 한 봉지도 서로 다른 곳에서 사고, 형은 아우를 좌파종북세력이라 부르며 트럭으로 밀어버리려 하고, 시어머니는 빨갱이 며느리가 미워 며느리의 개에 빨간 칠을 해댄다. 평화롭기만 했던 이 한적한 어촌 마을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잼 다큐 강정>(2011), 강정마을회장 강제 연행 장면
권효 감독은 강정의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려본다. 아이들에게 카메라를 쥐어주자, 곧 말똥게의 사진수업이 시작된다. 구럼비와 강정천은 아이들의 놀이터고, 멸종위기 동물인 붉은발말똥게는 이 아이들에게 뽀로로만큼이나 친숙한 친구들이다. 아이들은 해군기지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별로다.” 이 아이들에게서 구럼비와 말똥게를 빼앗을 권리가 어른들에게 과연 있는 것일까. 깨부숴지고 있는 구럼비 놀이터와 살 곳을 잃은 말똥게 친구들을 바라보며 강정의 아이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소중한 것을 빼앗긴 이는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지난 10년간 강정의 자연을 지키기 위해 숱한 희생을 해온 강정고운환경감시단.

양동규 감독은 그들의 안내를 받아 범섬에 부는 바람과 강정 앞 바다 속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 보면, “한 순식간에 이걸 다 없애버리려고 하니까, 허무하지.” 한숨 쉬는 감시단원의 넋두리에 동조하지 않을 길이 없다. 그들의 10년 노력으로 강정 앞 바다는 절대보존지역이 되었고, 유네스코로부터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인정받았지만, 그딴 것들은 정부의 무대포 정신 앞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부는 왜 이런 짓거리를 벌이고 있는 것일까. 해군 출신 최진성 감독은 오타쿠적 기질을 발휘해 항공모함 프라모델을 끌고 다니며, 해군기지 건설의 진짜 목적을 캐묻는다. 강정에 건설될 해군기지는 미국 미사일 방어체제의 일환이 아닌가? 그러나 감독은 끝내 대답을 듣지 못하고, 어이없이 중국집으로 간 항공모함을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짓고 만다. 쏟아지는 폭우를 맞으며 국방부 앞에 주저앉아 프라모델 조립을 하는 감독. 옆에서 락밴드는 절규한다.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있는 그대로 살고 싶다오. 이게 그리 큰 꿈이었던가~” 그러게. 왜 우리는 이러고 있어야 하나. 그저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것뿐인데. 이 모든 게 말이 통하지 않는 그들 때문이리라. 밤섬해적단은 구럼비 위에서 한바탕 굿판으로 그들에게 엿을 먹인다. 해적단, 강정가다. 이번엔 범섬해적단이다.

  <잼 다큐 강정>(2011) 구럼비에서 공연 중인 밤섬해적단
영화는 같은 고통을 겪고 있고 같은 싸움을 하고 있는 제주 강정 마을과 서울 성미산 마을의 유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성미산에서 투쟁중인 홍형숙 감독은 구럼비에 멈춰서서 이 땅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을 함께 아우르려 고민해본다. 그렇다. 이것은 강정만의 고통, 강정만의 싸움이 아니다. 강정 투쟁으로 구속된 최성희씨는 이렇게 얘기한다. “(강정 문제는) 지역 문제가 아니고, 이건 국제 문제다. 제주도에 만약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동북아 평화는 다 깨진다고 봐야 된다.” 강정의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지금 파괴되고 있는 구럼비는 제주의 신비와 생명과 역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그 것이며, 우리 모두의 구럼비는 지금 처참하게 깨부숴지고 있다. 4.3 사건이 그저 제주만의 비극이 아니듯, 강정의 비극은 우리 모두의 비극이며, 철저히 갈라져 버린 강정의 한 형제의 이야기 속에는 지금 우리들의 반목과 갈등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놀이터와 친구들을 잃은 아이들 역시 우리 자신의 아이들이며, 곧 철저히 파괴되어 버릴 강정의 아름다운 바다 역시 우리 모두의 바다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 모든 갈등을 해소하고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야 할 책임이 있다.

<100일간의 잼(JAM) 다큐멘터리 강정>은 강정을 향한 9개의 시선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관객들에게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강정은, 구럼비는 지금 울부짖고 있다.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100일간의 잼(JAM) 다큐멘터리 강정>은 9월 24일, 제3회 DMZ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최초로 공개되었으며, 이후 공동체 상영 등 다양한 경로로 만나볼 수 있다. (출처=[ACT! 76호])

* 편집자 주
본문 중 굵은 글씨로 표기된 부분은 <잼 다큐 강정>의 소제목입니다.
덧붙이는 말

[필자소개] 박민욱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고, 지금은 한국의 어느 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있다. 간간이 단편 영화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