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4월 28일 법원은 콜텍 여성 직원 11명이 남성과 동일한 가치의 노동을 했음에도 임금 차별을 받아왔다며, 콜트악기가 이들에게 차별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보상받은 금액은 한 사람당 적게는 이백만 원에서 천이백만 원까지 이른다.
사라진 회사
2006년 노동조합을 세운 콜텍 노동자들의 첫째 요구는 ‘동일함’이었다. 정당한 사유가 없을 시, 월급 인상은 일하는 사람 모두에게 동일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같은 업무를 한다면 여성일지라도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
그전까지 관리자 입맛대로 임금이 올랐다. 마음에 드는 직원에게 오백원 천원 월급을 올려주는 것이 임금인상이었다. 노동조합이 생기고 첫 단체협상을 통해 모든 노동자들에게 회사 역사상 가장 높은 임금인상이 이루어졌다(그럼에도 노동자 대부분의 시급은 최저임금보다 백 원 조금 넘었을 뿐이다). 바로 전해 회사는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임금을 동결했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생긴 후, 공개된 회사 재정상황은 전혀 달랐다. 경기가 어렵다던 그 해, 회사는 순이익 87억을 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노동자들을 속여 온 것이다.
노동조합은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의 임금 차이 또한 문제제기했다. 입사한 지 10년이 되는 여자 직원이 갓 들어온 남자 직원과 비슷한 수준의 월급을 받고 있었다. 회사는 개선하겠다는 말만 앞세운 채 차일피일 문제를 회피했다. 결국 노동조합은 2007년 1월 노동부에 양성평등 진정을 내게 된다.
그렇게 하나씩 변해갔다. 여성노동자들을 향해 하던 관리자들의 쌍욕이 사라졌다. 엉덩이를 툭툭 치고 가던 희롱도 사라졌다. 시간외수당도 없는 잔업 강요도 사라졌다. 물량이 줄면 그 잠시를 못 참고 어김없이 직원들을 해고시키던 풍경도 사라졌다. 노동조합이 생기고 1년, 하나둘 익숙했던 것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 날 회사가 사라졌다.
2007년 4월 10일, 콜텍악기는 경영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폐업을 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한 노동자들은 닫힌 공장 앞에서 폐업을 알리는 공문을 보았다. 그 후 회사는 노동조합과 어떤 대화도 하려 들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빚 하나 없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을 정도로 경영이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인가?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더 많은 이윤과 ‘노동조합’ 때문이었다. 노동조합을 없애기 위해 위장폐업을 한 것이다. 회사 문을 닫으면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구하러 뿔뿔이 흩어지고, 자연스레 노동조합도 없어질 게였다. 노동조합이 사라진 후 다시 소수의 말 잘 듣는 사람들만 뽑아 공장을 가동시키면 그만이었다. 인도네시아와 중국에 공장을 두었으니 한국 공장은 몇 개월 문을 닫아도 무리될 것 없다는 회사의 속내가 보였다.
회사는 왜 노동조합을 없애려고 한 것일까? 약품냄새에 눈이 시린 공장에 환기장치를 요구해서일까? 일주일에 한번 지급하던 장갑과 마스크를 매일 주어야 해서일까? ‘만만한’ 여자들에게 예전처럼 욕지거리를 하지 못해서일까? 최저임금에 백 원 한 푼 더 해지는 것이 싫어서였을까? 그래서 공장 문을 닫아버린 걸까?
폐업을 한 날은 마침 월급날이었다. 돈 나오고 들어갈 때가 뻔한 형편들이었다. 마흔 줄에 들어선 노동자들은 닫힌 공장 앞에서 서성거렸다. 회사가 원하는 대로 뿔뿔이 흩어질 수 없었다. 사라진 공장에서, 거리에서 싸우는 생활이 시작됐다. 5년이 흘렀다. 사라져버린 공장에 터를 잡고 농성을 하기도, 본사에 쳐들어가기도 했다. 작년 4월부터 몇몇 조합원들은 콜텍의 계열사이자 위장폐업을 당한 콜트악기가 있는 인천공장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내 인생이 망가졌어
“당신들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어.”
콜텍악기 박영호 사장이 노동조합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누가 누구의 인생을 망친 것인지 되묻지 않았다.
콜텍에서 일한 여성노동자들을 만나, 인생이 망가졌냐고 물었다.
“아니오. 신선놀음 하고 있는데?”
