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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5,410원은 과연 정당한가?

[연속기고] (1) 생계비 기준으로 최저임금을 법제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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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은 교섭 대상이 아닌 노동자 생계비

2012년에 적용될 최저임금 결정을 위한 최저임금 위원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려 하고 있다. 6월 3일에는 노동계와 자본 측의 요구안이 제출될 것이고 그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교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최저임금위원회의 교섭에 큰 기대를 걸기는 힘들다. 지난 10년간 보아온 바, 최저임금위원회에서의 논의란 노동계와 자본의 팽팽한 대립 가운데 공익위원이 어느 정도 수준에서 조율할 것이냐가 거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위원회의 막판 교섭 시기에 회의장 밖에서 집회 투쟁을 하고 있노라면 매 시간 의견이 얼마나 좁혀졌는지, 상황이 어떠한지가 전해져 나온다. 그때마다 뚝 뚝 깎여져 내려가는 노동계 요구안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다만 교섭장 안과 밖의 온도차 때문은 아닐 것이다.

  지난해 6월 말 최저임금위원회 앞 인도 노숙농성에 들어간 민주노총

최저임금제도는 자본이 노동자를 고용하여 사용 할 때에는 최소한 이 정도 수준은 지급해야 ‘살 수 있다’는, 그 최소한의 기준선을 설정하는 제도이다. 또 어떤 노동자들에게는 최저임금이 삶의 질을 직접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되고 있으며, 자본의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확대로 인해 최저임금 선에 닿아 있는 노동자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저임금 투쟁에서 무엇을 요구하고 무엇을 쟁취할 것이냐는 바로 자본의 침탈로부터 최소한 보장받아야 할 삶의 기준을 무엇으로 보고, 그것의 쟁취를 위해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를 의미한다. 자본은 더욱 최‘저’임금으로 만들려고 할 것이고, 이에 맞서 최소한의 삶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이 바로 최저임금 현실화를 위한 투쟁이다. 그렇게 노동자의 생계를 두고 팽팽히 맞서 있는 지점이 바로 최저임금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노동자의 기본적인 생계수준을 정하는 최저임금 결정이 양보와 타협 속에서 결정된다는 것은 노동자 스스로가 허용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최저임금제도는 민주노총의 적극적인 개입이 시작된 이후에도 10년 동안 그렇게 굴러왔고, 올해도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노동자의 임금은 곧 생계비라는 사실, 그리고 최저임금은 이 사회의 노동자의 최소한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척도라는 사실, 그것이 교섭으로 조율되고 양보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으면 이후 10년도 똑같이 노동자의 생계는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저울질 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최저임금위원회는 해산하는 것이 마땅하다.

최저임금, ‘절반’이면 될 듯하다?

최저임금은 생계비를 담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하며, 그 생계비를 기준으로 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노동계 요구안인 5,410원은 그저 전체 노동자 임금 평균의 절반이다. 국제적으로 이야기하는 빈곤선이라는 이유로 이 기준을 사용하지만, 절반이면 최소한의 생계가 가능하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그것도 부족하다는 근거는 있다.

민주노총이 올해 발표한 표준생계비에 따르면 2011년 1인 가구의 표준생계비가 182만 8,325원이라고 한다. 시급 5,410원으로는 주 40시간 노동했을 때 월 113만원 정도의 급여를 받게 되는데, 이 차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표준생계비는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생활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 ‘보편적’과 ‘최저’의 차이가 민주노총으로 하여금, 표준생계비는 182만여 원이고, 최저임금은 113만여 원이면 된다는 합리성을 부여한 것일까?

비슷한 일은 또 있다. 지난 2007~8년 두해 동안 서울지역에서는 ‘생활임금운동 기획단’이 꾸려져 최저임금 투쟁의 관성을 극복하고 투쟁의 내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생활임금’의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활동했던 바가 있다. 당시 노동자 스스로가 요구하는 적정한 생계비와 생활임금은 얼마인지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는데, 그 결과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한 임금으로 월 295만원, 가족의 최소한의 생계비로 303만원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었다. 실제로 우리나라 물가와 비싼 주거비, 교육비, 각종 공공요금 등을 생각한다면 인간답게 살 수 있기 위해서는 더 많은 소득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조사 결과에 대한 대다수의 반응은 금액이 너무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최저임금투쟁 과정에서 선전하고 홍보하기에는 너무 높은 금액이라는 것이다.

