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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가슴과 냉철한 두뇌”에 걸맞는 학자의 처신

[칼럼] 한진중 사태에 대한 '김기원 교수' 글에 대한 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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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 교수 글에 대한 불편함

김기원 교수가 최근 한진중공업사태에 대해 두 편의 글을 썼다. 자신의 블로크에 올린 “한진중공업사태와 공평한 고통분담”(http://blog.daum.net/kkkwkim/136)을 개정해 ‘창비주간논평’에 실린 “한진중공업 사태의 올바른 해법은”(http://blog.daum.net/kkkwkim/140)과, 이 글에 대한 언론이나 주변 인사들의 반응 등에 대해 자신의 소감을 피력한 “진보파의 잘못된 통념과 싸우는 고달픔 (1)”(http://blog.daum.net/kkkwkim/141).


그런데 이 글을 읽은 나는 점잖은 표현을 쓴다면 그의 글에서 심한 불편함을 느낀다. 그 이유는 그가 희망의 버스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사실은 그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뒤통수를 때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으니 정면에서 맞는 것보다 사실은 맞는 사람의 기분을 더 상하게 만든다.

그의 글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의 자본주의 시장경제관과 같은 그의 근본적인 이론적 입지 등과 연동시켜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려면 그의 다른 글들도 다 읽어봐야 하는데다가 너무 본격적인 논의가 되므로 여기서는 논의지점을 최소한으로 좁혀 그가 문제 삼고 있는 한진중공업사태와 정리해고 및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해 보도록 하자.

그는 희망의 버스 운동이 긍정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한다. 나는 이런 평가가 진정성을 지닌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왜 그로부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을 받게 되는 것일까?

‘적정 규모의 정리해고’?, 차라리 침묵하길

그는 희망의 버스 운동이 긍정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없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희망의 버스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운동의 총괄구호로 내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라는 구호에 시비를 거는 형태로 희망의 버스 운동을 비난한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한진중공업사태에 접근하기 때문에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것이 그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인 것 같다. 이와 관련해 그는 ‘냉철한 두뇌’를 갖고 한진중공업사태의 올바른 해법을 찾자고 주장하면서 한진중공업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법들을 내놓는다.

(1) 자본주의시장경제에서 구조조정은 불가피하고, 특히 중국의 도전 등으로 조선산업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나라경제 차원에서 구조조정에 따른 ‘삶의 불안정성’을 해소해야 한다. 구조조정 당하는 기업의 종사자에게 실업수당을 넉넉히 지급하고 재취업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2) 조선산업 차원에서 공동 구조조정기금을 마련해야 한다.
(3) 한진중공업이 도산위기에 처해 있지 않으므로 정리해고가 부당하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지만 한진중공업이 작년에 590억 원의 적자를 낸 데에다가 영도조선소의 효율성이 떨어지므로 적정 규모의 정리해고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한진중공업 총수의 책임이 무겁다. 조회장은 우선 정리해고 규모를 재조정해야 하고, 정리해고를 전면 철회할 순 없더라도 재취업이 곤란한 노동자를 선별 복직시키는 방안도 강구해야 하며, 또 부실경영의 책임이 있고, 조선소 초호황 때 많은 이익을 챙긴 만큼 사재의 일부라도 내놓은 등 고통분담의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런데 현재 전개되고 있는 희망의 버스 운동과 직접 관련되는 문제는 (3)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 그는 정리해고 수준 재고, 재취업이 곤란한 노동자의 선별 복직, 조회장의 고통분담을 해법으로 제출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내놓은 이런 해법들은 사실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와 관련 현재 초미의 문제가 되고 있는 핵심적인 쟁점에 대해 어떤 만족할만한 답변도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생각해 보자. 희망의 버스에 동승한 사람들의 ‘암묵적인’ 공통된 바람은 무엇보다도 김진숙을 85호 크레인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걸어 내려오게 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려면 지금도 복직을 위해 투쟁하는 100명 미만의 정리해고 노동자들을 우선적으로 복직시켜야 하고, 함께 정리해고 당했던 300명 선의 노동자들도 최대한 복직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내가 김 교수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은 희망의 버스에 탑승한 사람들의 이런 바람이 당신의 ‘냉철한 두뇌’로 판단컨대 과연 타당한 주장인가 아닌 가이다. 타당하다고 생각하면 나는 그가 이런 저런 다른 생각들은 접고 우선 희망의 버스 운동에 탑승할 수 있기를 바라고,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확실한 근거를 내놓고 비판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그는 판단 유보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적정 수준의 정리해고 수준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아무런 판단을 제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판단하기 곤란하다고 생각한다면 ‘정리해고의 필요성’과 같은 매우 일반적인 근거로 들면서 자신은 매우 초연한 입장에서 글을 쓴다는 명분을 내세우고서는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고 차라리 침묵하라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적정 수준의 정리해고 선에 대해 별다른 구체적인 근거도 제출하지 못하면서 희망의 버스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마치 무슨 무리한 요구라도 하는 것같이 “따뜻한 가슴은 존경하지만 냉철한 두뇌를 가지라” 훈수하고 있는 것이 그가 희망의 버스 운동이 지닌 긍정성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을 갖게 만드는 일차적인 이유이다.

