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내 불편만 중요한 사람들의 절망버스

[기고]공동체적 삶과 냉혹한 이윤, 어떤 버스에 몸을 맡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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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기억이다. TV 속 낯선 이들의 고통엔 눈물짓더니, 어려움에 빠진 친인척과 막상 함께 방을 써야 하는 상황이 오자 나는 내심 투덜댔다. 고작 그거였단 말인가. 지금도 난 그 알량한 내 안의 연민과 가끔 마주하면 부끄럽다.

시인 하이네도 “누구나 혼자서는 덕을 갖출 수 있지만 두 사람이 되면 항상 악덕하게 된다”며 실망하곤 했다. 사람들은 아프리카의 빈곤엔 한껏 연민을 품을지언정, 내 옆 이웃의 고통보단 당장 자신의 작은 불편을 참지 못하기 십상이다.

아무런 죄 없이 수백 명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쫓겨났고, 그 부당함을 볼 수 없었던 용접공 출신 노동자 김진숙은 200일 넘게 고공농성 중이다. 그가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금방 알아챘다. 그렇게 누군가는 목숨을 걸어서 지킬 만큼 소중한 가치와 희망을 우리사회가 잃어버렸다는 것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알아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버스 한 가득 희망을 실고 김진숙을 살리기 위해 부산으로 향한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그런데 이를 막아서겠다는 이들이 있다. 사람을 살리고, 노동자를 살리고, 우리 사회의 무너진 희망을 살리자는데, 쓰레기가 생긴다며 불편을 이유로 희망버스를 막아서는 사람들이 있다.

쓰레기 같이 치우자며 희망버스와 왜 함께 하지 못하는가

어쩌면 이리도 냉혹하단 말인가.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외부세력 운운하며 희망을 막아서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비워버려야 할 절망이다.

불안한 삶을 기습해오는 대량해고에 떨지 않고 일할 권리, 또 그 위협 때문에 굴종해야 하는 노동자, 이윤보다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권력과 자본, 이 문제보다 대단한 그 불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따뜻한 온기가 된 적이 있냐며 연탄재조차 함부로 차지 말라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희망을, 사람을, 노동자를 쓰고 버리는 연탄재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그들의 면면을 보면 더욱 씁쓸하다. 부산상공회의소, 부산경총, 한진중공업협력업체, 관광협회, 숙박업협회, 음식업협회, 주택건설협회 등 이권과 권력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 물론 그들만이 다는 아니고, 아무리 이권단체라지만 그들도 부산시민은 시민이다. 그러니 주장할 권리가 있고, 불편을 투덜거릴 자유가 있다.

그러나 생존권을 무시하는 그들의 불편은 솔직히 너무 사소하지 않은가.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희망들에게 이 무슨 야박한 처사란 말인가. 물론 희망버스라고 어찌 한 점 흠이 없겠는가. 많은 쓰레기가 나왔을 것이고, 화장실을 찾지 못한 이들의 방뇨도 있었다. 그러나 저들 무슨 무슨 대책협의회라는 이들은 쓰레기를 같이 치우자며 희망버스와 왜 함께 하지 못하는가. 집회와 시위의 권리를 보장하고 소변시설을 마련하라고 왜 정부에게 촉구하지 않는가. 경찰은 왜 행진을 가로막아 시민의 목청을 돋우냐며 항의하지 않는가. 지역경제의 기둥뿌리인 한진중공업의 수주물량을 빼돌리고선 왜 우리 이웃들을 내쫓냐며 회사에 항의하지 않는가. 왜? 무슨 이유로?

지구 저 편 알자지라방송조차 귀 기울이는데...

희망에 맞선 절망의 반격은 부산에만 있지 않았다. 서울의 희망단식 농성장엔 요사이 불청객의 소동이 이어지곤 한다. ‘어버이연합회’, ‘남침용 땅굴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백발의 노인들은 뜬금없이 군가를 부르며 연륜답지 않은 증오와 난잡한 욕설들을 퍼붓고 간다. 근거 없는 증오와 욕설들도 우리 사회의 절망이다.

그런데 욕설보다 더한 절망은 “네 놈이 잘 못해서 잘렸지!”라는 단호한 오해다. 그 비난은 마치 총구를 떠난 탄환처럼 무자비하게 진실을 파괴하고, 증오와 절망을 키운다. 한진중공업 경영진을 이해할 수 없다는 여당 의원의 털끝만한 양심도, 국회 청문회를 무시하며 해외로 도피 한 자본가도, ‘어거지연합’에겐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출처: 노동과 세계]

물론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세력은 탐욕을 비우지 못하는 자본이고 자본에 종속된 경제 외에는 다른 삶을 준비하지 않는 권력, 그들의 결탁이다. 그들에겐 노동자의 생존권과 사람의 인권을 지키려는 시민들은 그저 외부세력일 뿐이다. 지구 저편 아랍의 알자지라방송조차 희망버스에 귀를 기울이는데, 정작 이 땅의 정부와 자본은 외부세력이라며 시민들을 내치기에 여념이 없다. 하물며 가정폭력도 남의 집안일이라며 외면할 일이 더 이상 아닌데, 살인과 다름없는 대량해고 문제에서 내부는 누구고 외부는 누구란 말인가.

3차 희망버스가 30일을 기다리며 부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행 ‘희망티켓’을 열심히 팔고 있다. 이윤이 아닌 사람을 위한 아름다운 가게에서. 그에 앞서 김진숙 지도위원의 농성이 200일째 되는 24일에는 각계 지도층 200명이 한진중공업 앞에 모여 구체적인 희망을 제시하는 ‘희망 시국회의200’을 열 예정이다. 외부세력 운운하는 절망의 배제와 희망의 연대 사이에서 우리 사회는 어떤 변화를 선택해야 하는가? 진정한 공동체적 삶과 냉혹한 이윤, 그 상반된 지향점 앞에서 당신은 어떤 버스에 몸을 맡길 것인가?

“혁명을 성공시키는 것은 희망이지 절망이 아니다” (크로포트킨)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희망버스' 싫다

    '희망티켓' 한가한 당신(?)들이나 사세요!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쁜 세상에 회비내고 원정 다닐 시간이 어디 있답니까? 서민 괴롭히는 희망버스 싫습니다.

  • 좋다

    희망버스간느게 시간남아서 가는사람 하나두 없수다. 시간남는 자들은 여기들어와 방해하려는 그 꼬붕들이겠지.

  • 요놈

    희망버스가 싫다면 넌 한진 조남호 꼬붕이구나.
    아니면 짭새, 부산시, 청와대 떨거지거나.
    이넘...
    국민적 분노도 못읽으면서 무슨 조동아리를 놀리느냐. 이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