챙겨갈 짐은 하루 전에 미리 말해 달라는 우리 직원들의 성화를 이번에도 못지켰네요. '어찌되든 간다'고는 연락해 두었지만 토요일 낮에 다시 한 번 상황을 알려주겠다는 말에 마음이 풀어졌나 봅니다.
광양, 하동, 진주, 아마도 창원 어름까지... 산자락마다 하얗게 피어 있던 밤꽃도 거의 지고 푸르름만 더해갑니다. 올해에는 유난히도 구린듯한 그 밤꽃 냄새가 나지를 않는다고 시골에서 벌을 치는 부모님이 한탄하십니다.
▲ 6월 19일 한진중공업을 찾아 조합원을 진료하는 윤성현 순천 들풀한의원 원장(왼쪽). [출처: 용설록 울산노동뉴스 현장기자] |
정문 안쪽에서 3일째 단식중인 지회, 지부장님. 두 분은 전생에 무슨 인연이길래 동락은 못하고 '동고'만 죽어라 하는지. 마른 체형의 강단진 문 지부장님은 크레인에서 내려온 뒤 살이 8kg이나 쪘다고 지지난 주에 웃으셨는데 설사끼가 채 낫기도 전에 이제는 아예 곡기를 끊으니 혹시 설사가 잡히면 그것도 복이라고 해야 하는지요.
아직은 괜찮다는 채 지회장님, 어깨에 침을 놓는데 한진 남자들 벗은 몸은 자기가 다 봤다며 '현장 간호사' 황 동지가 놀려댑니다. 방이 되고 거실이 되고, 독서실이 되고 병원이 되고, 면회도 하고 투쟁도 하고, 천막 안은 노동자들의 또 하나의 세상입니다. 하늘에서는 무엇을 호소하고 땅에서는 또 무엇에 항거하려는 것인지? 몸뚱이를 던져 지키려는 것은 무엇이며 목숨을 내어 놓아 되찾으려는 건 또 무엇인지?
두 분을 뒤로 하고 85크레인 밑으로 가는데 어떻게 들어 왔느냐며 “의사라 안 들여보내 주었겠나, 의사 빽이 쎄긴 쎈갑네” 하면서 인사를 대신 합니다.
전날 진보신당 분들이 한 차로 내려왔는데 들어갈 수가 없어 밖에서 연좌농성을 하였답니다. 주말을 반납하고 비좁은 차에서 몇 시간씩이나 고생하였을 그 분들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크레인 위를 쳐다 보는데 모습이 안보여서 짐부터 풀고 진료를 하였습니다. 대체로 말씀들을 잘 안하십니다. 어디 아픈 데 없으시냐?-없습니다. 다친 데는 없나요?-별로 없는데, 여기 좀... 그래서 살펴보면 여러 바늘을 꿰맸고... 그럼,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지는 않느냐?-뭐,그냥 가슴이 답답하고... 또요?-잠이 잘 안오고...
아, 내가 화타도 아니고 말을 다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알아서 처방을 합니다. 보따리장수처럼 약가방을 싸매들고 온 의사도 낯설고 진료실도 병원 같지 않고 침구실도 한의원 같지 않고 낯설어서 그럴 겁니다. 낯설어서 무뚝뚝할 겁니다.
그래도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픈 곳을, 힘든 것을 이 분들이 쉬이 꺼내 놓지 않는 것은
그것마저도 자신들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아픈 곳도 파업의 일부요, 힘든 것도 투쟁의 한 부분이라는 겁니다. 자신의 일을 남에게 대신 해주라고 맡기지 못하는 그런 심정 말입니다.
'현장 진료실'은 성황이었습니다. 진료 받으려고 줄까지 선 분들도 있었으니까요. 잠을 못이뤄 술이라도 마셔야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억울함으로 간이 뭉쳐서 밤에 누어도 피가 간으로 돌아가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가슴이 답답하거나 두근거린다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애가 타 심장의 피가 졸아들었기 때문입니다.