진보적 효과 아닌 ‘보수적 효과’ 만들어


다음으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과연 총괄구호로 내세울 수 없는 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김기원 교수는 그 구호는 비효율성이 판명된 사회주의적 구호이므로 더 이상 내세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인정하는 사람일지라도 정리해고가 남발하고 비정규직이 노동자의 절반이상이나 차지하는 한국의 비정상적인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과 같은 강한 구호를 내세우고 투쟁해야만 정리해고의 남발을 막고 비정규직의 최소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희망의 버스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 많은 분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이 운동에 동참했다고 보며,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갖고 동참한 사람들을 당신처럼 ‘냉철한 두뇌’를 소지하지 못한 채 부화뇌동한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엔, 오히려 그들이 김 교수보다 개혁이 이뤄지는 실제적 메커니즘을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실제로 유럽에서 혁명적 변혁운동의 고양이 전후에 대폭적인 체제내적 개혁을 가져오는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사회주의적 목표를 지닌 사람들은 투쟁에 참여해서는 안 되는가이다. 이와 관련, 김기원 교수는 사회주의는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는 이념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나는 사회주의운동을 자본주의가 지닌 적대적 모순으로 인해 그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명시적으로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많든 적든 출현할 수밖에 없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현실의 구조적 모순에 직면하여 ‘개혁’을 추구하는 운동도 나타나겠지만 ‘변혁’을 추구하는 운동도 나타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더 중요한 점은 변혁을 추구하는 운동 역시 현실에서는 개혁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변혁은 사실은 개혁의 좌절이 만들어내는 질곡을 타파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때문에 사회주의적 목표를 갖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운동을 추구할지라도 혁명적 상황이 아닌 한 정리해고의 남발과 비정규직의 최소화를 위한 운동의 형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라는 구호를 단지 사회주의적 구호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점, 그리고 그 구호가 김기원 교수가 생각하는 것같이 부적절한 것이 아니라 정리해고가 남발하고 비정규직이 다대하게 존재하는 한국적 현실에서 대중을 하나의 기치로 모우는 매우 적절한 운동 구호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와는 달리, 김 교수는 그 구호를 사회주의적 구호라는 이유로 비난함으로써 그가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그 기치 하에 이뤄지고 있는 운동에 찬물을 끼얹고,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이간질시키고 있다.

이런 점을 조선일보와 같은 보수신문이 어찌 놓치겠는가? 조선일보가 김 교수의 글을 소개한 기사의 제목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시장경제가 아니라 사회주의체제”이다. 그는 조선일보의 기사 등을 평하는 글에서 조선일보가 자신의 글의 취지를 많이 왜곡하고 있다고 투덜대고 있지만, 내가 읽어본 바로는 그의 글의 근본취지까지 왜곡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김기원 교수 자신이 한진중공업사태와 관련, 한진중공업이나 보수세력의 입장을 주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희망의 버스운동에 참가한 진보세력이 내건 구호 등을 주된 비판의 대상으로, 그것도 그 운동이 실현 불가능한 사회주의적 구호 하에서 전개되는 운동이라고 비판한 것이 아닌가?

‘창비주간논평’에 실린 글에 대한 여러 반응들에 대해 자신의 소감을 피력한 글의 제목도 (“보수언론의 왜곡에 싸우는 고달픔”이 아니라) “진보파의 잘못된 통념과 싸우는 고달픔 (1)”이다. 이와 관련, 나는 그에게 그가 글을 쓴 주관적 의도와는 무관하게 글이 어떤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효과를 창출하는 가를 깊이 생각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분명한 것은 이번의 그의 글이 진보적 효과가 아니라 보수적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뜻한 가슴과 냉철한 두뇌”에 걸맞은 학자의 처신

끝으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해 보자.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은 불가피하고, 게다가 한국의 경우 중국의 상승 등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는 견해를 개진한다. ‘부당한’ 정리해고가 없어야 하고 기업도 고통분담을 해야 하며, 정부의 복지정책 등을 통해 그 고통을 완화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면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불가피한가 아닌가의 문제를 떠나서 그의 진단과 해법은 원론 차원의 접근에 불과하다. 김 교수는 오히려 자신이 보기에도 ‘부당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정리해고와 넘쳐나는 비정규직이 한국사회를 얼마나 황폐화시키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이런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했어야 했다.

“정리해고를 불인정하는 것은 사회주의다” 운운하기에 앞서 그간 ‘부당한’ 정리해고가 없었는지를 구체적으로 규명해 볼 것을. 그리고 오늘날 넘치는 비정규직을 어떻게 하면 최소화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적극적인 방책을 제시했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김 교수가 신조로 삼는다고 하는 “따뜻한 가슴과 냉철한 두뇌”에 걸맞은 학자의 처신이 아니겠는가?
  • ㅉㅉ

    방통대 김기원 교수의 글이, 정말로 '현실 극복'을 위해서 쓴 글일지는 의문입니다.

  • Alyosha

    "나는 그에게 그가 글을 쓴 주관적 의도와는 무관하게 글이 어떤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효과를 창출하는 가를 깊이 생각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김세균 교수님, 그런데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정치적인 효과를 고려한 후에 글을 쓰라는 것도 좀 촌스러운 말로 느껴지고요.

  • malcolm

    Alyosha님의 [정치적인 효과를 고려한 후에 글을 쓰라는 것도 좀 촌스러운 말로 느껴지고요]라는 주장에서 촌스럽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군요. 김기원 교수 정도의 인물이 사회적 발언을 한다면 내용의 즉자적인 정당성만이 아니라 그 발언의 정치적 효과를 당연히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걸 촌스럽다고 여기는 님이 촌스럽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