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만남이다.
‘주름 짙은 초로의 저분은 누구실까?’, ‘양복신사도 있네.’
‘몸에 타투를 한 여성은 무슨 일을 할까?’, ‘염색머리의 통바지 청년은 누군가?’
‘미모의 저 여인은 왜 홀로 희망버스를 탔을까?’
궁금하다 궁금해.
[출처: 미디어충청] |
마침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진보가 보수라고 일컫는 민주당과 국민참여당 당원들도 탔고 다큐를 만든다는 작가 지망생과 영화감독도 탔다. 염색머리의 청년은 “저는 보수성향입니다만...”하며 자기소개를 했고, “함께 살자며 내민 손들을 맞잡으러 간다”는 패션디자이너도 있다. 미모로 눈길을 끈 여성은 6년째 영국유학 중에 잠시 귀국해 희망버스를 탔단다. 김진숙 지도위원 얘기만 꺼내면 눈물이 난다는 30대 후반의 남성은 또 눈물을 흘린다. 그를 이어 자기소개를 하는 남자도 울먹이고... 난 괜히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희망버스는 4시간 넘게 달리고 있다. 85호 크레인, 같은 목적지를 향한 낯선 만남은 수줍게 서로 말이 없다. 이렇게 부끄럼을 타고 순수한 이들이 스스로 희망버스를 탄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와 가치가 있는 거다. 타인의 고통 앞에 외부인으로 남고픈 이들이 있겠지만, 함께 사는 우리는 모두가 내부세력이라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이 희망이다.
희망, 단어는 진부하지만 노동현실에서는 희소한 그것을 찾으려 전국 각지에서 희망버스를 탄다. 3차까지 계속된 행렬, 이제는 그것만으로 모든 희망을 쟁취할 수 없다는 얘기도 나온다. 냉정한 현실인식이다. 그렇다, 희망이 부풀수록 야만은 더 악랄하게 짓밟는다. 과거 반공주의 역사의 산물이자 아직도 여전한 반공의 어버이인 ‘어버이연합’은 목검까지 휘두르며 악명을 떨쳤다. 어버이연합에게 ‘희망’은 빨갱이들이나 품는 불순한 사상으로 매도됐으며, 그들은 경찰 앞에서도 당당히 시내버스를 가로막고 외지인 색출과 처단에 나섰다. 마치 ‘권력은 우리 편이다’라고 자랑하듯 오만하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 온 빨갱이 처단 실력은 소싯적 그대로고, 한국 최대의 신문사는 어버이연합을 추켜세우며 “결국 부산시민이 이겼다”는 보도로 한국 민주주의의 절망을 실감케 했다.
절망과 분노를 실었기에, 그래서 희망버스인지도 모른다.
희망버스는 저마다의 목소리로 안간힘을 다해 절망했고 사력을 다해 분노했다.
수년간 수백 명을 정리해고 하면서 주주 배당과 경영진 고액연봉 잔치를 벌인 한진중공업에 절망했고, 쌍용차노동자 15명의 목숨이 사라져도 정리해고만이 경쟁력이라는 자본에 대해 절망했다. 그리고 분노를 폭력으로 짓누르는 용역깡패에 대해 분노했고, 수전노처럼 알뜰하게도 노동기본권을 쓸어버린 정권의 실용주의에 분노했고, 늘어만 가는 비정규직에 대해 절망했으며, 영도 조선소 맞은편 산동네처럼 다닥다닥 엉겨 붙은 우리 사회의 빈곤에 대해 슬퍼했다. 한 번 시작된 절망과 분노의 기세는 전국에서 밀려들었고 인터넷을 타고 세계에서 모였다. 그리고 그 절망과 분노의 끝에서 희망은 시작된다.
그러나 분노는 소심하리만치 평화롭고 때론 축제처럼 왁자지껄 “깔깔깔” 이다. 절망하고 분노할수록 웃자는 대중의 역설이며, 저항의 몸부림이 힘든 줄 아는 서로에 대한 위로였다. 영문을 모르는 이들이야 소란스러웠을 것이다. 반면, 좋은 일하는데 하루 이틀 작은 불편이 뭐가 대수냐는 영도주민은 희망버스라는 앰뷸런스에 조용히 길을 양보했다.
[출처: 합동취재팀] |
이제는 4차다. 절망 끝에 희망을 기획한 시인은 세계에서 희망비행기가 올지도 모른다며 설레게 한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불안도 도사린다. 절망과 분노의 끝, 그래서 희망인 이 버스의 종점은 어디일까? 노동의 불안과 절망이 척결되지 않는 한 멈추지 않는 순환버스가 될 것인가? 이 질문에는 또 누가 답할 것인가?
민주노총은 서울에서 20~21일 대규모 희망시국대회를 개최하자고 했다. 보수언론은 부산도 모자라 이제는 서울에서냐며 일찌감치 전투모드다. 희망버스 기획단은 4차 추진에 앞서 평가와 모색의 자리를 갖는다고 한다. 나름 오랜 여정에 풀린 나사를 조이고, 각종 부품을 점검하고 다시 연료를 채우며, 더불어 멋진 튜닝도 준비하는 정비와 도전의 자리일 듯싶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논의하길 바란다. 개인과 조직이 망라되고 서로는 서로를 애써 배제하지 않는 창조적 연대가 이뤄지길 바란다.
보건데, 희망버스를 달리게 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최소한의 기획과 최대한의 자발성, 이 둘의 창조적 연대이지 싶다. 이제 어디로 달려갈 것인가? 희망버스에는 애초 노선이 없다. 정거장은 승객들이 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르고 그래서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