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31일 후쿠시마시 마치나카 광장에서 열린 ‘방사능 없는 후쿠시마를 돌려내라! 핵발전소 없는 후쿠시마를 위한 현민 집회’의 모습 [출처: 한국 참가단] |
지금도 계속되는 지진
집회는 후쿠시마현 평화포럼 의장 유노카와 마모루 씨의 발언으로 시작됐다. 유노카와 의장은 ‘오늘도 진도 6의 지진이 발생했고, 2-3일 전에는 큰 비가 내려 피해를 입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집회 당일 새벽, 후쿠시마에서는 규모 6.4의 지진이 발생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여진이, 그 빈도는 줄었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27일부터는 650mm에 달하는 큰 비가 내려 대피 지시가 내려지기도 했다.
유노카와 의장에 따르면 현재 강제 이주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의 숫자만 7만 3천 명에 이른다. 그러나 지진과 쓰나미 피해로 인해 행정력이 완전히 복구되지 못한 상황이라 정확한 숫자나 이주 지역, 실내 대피하고 있는 주민들의 숫자와 상황 등이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 후 처음에는 발전소 반경 3km를 피난 구역으로 설정했던 일본 정부는 조금씩 피난 범위를 넓혔고, 현재 반경 30km가 완전 소개 지역이 되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한 곳으로 이주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고, 헤어져 살고 있는 가족도 많다.
약자에게 더 집중되는 피해
핵발전소 사고로 인한 피해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사태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피해는 어린이나 노약자, 살고 있는 지역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농민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집중된다. 이번 대회를 주최한 후쿠시마현 평화포럼 대표 다케나카 유이치 씨는 ‘28만 명의 어린이에게 대량으로 방사성 물질이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지금 여름 방학 기간인데, 1학기를 마치고 다른 지역의 학교로 전학 가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이주해서 생계를 꾸려갈 수 있거나, 다른 지역에 친척이 있어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다.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다른 곳에 연고가 없어 이주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책감을 갖고 있는 부모들이 많다고 다케나카 대표는 설명했다.
그는 또한 핵발전소 사고와 지진, 쓰나미로 인해 생계를 잃은 많은 후쿠시마 현민들이 핵발전소 (수습) 작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더 이상 농사를 짓게 될 수 없어 자살하는 농민들이 있는데, ‘후쿠시마는 이제 더는 안 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93세의 노인도 있다고 한다.
강제 이주된 사람들의 현실
이후 후쿠시마 주민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이다테 마을에 살고 있다가 현재도 피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사토 켄타 씨는 3월 11일 상황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사고 당일 직장에 있던 사토 씨는 지진이 나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정전이 되어 있었고, 핸드폰도 사용할 수 없었다고 했다. TV나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자동차 라디오를 통해 재난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3월 중순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고농도 방사능이 대량 누출되었지만 전혀 모르고 살고 있었고, 이다테 마을 주민들이 상당한 피폭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후쿠시마 사람들은 여전히 부족한 정보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매일 160km를 통근해야하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근처의 후타바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요시다 히로마사 씨가 다음 증언에 나섰다. 요시다 씨는 사고 당일 집에 있기 불안해서 가족들과 함께 학교 운동장에 차를 세워두고 밤을 보냈다고 한다. 다음날 요시다 씨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방호복을 입은 사람이 “당장 피난하라!”고 말했다. 요시다 씨가 “어디로 가야하나?”라고 물으니, “모른다. 우리는 홍보만 하고 있다. 당국에 물어 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는 현재 후타바군에서 160km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다. 나미에마치에 회사가 있는 아내는 출근을 할 수가 없어 결국 직장을 잃었다. 요시다 씨는 매일 160km 거리를 통근하고 있다. 그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 뿐만 아니라 금전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요시다 씨의 고통은 본인과 가족의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교사인 그는 아이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음아파 했다.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한 아이는 그에게 ‘선생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도 사고 지역에서 도망친 것, 정보를 모으는 것,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던 요시다 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무력감 속에서 상처받고 있는 것은 어른들만이 아니다.
사고 직후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힘내라 동일본’이라는 구호가 많이 등장했다. 후쿠시마 시내 곳곳에도 ‘힘내라 일본! 힘내라 후쿠시마!’라는 현수막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요시다 씨는 ‘힘내라고 하지만, 어떻게 힘낼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힘을 내면 복구가 되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핵발전소의 피해자는 우리가 마지막이어야 한다! 지금이야 말로 탈원전이어야 한다!’는 말로 발언을 마쳤다.
아픈 딸 아이를 지켜보며
▲ 핵발전소 사고 이후 고통을 호소하는 딸의 이야기를 하며 울먹이는 마츠모토 노리코씨의 모습 [출처: 한국참가단] |
마지막 주민 보고는 후쿠시마 핵발전소로부터 남쪽으로 50km 떨어진 고리야마시에 살고 있는 마츠모토 노리코 씨였다. 두 딸의 어머니인 그녀는 사고 당일 후쿠시마시에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창피하지만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후쿠시마에 핵발전소가 10개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력회사나 정부에서 ‘핵발전은 깨끗하고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을 감쪽같이 믿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후쿠시마에서 사고가 발생하고 나서 자신의 딸은 코피를 흘리고 복통을 호소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몰라 인터넷만 뒤졌다고 한다. 그녀는 결국 중학교 1학년 딸을 도쿄에 있는 여동생 집으로 보냈다. 자신은 친척이 있어 아이를 보낼 수 있었지만, 연고가 없어 아이를 보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어머니들이 많다고 그녀는 말했다. 마츠모토 씨는 앞으로 딸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라며, 끝으로 ‘원전은 필요없다. 그것만이 소원이다’라고 말했다.
후쿠시마의 분노를 들어라
▲ 후쿠시마역까지 행진하는 대오를 향해 박수를 보내는 후쿠시마 시민들 [출처: 한국참가단] |
▲ 현민 집회에 행진에 함께 참여한 가족. ‘아이들에게 안심.안전한 미래를!!’이라고 적혀 있다 [출처: 한국참가단] |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마치나카 광장에서 후쿠시마 역까지 약 1시간 가량 행진을 진행했다. ‘방사능 없는 후쿠시마를 돌려내라!’, ‘모든 원전을 없애자!’, ‘어린이의 미래를 지키자!’, ‘모든 피해를 보상하라!’는 구호에 길가의 시민들도 열렬하게 호응했다.
후쿠시마 현민 집회는 후쿠시마 현민들의 고통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더 이상 그 고통이 지속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 즉 핵발전이 없는 사회를 향한 외침이었다.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고 한국의 언론은 침착한 일본인들의 모습을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국가적인 재난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은 전파를 타고 성숙한 시민의식의 표본으로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TV나 신문의 카메라도, 자원 봉사자도 가닿지 못한 지역에서 사고의 피해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제 그들이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행동하고 있다. 후쿠시마의 외침은 단지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운영 책임사인 도쿄전력이나 일본 정부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과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세계 모든 이들을 향한 외침이며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