세 여자가 키득거린다. 신선놀음이란 시골에 들어와 있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꼬리를 치는 누렁개, 뒤편으로 늘어선 장독, 낮은 처마와 높은 문턱. ‘민주노총’이라 쓰인 봉고차만 없었어도 딱 농촌 여염집인 그곳에 가면 세 명의 콜텍 여성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다. 남자들이 인천 콜트 공장에서 농성을 하는 동안,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여자들은 공장이 있는 대전에 남아 상추를 씻고, 밥을 안치고, 뜨개질을 하고, 농사를 짓고, 회의를 하고, 투쟁을 계획한다.
장류 사업을 한다고 시골에 들어와 앉았다. 싸움이 길어지고 돈은 떨어져 갔다. 회사야 당장 몇 천만 원이 없어도 살지만, 노동자는 단돈 몇 만원에도 전전긍긍이다. 생활고에 지친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떠나갔다. 그때 생각한 것이 조합원들이 한 데 모여 된장 고추장을 만들어 파는 일이다. 장을 만들어 판 돈이 생활비와 투쟁기금이 되니 좋고,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조합원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으니 좋았다.
돈을 마련하고 싸움을 준비했다. 이 싸움이 오래 갈 것임을 알고 있다. 쉽지 않은 싸움이라는 것을 몸으로 체감했다.
“처음에는 3개월 안에 해결이 될 줄 알았어요.”
그녀들은 회사가 문을 닫았을 당시, 순진했던 자신을 생각하며 웃는다.
“누가 봐도 회사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 위장폐업이라는 확신을 가졌으니까. 경영악화라는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매출액도 좋고 몇 달 전만 해도 물량 모자란다고 잔업도 시키던 회사니까요. 처음에는 희망적으로, 당연히 우리 말이 맞으니까 금방 해결될 줄 알았죠.”
그러나 누구 하나 노동조합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농성 중이던 공장에서조차 쫓겨났다. 노동부도 경찰도 시의원들도, 누구도 노동자가 억울하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기나긴 싸움이 시작됐다.
미국, 일본, 독일 등지를 6차례나 방문하여 콜텍 기타와 거래하는 외국 업체와 음악계에 문제를 알렸다.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고압송전탑에도 올라갔다. 긴 싸움 동안 생활비를 마련하는 일은 말 그대로, 생계‘투쟁’이었다. 험난한 길을 가다보니 자신들이 그동안 얼마나 순진했는지 보였다.
최저임금도 못 받으면서 월급날이면 뿌듯했다. ‘애 딸린’ 여자 일 시켜주는 곳 없으니, 이거라도 어디냐 싶었다. 그 돈으로 아들 딸 공부를 시키고, 입고 싶다는 것 먹고 싶다는 것 다달이 챙길 수 있어 행복했다. 야근 잔업에 손발이 부어도 톱밥 가득한 공장에서 일 년 열두 달 감기를 달고 살아도, 다 돈 버는 일이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유명 가수가 콜텍 기타를 연주하고 있으면, 엄마가 만든 것이라고 자랑도 했다. 기타줄 한번 잡아볼 시간이 없었지만 자신이 만든 기타가 세계적인 브랜드라니 보람됐다.
그러나 회사가 문을 닫고 깨달았다. 회사의 눈에 그/녀들은 푼돈에 시키면 시킨 대로 일해야 하는 몸종이었다. 길게는 20여년 넘게 일한 회사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데 노동자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모르고 일을 했다. 노동조합 관련 뉴스는 물론 시사 정치 문제도 남의 이야기인 냥 흘러 넘겼다는 그녀들은 이제 작은 소식에도 귀 기울인다.
“모든 것이 사회 문제고, 정책 문제인데. 언젠가는 나한테 돌아올지 모르는 건데 당장 내 문제가 아니라고 등한시하고. 노동조합 없을 때는 그랬어요. 이제 그러면 안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지니, 뉴스를 보다가 남편과 견해 차이 때문에 종종 다툼을 한다며 농을 하는 그녀들이다. 자신들의 판결에 대해서도 생각을 쏟아낸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쌓인 것이 조금은 풀렸죠. 하지만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작업환경이 열악할수록 여성 남성 차별대우도 더 큰 것 같아요. 앞으로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일들이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우리 판결이 그런 곳에 도움이 됐음 좋겠어요. 이걸 계기로 사회적으로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고, 우리 자녀들은 이런 환경에서 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찌 보면 그걸 바라고 싸우는 거죠.”
오랜 싸움, 견디다
온갖 성차별과 비인격 대우를 거부한 노동자들을 향해 박영호 사장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원망하고 있을 동안, 그녀들은 하루하루 알아간다. 지난 삶이 억울했음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음을.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도 깨닫는다.