가대위 분들 중에는 소화가 안되고 속이 쓰리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근심걱정으로 비장이 움직이지 못하고 또 기가 막혀 소화액이 역류하기 때문입니다. 뒷목이 뻐근한 것은 간화가 치받아서 머리가 아픈 것은 피가 졸아들었거나 울화가 치밀거나 음식 찌꺼기가 역류해서 그렇습니다. 돌이 된 아기가 살이 안 찌고 크질 않아서 백분위 등급 중에서 백등급을 받았다면 또 왜 정리해고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치료야 열심히, 침 놔 드리고 지압에 교정까지 평위산 처방하고 천왕보심단 드리고 생간건비탕은 싸 드리고 육미지황환, 팔미지황환, 황련통성산, 은화통성산, 보중익기탕, 청서익기탕, 단치소요산, 해울단, 꿀잠음(?)에 승리단(?)...까지 황동지와 손발 맞춰 가며 처방하였습니다.
“치료는 합니다만 보장은 못합니다”고 농담조로 말하기도 했습니다만 농담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디 이 분들이 침을 못 맞아서 아픈 건가요? 약을 못 먹어 힘들게 된 건가요?
그래서 더욱 '희망의 버스'가 소중한 듯합니다. 맨 정신으로는 차마 말을 못하고 술기운을 빌어서야 맹장염에 걸려 죽을 뻔한 자식 얘기를 꺼낸 26년차 아저씨 누가 그 분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습니까. 그 분의 호소를 귀담아 들으며 눈물 훔친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터질 것 같은 그 분의 가슴을 감싸 안아준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희망의 버스는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아픈 사람들의 가슴을 안아 주고, 외로운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함께 노래하고, 함께 춤추며, 함께 사진을 찍고, 함께 밤을 새웠습니다. 할아버지 신부도 노래하고, 유치원 아이들도 노래하고, 판화를 찍고, 그림을 그리며, 편지를 읽고, 시를 읊었습니다.
어떤 의사가 이러한 치유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정치가가 이러한 위로를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어느 방송이 이토록 신명이 나게 할 수 있으며 어떤 종교가 이런 감격을 줄 수 있겠습니까. 1박 2일 희망의 버스는 그 무엇보다도 훌륭한 예술적 치유였고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희망의 연대였습니다.
희망의 버스가 도착하기 전, 조합원들이 새파란 용역깡패들에게 맞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 봐야 했던 김진숙 선배는 그로부터 1주일간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희망의 버스가 다녀간 뒤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여 바쁘기도 하였답니다만 치가 떨리는 분노로 가슴이 미어지는 안타까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혀와 입안이 다 헤지고 기운도 없고 밥맛도 잃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환노위 조사를 마칠 때까지는 공권력 투입이 없을 것 같다며 잠도 조금 청한다고 합니다.
겨울에는 얼음장이요, 여름이면 불판 같을 크레인 위에서, 치커리를 키우고 상추를 돌보며 토마토에 물을 주는 그 마음이 평상심일지 간절함일지 저는 다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한약만 먹으면 몸이 부어서 다 먹질 못해 왔다시길래, 시집갈 것도 아니면서 무슨 걱정이냐고 속없이 대꾸했는데 그게 아니라 몸이 무거워져서 그런다고 합니다.
약을 한 가지 더 드리고 알약 삼킬 때 꿀물로 삼키면 식도가 이완이 잘된다고 전하면서 부모님이 인동초 꽃에서 따셨다는 햇 꿀도 드렸습니다. 가지고 간 약이 떨어져 나중에 온 분들에게는 드리지 못한 경우도 있어 다음에는 가짓수를 줄이더라도 필요한 것들은 많이 늘려야겠습니다.
김진숙 선배가 연설에서 말씀하신, 아버님이 말기 암으로 투병중이시다는 분의 사정을 들었습니다. 월남전 참전 뒤 피부병이 생겨 줄곧 피부병 약을 들어 왔답니다. 국가보훈처는 고엽제 피해자로도 인정을 안 해주고, 간암이 심해 수술이 불가능하다는데도 개복술이 아니라서 색전술만으로는 수술을 인정할 수도 없다고 한답니다. 당일 처남 결혼식에도 우여곡절 끝에 다녀올 수 있었다고 안도하면서도 담담하게 말하는 이 '장남'의 짐은 누가 나눠 질 수 있을까요? 국가로부터 외면당하고 회사로부터 팽개쳐진 이분들에게 매달려 보고 싶습니다.
먹은 것이 내려가지 못해 다시 고통스럽게 토해내야 하고 배는 차오르고 사지는 메말라
마치 거미같은 모습일 분께 매달려 치료를 해보고 싶습니다.
희망의 버스, 저에게도 힘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