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자장면을 판다. 한 때는 시를 썼고, 한 때는 시를 쓰면서 평택 대추리에서 미군기지 반대 활동도 했다. 그러나 자장면을 팔면서부터는 오로지 나의 생존에만 매달렸다. 자영업의 특성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사로부터 귀 막고 눈 감고 살게 된 건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다. 한나라당이 집권당이 아닌 시절에도 국가폭력은 가공할 위력으로 민중의 삶을 짓밟았고, 비정규직법도, 한미FTA도 그때 시작되었다. 모두들 먹고사는 일에 매달렸다. 가난은 저주의 다른 이름으로 우리의 생을 하찮게 만드는 악마였다. 그렇게 다들 먹고살기 위해 생각을 멈추고 말을 잃어갔다.
신자유주의를 이길 수 있는 대안이 없어 보였다. 무력했다. 국가는 더욱 폭력적으로 길길이 날뛰었고, 자본권력은 국가 위에 군림하며 인간성을 말살시켜갔다. 상상조차 어려운 잔혹한 일들이 개미 한 마리 죽이는 일쯤으로 일어났다 금새 잊혀졌다. 끝도 없었다. 수도 없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치욕스러웠다. 알면 알수록 숨 쉬기조차 어려운 진실을 목도하기가 버거웠다. 더 힘든 것은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모두 뿔뿔이 흩어져 먹고사는 일에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나도 그처럼 세상의 한켠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었다. 우리의 존엄성은 그렇게 시궁창에 처박힌 채 썩어갔다.
한 여인이 왔다. 포털 사이트에 뜬 각 언론매체의 머리기사만 보는 것이 내가 세상을 흘깃흘깃 훔쳐보던 방식의 전부였던 때다. 저 멀리 부산 어느 곳 크레인 위에서 몇 달째 산다는 한 여인이, 신기했다. 고공농성이 낯선 것도 아닌데, 내가 그 기사를 와락 끌어안은 것은 일단은 그가 여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차마 묻지는 못하지만, 몹시도 세속적인 궁금증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어떻게 반 평짜리 크레인 위에서 먹고, 자고, 싸고, 씻을 수가 있지? 그것도 여자라니! 나는 그녀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조선소,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정리해고, 복직, 다시 정리해고, 소금꽃나무, 85호 크레인, 그리고 그녀 김진숙. 그녀의 역사를 읽는 동안, 나는 하루에 한 번씩 눈물을 쏟았다.
트위터를 시작했다. 그녀를 팔로잉하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하루하루가 위독했다. 84호 크레인을 수리해서 85호 옆으로 옮길 무렵이었다. 그녀를 죽게 할 수는 없다는 절박함에 나도 말을 하기 시작했다. 팔로워가 수만 명에 달하는 인기 트위터러 몇몇에게 제발 그녀를 그냥 놔두라고 사정하고, 빌고, 협박했다. 물론 그 때문은 아니지만, 다행히 85호를 바닷가 쪽으로 끌고 가는 일은 없었다. 트위터 자체에 대한 호기심으로 유명인사들을 팔로잉했다가 그녀에 대해 한 마디 언급도 없는 ‘사회 저명인사’들은 단칼에 잘라버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내 몸에 전류가 짜르르 흘렀던 것 같다. 그리고 또 얼마 뒤, 그녀가 맞팔을 해왔을 때 신랑 몰래 애인을 만든 것처럼 쾌재를 불렀다(실제로 우리 신랑은 내가 누구와 뭘 하는지 다 알면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또 연애질이냐며 샘을 낸다).
