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쿠시마시의 타츠미야 호텔에서 열린 ‘피폭 66주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 나가사키대회’의 모습 [출처: 한국참가단] |
핵발전의 추진자들은 안전한 곳에
후쿠시마 대회에서는 현지보고가 진행됐다. 연단에 나선 후타바 지역 핵발전소 반대동맹의 이시마루 (소시로)씨는 현재 (아시타현)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다. 사고가 발생한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와 제2 핵발전소 사이에서 살고 있던 이시마루 씨는 1964년에 후쿠시마로 이주했다. 그는 핵발전에 의존해 살고 있는 지금의 상황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핵발전의 추진자들은 안전한 지역에 살고 있고, (핵발전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아니라) 핵발전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핵발전의 현상 유지를 원하고 있다. 핵만큼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것이 어디 있는가”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미나미소바 등 높은 방사능 지역까지 합하면 20만 명 정도가 피난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후쿠시마현의 인구가 200만 명인데, 그중 10%가 방사능 때문에 도망쳐야 하는 현실”이라고 현실을 설명했다.
경주마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아이들
이시마루 씨는 후쿠시마 아이들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지난 7월 13일부터 후쿠시마에서 코시엔 지역 예선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일본의 여름은 코시엔, 즉 고교 야구 전국대회의 계절이다. 일본에는 4천 개가 넘는 고교 아구팀이 있고, 코시엔은 일종의 축제다. 이시마루 씨에 따르면, 후쿠시마현에 있는 야구장 잔디에서 시간당 2.2mSv(밀리시버트)라는 높은 수치의 방사선량이 측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코시엔 지역 예선전은 시작되었다. 반면 후쿠시마 지역의 경마는 중지되었다. 경마장 잔디는 모두 바꿀 계획아라고 한다. 이시마루 씨는 “후쿠시마현민들은 경주마보다 낮은 대우를 받고 있다”며 분노했다.
이시마루 씨는 6월 말 후쿠시마현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실시된 방사능 제염 테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방사능 제염 테스트는 향후 방사능 오염 제거 계획을 세우기 위해 오염된 지역에서 시범구역을 정해 제거 작업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측정하는 작업이다. 이시마루 씨에 따르면 제염 작업 이후에도 시간당 0.7mSv의 방사선량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는 “이 정도 수치는 핵발전소 시설의 관리 구역보다 높고, 18세 이하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구역이다”라고 말했다.
▲ 이날 후쿠시마대회는 통로에까지 참가자들로 가득했다. 오른쪽 참가자의 등에는 ‘어린이들을 방사능오염으로부터 지켜라’라고 쓰여있다. [출처: 한국참가단] |
자본주의의 가장 더러운 상황이 핵발전에
다음으로 작가인 카마타 사토 씨의 발언이 이어졌다. 카마타 씨는 5월에 현장 답사를 다녀왔다고 한다. 그는 “5월은 토호쿠(동북) 지방의 모내기철로 아름다운 논의 풍경을 볼 수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 후쿠시마 논에는 사람이 없다. 마치 ‘침묵의 봄’ 같은 지역으로 바뀌었다.”며, “이 책임을 누가 다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토호쿠 지방은 일본의 대표적인 농업 지역으로 쌀과 생선이 유명하다.
카마타 씨는 핵발전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히타치, 도시바 등 핵발전소 제조사들의 돈이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가고, 이러한 관료들이 낙하산 인사를 통해 핵발전을 감시해야할 경제산업성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복잡하고 더러운 상황이 핵발전에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핵발전은 도시를 위해 지방을 희생하는 형태라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지방의 한적한 지역에 건설된 핵발전소에서 도쿄와 같은 도시까지 매우 기다란 송전선이 연결되어 있다.
결국 후쿠시마처럼 핵발전소 사고의 피해는 핵발전의 혜택을 누리는 도시 지역이 아니라 핵발전소가 있는 지역에 집중된다. 그는 “핵발전은 중앙 집중적인 핵 지배의 중심”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발전소에서 도시까지 송전선을 타고 엄청나게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상당량의 전력 손실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손실은 결국 전기요금의 형태로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핵발전소와 핵폭탄의 공통적 문제점
카마타 씨는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피폭자와 후쿠시마의 피폭자가 만나 함께 하게 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원래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역사적 비극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가사키의 피폭으로 군수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 징용된 한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사망했다”며, “후쿠시마도 비슷하다. 지방의 노동자들, 프리타(아르바이트와 같은 형태의 파트타임 노동자), 하층 노동자들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수습을 위해 전국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했다. 한국에서도 한 아르바이트 포털사이트에 후쿠시마 사고 수습 일자리 공고가 나와 엄청난 비난 여론이 인 적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모집된 노동자들은 방사선량을 측정할 수 있는 선량계도 없이 노심 근처에 투입되었다고 카마타 씨는 주장했다. 그는 “핵폭탄과 핵발전의 공통적 문제점”이라고 말했다. 즉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징용된 한국인 노동자들이 원폭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처럼,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상황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강제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임감이 부족한 피폭자들?
다음으로 나가사키 피폭자 오쿠무라 에이지 씨의 연대사가 이어졌다. 1931년생인 오쿠무라 씨는 초등학생 시절 매일 반복되는 미군의 폭격 때문에 이사하야시에 있는 친척집으로 피난 가 있었다고 한다. 피난 생활을 하던 중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고, 나가사키의 피폭자들이 이사하야시로 이주해 오는 것을 보고 나가사키로 돌아갔다고 한다. 핵폭발이 일어나던 당시에 그곳에 있지는 않았지만, 2주 후에 원폭 투하 지점에 들어갔기에 피폭되었다.
그는 현재 노동조합 내에서 피폭자 조합원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피폭자들은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피폭에 의한 고통 때문에 안정적으로 자신의 일을 수행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피폭자들을 ‘무라무라병’이라고 부른다. 무라무라는 일본어로 ‘불끈불끈’이라는 뜻으로 감정이 폭발하는 상태를 말한다. 즉, 피폭자들이 입퇴원을 반복하는 것을 두고 감정 기복이 심해서, 즉 책임감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오쿠무라 씨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피폭자라고 하면 끔찍한 화상자국의 이미지만 떠올리는데, 내부 피폭(방사성 물질이 생물체 내부에 들어와 피폭되는 상황)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조합 내에서 피폭자들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무직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근무 시간에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증언은 향후 후쿠시마 사고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방사능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겪게 될 끔찍한 일들을 떠올리게 했다.
사요나라 핵발전소 1000만 행동
다음으로 후쿠시마 대회 호소문 채택의 시간이 이어졌다. ‘풍부한 자연과 건강한 생명을 지키기 우해 여기 후쿠시마에서부터 목소리를 높이고 큰 행동으로 연결시켜 나갑시다’라는 후쿠시마 대회 호소문은, ‘사요나라(헤어짐의 인사) 핵발전소 1000만 행동’과 9월 19일 도쿄에서 5만 명이 결집하는 반핵 대회로의 결집을 호소했다. 다케나카 류이치 실행위원장은 “핵과 인류는 공생할 수 없다는 뜨거운 시선을 느꼈다. 이번 후쿠시마 대회는 매우 성공적이다”는 말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7월 31일 후쿠시마에서부터 시작된 66주년 원수폭금지 세계대회는 8월 4-6일 히로시마, 7-9일 나가사키를 거쳐 11일 오키나와까지 이어진다.
▲ 한 참가자가 대회 호소문을 읽고 있다. 등에는 ‘싫습니다! 방사능, 만들자! 탈원전사회’라고 쓰여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