[출처: 진보정치]

최저임금 현실화를 이야기하고, 생활임금이 필요하다는 말을 누구나 하지만, ‘이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을,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베풀 때처럼 우리도 똑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도 그렇다. ‘5,410원이 되면 행복합니다’ 라는 말 속에 실제로 5,410원을 받고 살아야 하는 노동자들의 입장은 반영되어 있는 것인지. 결국 생활임금을 이야기하고, 최저임금 현실화를 말하지만, 대다수에게는 최저임금은 최‘저’임금이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박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묻는다. ‘당신이, 이 최저임금 투쟁에서, 적정하다고 생각하는 요구안의 수준, 그것에 대해 당신이 그어 놓은 한계선은 어디까지입니까?’

스스로 답할 수 없다면, 이제 우리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최저의 함정을 좀 벗어나 보는 것이 어떨까?

생계비를 기준으로 최저임금 결정기준을 법제화해야한다

최저임금은 전체 노동자 임금 평균의 절반 아니라 ‘생계비’를 기준으로 결정 되어야 한다. 교섭에서 요구안을 놓고 양보하고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적정한 생계비의 수준을 밝히고, 기준으로 법제화해야 한다.

이에 대해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는 최저생계비 개념을 기준으로 삼는 방안을 제출한 바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최저생계비를 상회하는 최저임금 법제화”를 우리의 대안으로 가지고 정부를 상대로 결정기준 법제화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제기이다. 다만, 현행 최저생계비는 비현실적으로 낮게 책정되고 있다. 노동을 유도한다는 측면에서 최저생계비는 늘 최저임금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서 책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낮은 최저생계비가 다시 최저임금을 끌어내리는 역할을 계속 해왔다. 그럼에도 최저생계비를 기준으로 법제화 하자라고 제기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다.

첫째, 이것이 최저임금 투쟁의 성격을 분명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이 보장해야 할 최저생계를 법정 최저생계비와 연동시킴으로서 최저생계비의 쟁취를 위한 투쟁에 보다 힘을 집중시키자는 것이다. 그것 없이 최저임금 인상만을 이야기한다면 국민임투는 커녕 고용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될 뿐이다. 보편적 생활수준과 최소한의 문화적 생활을 위한 생계비를 위해 투쟁하지 않고 50%를 요구안으로 던져놓고 교섭으로 해결하려 하니, 될 턱이 없다.

둘째, 노동자의 임금이 생계비라는 사실을 사회적으로 재확인함을 통해 최저임금 투쟁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노동자 임금은 연공급 체계 재편, 성과급, 직무급 도입 등으로 공격을 받고 있다. 임금이 노동자의 생계비가 아니라 성과나 숙련, 직무, 고용형태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자본의 주장이 먹히고 있는 것이다. 이를 방어하는 것은 노동자의 임금이 성과나 하는 일 또는 숙련과 같은 것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두가 사회에 필요한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 노동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는 점, 임금이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수준이어야지 다른 주관적 요소가 개입돼 저임금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금액의 높낮이 여부를 떠나서 평균임금 50%의 요구는 정부 자본의 임금 개편 논리를 깰 수 없다. “왜 그만큼 받아야 하는데”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지 “그 만큼도 못 받는 노동자가 많아서” 일 뿐이며, 이 속에는 최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다분히 시혜적이고 동정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이러한 시각은 최저임금 투쟁 자체를 대리투쟁-대리교섭으로 만들어 몇 푼이라도 인상하면 ‘선방했다’는 평가를 스스로에게(대다수 미조직 노동자에 대하여는 사실상 무책임하게) 남길 뿐이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우리가 요구하는 생계비가 최저임금 투쟁에 담길 수 있게

물론 이는 철폐연대의 제기이다. 이로부터 시작해 노동자의 생계를 보장하는 최저임금 결정기준 법제화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중요한 것은 요구안의 높고 낮음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기준이든 최저임금이 노동자의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계를 보장하는 생계비의 개념으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기준이 법제화되어 더 이상 최저임금위원회에서 노동자 생계를 두고 양보하고 타협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최저임금 투쟁 속에는 ‘생계비’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 생활임금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5,410원이라는 금액에 묻혀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5410이라는 숫자에 갇혀 버린 인간다운 생활의 요구를 끄집어내자.

적정한 생계비가 어느 정도냐는 저마다 다를 수 있다. 현재의 소득과 생활에 따라 적정한 생계에 대한 요구 수준도 다르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다르기 때문에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생계비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당신이 요구하는 적정한 생계비는 얼마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에서부터 최저임금 투쟁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 참고

    최저임금은 '노동자 1인 임금'이고, 최저생계비는 '가구기준'이에요. 필자의 지적과 주장은 동의되나, 아예 다른 기준을 가진 두 금액을 조화시키려면 최저임금 적용 기준과 방법 등도 매우 세분화돼야 하는데, 가능할지는 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