희망버스를 타고 갔다. 토, 일요일이면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 덕분에 꽤나 바쁜 터라 자리를 비우기가 녹록치 않은 장사치 신세라서 3차 때에야 겨우 갔다. 이렇게 저렇게 잔머리를 굴려 어렵사리 대타를 구해서 자리를 메꿔 놓고 네 살배기 딸아이 데리고 버스를 탔다. 운 좋게도 시댁이 부산에 있어(더불어 이번처럼 부산 사람들이 부러워 본 적이 없다. 85호 아래 자주 가볼 수 있으니 말이다) 아이는 제 사촌집에 맡겨두고 그 높디높은 영도를 타넘어 길바닥에서 노숙을 했다. 그러는 내내 85호 크레인이 도대체 어느 것인지 몰라 답답했고, 아침이 되어서 85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는 사실에 아주 옛날, 대구에서 포천까지 군에 간 애인 면회 갔다가 얼굴도 못 보고 돌아오던 때가 생각날 만큼 말도 못하게 속상했다.
그러다 영도를 빠져나오기 위해 다시 산복도로를 타다 아파트 사이로 그 위용을 드러낸 85호 크레인을 만났다. 두 산등성이에 서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토록 높은 곳에 이르러서야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녀와 네 남자는 우리가 내지르는 소리를 알아듣고 두 팔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우리도 흔들었다. 행여나 잘 안 보일세라 크고 힘차게 휘둘렀다.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통제 불능이었다. 눈물방울이 그렇게 클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때, 그 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박일환 시인이 '사랑합니다!'라고 아주아주 크게 외쳤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게 만든다. 평소에는 한 이불 속 그에게도, 한 솥밥 먹는 살붙이에게도 쑥스러워서, 바빠서, 익숙해서 거의 하지 못하던 말을 남자고, 여자고, 아이고, 어른이고 하게 만든다(나는 아직 하지 않았다. 결정적일 때 써먹으려고 무지 아껴두는 중이다). 사랑! 우리가 먹고사는 일에 골몰하며 그 잔혹한 자본과 국가의 폭력으로 우리 이웃이 쓰러지고 죽어가도 못 본체 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조차 '잃어버린' 게다. 김진숙, 그녀는 시궁창에 처박힌 인간의 존엄을 그 높은 하늘 가까운 곳까지 끌어올려 놓고 우리들에게 이제 그만 축 처진 어깨를 펴고 발밑만 쳐다보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고, 당신의 존엄을 보라고 한다.
인간의 존엄은 사랑에서부터 시작된다. 김진숙, 그녀는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사랑이 넘치고 넘쳐 다른 이의 목숨도 함께 구하고자 허공에 집을 짓게 만든다. 허공을 가득 메운 그녀의 사랑은 다시 넘치고 넘쳐 이 나라 방방곡곡 아프고 슬픈 사람들을 살린다. 나의 눈물은 나 자신을 되찾기 위한 의식이었다. 아무리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도, 아무리 죽어라 일을 해도 돈이 없다. 그녀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벼랑 끝에 서 있다는 걸 이제 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을 스스로 떨어지라고 악마의 속삭임을 퍼붓는 이 정권과 자본을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다는 걸 이제 안다. 우리 모두가 더 이상 비루해지지 않기 위해서, 그녀가 타전해오는 사랑의 밀어를 와락 끌어안고 모두 함께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때 마라도에서 자장면을 팔았다. 그곳은 가로등이 없다. 어둠이 깔리면 천지간 구분이 안되는 암흑세상이다. 단 하나, 등대 불빛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섬을 한 바퀴 비춘다. 제주도 남쪽, 서태평양을 지나는 모든 배는 마라도 등대 하나에 기대어 항해를 한다. 전 세계 항해사들이 대한민국은 몰라도 마라도 등대는 다 알 만큼 막중한 역할을 한다. 지금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35미터 허공의 그녀에게 구조 신호를 보내는 중이다. 85호 크레인은 이 나라 곳곳에서 유령처럼 떠돌며 신음하는 산 자들의 아픈 영혼을 위해 불을 밝히는 등대다. 지금 이 시간에도 타전해오는 그녀의 전언은 끝끝내 사랑이다. 279, 280, 281......일. 상상이 되시는가. 이 사랑이 더는 추위에 떨지 않도록, 더는 공포에 질리지 않도록 그녀에게서 배운 사랑을 보여주러 가자. 우리를 살리러 가자. 10월 8일, 희망의 버스가 다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