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희망버스가 다녀간 후 올라온 한 시민의 글에서는 어느 조합원이 뽑아주려 했다는 자판기 커피가 고마웠다는 고백이 있었다. 다시 오게 되면 그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을 보러 오겠다던 고백. 사람들은 ‘땀에 젖은 지폐를 넣지 마시오’ 라는 자판기의 문구도 기억하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진중공업은 그토록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주부들이, 스타벅스 커피도 좋아하고 쇼핑도 좋아하는 일반 시민들이, 넥타이와 하이힐의 직장인들이, 내일 시험 보는 대학생이, 소위 전혀 ‘운동권’과는 상관없던 많은 사람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노동자들과 만났다.
그리고 2차 희망버스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자본과 공권력이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파업 노동자에게 하던 것들을 그대로 일반 시민들에게 행했던 것이다. 덕분에 시민들은 평소에 그들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왜 최루액을 뿌릴까? 왜 나의 친구는 연행을 당할까? 타인을 괴롭히지도 않았고 상처 받은 사람들을 도우러 왔을 뿐인데 어째서 불법이라는 딱지가 붙을까?
노동자의 편에 서면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리고 언론조차 그 편에 서주지 않는구나, 라는 사실을 시민들은 깨닫기 시작한다. 아무 생각 없이 엄마를 따라간 한 고등학생은, 가만히 있었는데 최루액을 맞았다. 그리고 ‘도대체 왜?’ 하는 물음으로 시작하여 한진중공업 문제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지게 된다. 평범한 사람들과 다름없이 자본 사회의 혜택을 적절하게 누리고 살았던 모 강남 시민은 누군가의 상처에 그저 마음이 아파 달려갔다가 최루액을 뒤집어쓰고 경찰의 소환장을 받는다. 그리고 시민들은 알게 된다. 왜 멀쩡한 사람들이 투사가 되는지, 선한 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언론의 솜씨로 어떻게 폭도로 둔갑하는지. 그러면서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와 현실에 대해서 배운다. 착한 일 하면 소환장 받고, 나쁜 일 하면 돈을 받는 나라라는 것을. 현실은 냉혹하다는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하는 것을.
전에는 음지에서 노동자들만 당했던 부당한 일들을 시민들도 똑같이 겪었다. 그리고 함께 행동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85호 크레인 앞에서 그들과 함께 노숙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아닌, 밥 한번 사달라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되기 시작했다. 해고자 분들이 ‘밥 사주까!’ 하면 시민들은 기꺼이 즐겁게 밥을 얻어먹는다. 트위터로 ‘스머프’ 들과 매일같이 대화하고, 그 ‘트친’을 보러 대한문 근처로 매일 놀러 오는 직장인 친구들도 있다. 나를 포함한 이 친구들은 해고 노동자 분들에게 염치없이 이래저래 신세도 지고 밥도 얻어먹은 지 오래 되었다.
3차 희망버스는, 더 이상 ‘노동자’ 를 만나러 가는 자리가 아니라, ‘트친’ 들을 만나러 가는 자리가 되었다. 시민들도 어떤 식으로 ‘연대’ 해야 하는지 잘 알게 되었고, 연대에 대한 부담감도 벗었다. 이번에는 삼엄한 경찰 검문 때문에 푸른 옷 입었던 스머프들이 전부 일반인 복장을 하고 개인 참가자인 양 따로 불쑥불쑥 나타난 것이 재미있었다. 스머프들과 친해진 일반인 친구들은 하나 둘 한진 중공업 작업복을 얻어 입기도 했다. 서울에 있는 금속노조 사무실에서는 상경한 한진 조합원들과 매일같이 밥과 다과를 함께 하는 직장인, 학생, 프리랜서 친구들이 있는데, 함께 둘러 앉아 있으면 얼핏 보면 누가 조합원인지 아닌지도 이젠 구분이 안 간다.
또 희망버스를 기다리며 있었던 한진 본사 앞 일인시위 ‘주경야독’ 에서 드러났던 시민들의 놀라운 연대도 주목할 만하다. 이 릴레이 일인시위는 24시간 열흘 동안 단 하루도, 한 시간도 빼놓지 않고 이어졌는데, 그것은 자신의 한 시간을 기꺼이 내어 자발적으로 참여한 280명의 시민들 덕분이었다. 그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사람들도 부담 없이 참여했다. 친구가 참여하니 함께 자리하러 갔다가 직접 참가하기도 했다. 자유롭게 열린 연대이다 보니, 미니 크레인 모형을 만들고, 스머패트 코스프레를 하는 등 재미있는 상상력도 빛을 보았다.
그렇게 세 차례의 희망버스는 일반 시민들에게 어색했던 조끼와 투쟁, 팔뚝질, 깃발에 대한 거부감을 무마시켰다. 그리고 이제는 민주노총이 시동을 걸었다. 시민의 이름으로 만들어졌던 희망버스의 힘을 입어, 이번엔 정식으로 노동자의 이름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러자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도 생겼다. 20일 희망 시국대회와 27일 희망버스가 ‘분리된’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여기서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희망시국대회와 희망버스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같을 것이다. 20일 희망시국대회는 민주노총이 주최하고 조직하여 모이는 대회이다. 여기엔 여러 시민단체도 참여하는데, 희망버스에도 함께 참여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희망버스는 ‘단체’ 가 아니라 ‘현상’이고, 시민들의 자발성 그 자체였다. 아무도 인위적으로 조직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획단 중 아무도 시민들을 대표하여 희망버스라는 ‘단체’의 이름으로 대회에 참여하는 것을 결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희망버스 기획단 사람들은 희망시국대회를 기꺼이 지지하고 참여한다. 단지 만 오천이 넘는 희망버스 승객들이 그 자리에 함께 하는 것은 승객 여러분의 선택이다. 날짜를 같은 날로 정하기도 조심스러웠지만, 따로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시민들의 자발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20일 만큼은 대회의 주인공으로써의 노동자를 한껏 살려 주자는 의미도 있다. 이미 시민과 노동자는 ‘친구’ 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이 예술이 되었든 사무직이 되었든, 무엇인가를 해내고 생산해내는 우리 역시 전부 ‘노동자’ 아닌가.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주인공이 된 이 대회를 기꺼이 응원하러 달려갈 것이다. 굳이 희망버스의 이름으로 모이지 않아도.
정리해고 철회와 비정규직 철폐라는 구호를 달고 사람들은 싸워 왔지만, 사실은 소박한 요구다. 욕심 없는 사람들이 더 이상 아파하지 않는 것, 시스템과 제도 때문에 ‘사람’ 이 상처 받지 않는 것,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닌 다 함께 사는 삶에 대한 꿈이다. ‘안 바껴요’ ‘불가능해요’ 라고, 현실의 한계를 논하는 것은 자유지만, 꿈을 품은 사람들이 꿈꿀 권리는 막을 수 없다. 현실은 냉정하다는 이론을 받아들이는 대신 적어도 선한 마음이 빛을 볼 수 있도록, 사랑하는 마음들이, 승자와 패자 따위를 가르는 비관론쯤은 비웃어 줄 수 있도록, 20일과 27일, 연타를 때려 보자.
20일 희망 시국 대회는 부르릉 힘차게 달려가는 희망버스의 가장 큰 정류장이다. 깔깔깔 모자를 쓴 버스 운전사가 외친다.
“내리실 분은 기꺼이 들렸다 가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