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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권력의 행동대

[칼럼] 폭력을 통해 갈등을 봉합하는 전근대적 통치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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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료 없이 질주하는 야만의 자본주의는 심장부에서 반복적, 주기적으로 터져 나온 금융위기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체제위기로 직결되고 있다. 최근 한나라당 지도부선출을 향한 유세에서 모 후보는 "현안쟁점인 비정규문제와 사회복지를 소홀하면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될 수 있다" 고 경고한다.

소외계층과 비정규노동자를 위한 문제해결과 사회복지라는 개량의 떡고물을 던져 체제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한나라당과 보수진영의 임무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진보정치진영이 갖는 변혁에 대한 대안과 전망이 불분명함이 우려가 되지만, 한나라당조차도 ‘자본주의의 위기’를 공개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은 곱씹을만하다.

  유성기업이 고용한 용역직원은 대포차로 조합원을 치고, 소화기를 집어던지는 등 살인행위와 같은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출처: 금속노조]

이런 위기국면을 반영이라도 하듯, 도처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상식은 물론, 사고와 인식의 새로운 체계를 요구하고 있다. 자본이 이윤을 배가한다는 논리는 노동자들의 생존에 타격을 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돈을 더 챙기기 위한 자본의 전략에 생존을 위한 투쟁은 필연적 선택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노동자, 민중의 권리이다.

이러함에도 대통령은 지난 5월 30일 라디오 연설을 통해, 유성기업 노동자 연봉 7천만 원, 자동차 한 대 만드는데 평균 106시간이 걸린다고 국민을 대상으로 근거 없는 거짓말을 했다. '노동자가 배가 불러 파업 질 한다'는 식의 MB 발언 속에 노동자계급이 사탄인양 저주와 분노와 증오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국가최고 통치자가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한 자본에 대한 무한한 지지선언 치고는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

자본과 노동의 대립지점에서 공권력의 탄압도 힘에 부칠 수밖에 없는데, 또 하나의 세력이 등장한지 오래되었다. 이들은 소위 ‘용역’이라는 합법의 가면을 쓰고 소외된 계층을 때려잡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백주대낮에 살인적인 행위를 일삼아도 ‘용역’이 처벌받는 걸 본 적이 없다. '법은 가진 자들의 전유물인 동시에 소외된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우리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는 용산4지구 개발현장과 쌍용차투쟁에서 ‘용역’들은 자본과 공권력을 위해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용산참사가 일어난 원인의 중심에도 용역이 있었으며, 참사현장에 경찰의 ‘사제 폭행사진 전시장’에서 작가들이 만들어 붙인 사진들을 ‘용역’들이 훔쳐가고, '예술작품 훔쳐가지 말라'고 항의하는 활동가들은 경찰에 둘러싸여 갇혀지는 광경은 경찰과 용역의 팀웤이 상상을 초래한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김밥 파는 노점상 할머니를 주먹으로 쳐 넘어진 할머니를 발로 짓밟은 것도 구청이 채용한 ‘용역’의 작태이며 도처에서 진행되는 재개발현장에 철거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여 주거권을 빼앗는 행동대원들도 바로 ‘용역’들이다.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과 한진중공업을 비롯한 노동현장에 투쟁만 있으면 어김없이 투쟁대오를 가로 막는 것도 ‘용역’이다.

최근 유성기업에서는 ‘용역’이란 자들이 대포차를 몰아 인도를 걷고 있는 노동자들을 덮쳐 13명이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 이도 모자라 유성조합원들이 정문 앞에서 집회를 하면 이들은 소화기를 뿌려대고, 벽돌을 던지며 폭력을 자행한다. 그리고 이들은 방패는 물론 진압봉,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하고 오로지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이런 상황을 경찰은 방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경찰이 하던 야만적 짓거리를 ‘용역’이 대행하고 있는 것이다.

‘용역’의 일반적 의미는 ‘타인을 위하여 봉사활동’이라는 개념이다. 그러나 노동자, 민중의 기억 속에 ‘용역’이란, 우선 대포폰과 대포차가 연상되며, 노점상과 철거민에게 폭력을 가하고, 노동자 권리를 무력으로 짓밟는 자들로 인식되어 있다는 데 부정할 사람이 없다. 유독 사회적 약자들에게 삶의 터전에서 몰아내고, 자본과 권력의 청탁을 받아 무자비한 폭력으로 생존의 요구를 무력화 시키며 기본권을 유린하는 행위는 한마디로 ‘양아치’가 아닌가.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의 무한한 이윤보장을 위해, 자본이나 공권력이 대놓고 할 수 없는 짓거리를 ‘용역’이 앞장서 실천하는 그들의 천박함과 비인간성에 분노가 앞서지만, 자본과 권력은 ‘용역’들을 내 세워 자신들의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행동을 대행하게 하는 비열성과 유치함에는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자본과 대치하는 투쟁현장에서는 경찰이 배치되어 있는 가운데 ‘용역’이 도둑질, 폭력행위 등 온갖 불법을 저지른다. 이를 방관하는 법의 집행기관인 경찰병력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자본과 공권력의 지시에 의한 도둑질, 폭력이 아니라면 당연히 ‘용역’을 법에 따라 조치해야하는 게 공권력의 기본 임무가 될 수밖에 없다.

2년 전 쌍용자동차 파업에서도 자본과 경찰특공대와 용역은 완전한 삼위일체를 이루며 노동자들을 진압하고 공장에서 내 몰았다. 누가 법을 다스리고 누가 법을 집행하는가. 국가 공무원으로서의 임무를 모조리 버린 채, 양아치와 트라이앵글의 형태로 일사불란하게 노동자들의 투쟁을 진압하는 경찰은 아무리 법의 집행기관이라는 허울을 내 세워도 양아치와 다를 바 없다는 데,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용역’은 ‘용역’ 그들이 갖는 비인간성과 폭력성이 용서받을 수 없지만, 용역을 활용하는 체계화 구조화가 본질적일 것이다.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에 대한 폭력과 인권을 짓밟는 부담을 용역에게 전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알량한 발상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자본과 권력이 갖는 본질과 의도를 모르기 때문에 면피를 할 수 있을 만큼 노동자, 민중이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다. 피지배계급의 적은 지배계급이라는 사실은 명명백백하지 않은가.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권력과 자본의 비윤리적 발상은 ‘용역’이라는 행동대원을 앞세워 자본의 이윤 극대화만을 고집하며, 대화를 통한 해결방식보다는 이른바 ‘법보다 우선인 폭력’을 통해 갈등을 봉합한다는 전근대적 통치방식을 고집한다. 천박스러움이 극치에 달한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결국 한나라당 국회의원의 주장처럼 위기의 자본주의가 망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나가는 교두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덧붙이는 말

이 글은 <한내> 뉴스레터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