“예전에는 다 남이고 경계해야 하는 사람들인 거예요. 서로 월급도 공개를 안 해요. 다 따로 월급이 나와요. 관리자가 예뻐하는 만큼 월급을 주는 거니까. 얼마 받았는지 서로 모르고 말도 안 해주고, 괜히 말했다가 관리자에게 찍히고. 동료가 내가 하는 일 뺏어가고, 덜 어려운 자리 차지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차별과 경쟁이 당연했다. 노동부에 진정을 넣자, 몇몇 여자 직원들이 회사 편에 서 ‘우리가 여자니까 임금을 적게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증언을 했다. 회사가 시킨 일이라 생각하니 괘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자신들 모두 그리 일했음을 떠올렸다. 차별 받고 적게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랜 싸움을 통해 그녀들은 깨달았다. 세상의 어떤 상식도 힘없는 노동자들에게 그냥 주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힘없는 이들끼리 서로 소리를 모으지 않으며 무엇 하나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아는 거죠, 함께 있는 것이 힘이라는 걸. 그래서 어려워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장류 사업도 하는 거고, 생계 문제로 싸움 같이 못하는 사람들도 늘 노동조합에 얼마씩 보태주는 거고요.”
콜트-콜텍은 또 하나의 판결을 앞두고 있다. 위장폐업으로 인한 부당해고를 가리는 판결이다. 2009년 고등법원은 부당해고라며 노동조합의 손을 들어주었다.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판결이 언제 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노동자들은 길고 긴 싸움을 해야 한다. 그동안 버는 것 없이 나가는 생활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들은 어떻게 버티어야 하는지 안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견딘다.
대법원 2011다6632 남녀차별임금청구사건의 개요 및 의미
여성근로자들인 원고들은 피고 주식회사 콜텍(이하 ‘피고 회사’라 함)에 1993. 6. 25.부터 2000. 7. 6. 사이에 입사하여 피고 회사 대전공장에서 근무하면서 동일한 사업내의 남성근로자들과 동일한 가치의 노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피고 회사는 위 남성근로자들이 지급받은 임금보다 적은 임금을 원고들에게 지급하여 왔습니다.
원고들은 위 남성근로자들이 지급받은 임금과 원고들이 실제로 지급받은 임금과의 차액(2004년 5월분부터 2007년 6월분까지)의 지급을 청구하는 소송을 2008. 12. 13. 서울남부지방법원에 제기하였는바, 서울남부지방법원은 2010. 7. 28. 원고들이 위 남성근로자들과 동일 가치의 노동에 종사하였다는 사실 및 원고들이 성별을 이유로 피고 회사에 위 남성근로자에 비해 차별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피고 회사에게 차별임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하였고, 이에 불복하여 피고 회사가 2010. 8. 13.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하였으나 서울고등법원은 2010. 12. 24. 피고 회사의 항소를 기각하였으며, 이에 피고 회사가 다시 불복하여 2011. 1. 19.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대법원은 2011. 4. 28. 피고 회사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위 사건은 확정되었습니다.
위 사건에서는 ①원고들의 노동이 위 남성근로자들의 노동과 동일한 가치인지 여부, ②차액상당의 임금청구권이 인정되는지 여부, ③객관적으로 차액임금을 산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여부 등이 쟁점이 되었고 위 쟁점에 관하여 원·피고 상호간 치열하게 공방이 진행되었는바, 법원은 ‘① 대전공장의 제품생산과정, 작업공정, 남녀 근로자들의 노동강도, 근로자 신규채용시 임금책정 방법 등을 종합하여 볼 때 남녀간 임금의 차별 지급을 정당화할 정도로 ‘기술’, ‘노력’, ‘책임’, ‘작업조건’에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없고, ② 헌법의 평등이념, 헌법 제32조,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고평법’이라 함) 제7조, 제9조, 제10조 제11조, 근로기준법 제6조, 제15조에 비추어 원고들은 피고 회사에 차별받은 임금 상당액을 직접 청구할 권리가 있다고 봄이 타당하며, ③ 원고별로 가장 근접한 시기에 입사한 남성근로자의 임금을 비교하는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다‘라고 판단함으로써 원고들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고용평등보장법이 제정된 이후 차별금지규정을 위반한 경우 그 위반의 효과, 차별을 받은 근로자가 사용자에게 차별임금을 청구할 수 있는지 여부, 지급을 청구할 수 있는 임금의 범위(노동위원회 구제신청 전 3개월로 한정되는지 여부) 등이 논의되어 왔는바,
이 사건 판결은 동일가치 노동에 대해 성별을 이유로 동일 임금을 지급받지 못한 근로자들은 사용자에게 차별받은 임금을 직접 청구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 최초의 대법원 판결이라는 점, 사용자에게 직접 청구할 수 있는 임금이 일정범위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차액전액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김차곤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