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8차선 너머의 조선소 맞은편 인도를 따라 걸었다. 바다 물빛을 닮은, 아니 하늘 빛깔을 품은 85호 크레인이 조선소 담장 가까이 다가와 담장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그곳에 크레인 빛깔을 빼닮은 작업복을 입은 이가 있다. 하얀 모자를 눌러 쓴 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왼손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한손으론 전화기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 김진숙이다.
▲ 85호 크레인 안에서 바라본 모습 [출처: 김진숙 직찍 동영상 캡쳐] |
그가 열심히 오갈 수 있는 거리는 딱 열한 걸음이다. 크레인 조정석에서 나와 앞으로 열한 걸음, 뒤돌아서서 다시 열한 걸음. 그 열한 걸음을 김진숙은 잰걸음으로 쉬지 않고 오가고 있다. 한손으로는 철판과 철조망, 용역과 경찰에 막힌 세상과 소통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전화기 액정화면에 눈을 고정시키고 말이다.
180일이다. 김진숙이 땅에 발을 딛지 못한지가 6개월이다. 벗 김주익이 떠난 뒤로 보일러를 틀지 않고 냉방에서 잠을 자던 그가 집을 나선지가 반년이다. 벗이 목을 맨 그곳에 올라 정리해고를 막아내고자 크레인에 오른 시간을 더듬는 일조차 잔인하게 여겨진다.
오는 9일 2차 희망버스가 출발한다. 희망버스 목표가 185대다. 이 버스가 가득 채워진다면 1만 명이다. 1만명이 달려가면 국회마저 자신의 발톱에 낀 때보다 하찮게 여기는 한진중공업 회장이 정리해고를 철회할까? 김진숙이 땅으로 내려올 수 있을까?
부족하다. 185대로는 부족하다. 차도와 인도를 가로막은 경찰의 벽을 넘어서기에 부족하다.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조선소가 아닌 수용소가 된 저 야만의 담장을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주먹질이나 했을만한 이들이 일당을 받고 경찰인양 방패를 들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용역경비를 너머 저 85호 크레인 위로 희망을 전하기에는 더 많은 버스가 더 많은 희망의 얼굴이 달려와야 한다.
1차 희망버스 때처럼 공장 안에서 담장을 오를 수 있게 동아줄을 내려줄 달님은 없다. 희망버스를 타고 달려온 사람들이 인간 사다리를 만들어야 한다. 경찰차보다 높은 인간성벽을 쌓아야 한다. 철조망을 뛰어넘어 85호 크레인에 다가갈 수 있도록 인간 피라미드를 쌓아야 한다.
2차 희망의 버스 출발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는 9일에는 땅에 발을 딛고 크레인을 올려다보며 희망을 전달하는 1차 희망의 버스를 넘어서야 한다. 인간의 성을 쌓아 인간의 다리를 놓아 김진숙과 눈을 마주해야 한다. 손을 마주해야 한다. 살갗을 부비며 함께 싸워야 한다.
지난 주말 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를 다녀온 뒤로 ‘멍’하니 살고 있다. 내 두 다리가 흙에 닿지 못한다. 크레인에 대롱대롱 매달려 몸은 허공만을 떠도는 것 같다. 난 사람일까? 한 인간을 저 크레인 위로 올려놓고 180일을 꼬박꼬박 밥을 먹는 나는, 글을 쓰는 나는, 사랑을 하는 나는, 사람일까?
3차 희망의 버스는 존재하지 않았으면 한다. 2차 희망의 버스가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자와 조합원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뿌리 깊게 심어주었으면 한다. 김진숙이 더 이상이 크레인 위에 있지 않아도 자기 배당만 수백억 챙기며 제 식구의 생계를 끊는 야만스러운 한진중공업 경영진에게 정리해고 철회를 받아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자. 더 이상 김진숙이 트윗이 아닌 손을 마주하고 어깨를 걸고 살갗을 부대끼며 함께 싸울 벗들이 있음을 보여주자.
3차 희망의 버스는 없다. 2차 희망의 버스로 이 시대 양심의 연대가 야만의 담장을 뒤덮어 김진숙을 대지의 품으로 안아 와야 한다.
오는 9일 출발할 희망의 버스를 제대로 준비해 더 이상 김진숙이 크레인에서 농성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 누군가가 이랬다. “김진숙 지도위원, 정리해고 철회안이 나오지 않는 이상 누가 내려오란다고 해서 절대 내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희망한다. 나는 믿는다. 김진숙이 내려오지 않는다면 희망의 버스를 탄 모든 이가 크레인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문제는 김진숙이, 정리해고자들이, 한진중공업 조합원만이 질 무게가 절대 아니기에. 이제 시민 사회가 나서고, 정치인이 나서 해결해야 할 문제기에.
“김진숙, 희망의 버스를 믿으세요. 이제 당신과 함께 땅에 발 딛고 싸우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