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 담론에 대한 비판적 접근
복지정책은 한국에서 중요한 의제이고 민생문제의 핵심이기도 하다. 왜냐면 양극화와 빈곤화, 삶의 불안정화가 갈수록 악화 확산되는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불안정과 위기에 대한 제도적 방안과 정책대안을 바라는 것이 대중적 요구이기 때문이다.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의 ‘무상의료 무상교육’정책이 호소력을 강하게 가졌던 이유이기도 하다.
복지담론에 대한 문제제기는 두 가지 맥락에서 제기된다. 첫째는 복지정책이라는 것이 사회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처방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즉 비정규직이 확산되고 정리해고 등의 법과 제도로 고용불안이 가속되는 상황에서 그 원인적 측면, 노동고용정책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와 투쟁의 성격이 약화되고, 사후적으로 나타난 실업, 고용불안에 대한 ‘안전망’을 어떻게 구축하고 확보할 것인가의 문제로 집중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둘째는 노동, 주택, 교육 등의 다양한 정책의제와 갈등요소들에 대해 그 구조적 원인과 해법이 여러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가 있는데 이것을 복지정책이라는 것으로 일원화 집중화하는 것이 가지는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다. 교육문제만 보더라도 학벌사회, 사교육 확산, 대학의 서열화 등 여러 심급의 문제들이 있는데, 이것에 대한 다양한 구조적 접근과 대안의 문제를 교육복지 즉 ‘비용과 재원’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담론과 복지‘정책’이 가지는 현실적 유의미성과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한다. 하지만 그 차원의 문제와 ‘복지국가’담론은 전혀 다르다. 국가론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개혁과 변혁, 즉 대한민국의 개조 방향론을 제기하는 것이고 그것을 복지‘국가’로 담론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지국가가 부각되었던 4,50년대의 서구사회처럼 자본주의의 호황기, 케인스주의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경제의 개혁노선, 노동운동의 높은 조직화와 실천력,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사회정책이 주는 압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등장한 국가론이라는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현재의 자본주의와 세계경제 속에서 한국사회가 처한 상황을 직시하면서 어떻게 한국사회와 국가를 개조할 것인가의 맥락을 놓치면서 그 때의 그 모델을 절대시하는 것은 현실주의 노선도, 이상주의 노선도 될 수 없다.
즉 노동이 존중받는 법과 제도를 어떻게 재설계할 것인가, 남북대치와 군사비 규모가 다른 사회정책들을 제약하는 상황에서 남북의 평화체제, 평화국가로 어떻게 재설계할 것인가, 재벌과 대자본 위주의 한국 경제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재구조화할 것인가의 문제와 유리된 복지국가, 보편복지라는 것은 구조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나아가서는 그런 구조적 한계를 은폐하는 효과를 가지기도 한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더욱이 복지국가담론이라는 것이 이러한 한계와 문제점을 가지는 것을 넘어, 한국의 정치지형과 진보정치의 발전전망을 왜곡시키는 정치재편의 기준과 논거가 되고 있기에 더욱 심각한 것이다.
노동운동 위기의 원인과 복수의 진보정당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민주노조운동이 위기라는 것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지표와 현실적 모습에서 나타나지만 이것을 집약하면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이 가지는 ‘노동자의 대표조직’이라는 권위가 상당부분 무너져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조직율도 중요하고, 그 실천역량과 투쟁력도 중요하지만 이것을 포함하여, 민주노총이 80만 조합원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미조직되어 있는 노동자들, 민주노총의 외부에 있는 수많은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총이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권리를 옹호하고 있는 조직이라는 정서적 공감대가 상당히 무너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조직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조직이라는 거리감이 생긴 것이다.
권력과 자본에 대한 대결 과정에서 실천력과 투쟁력을 보이면서 많은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비전과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위사업장 등의 현장에서부터 자본권력이 현장을 잠식하고 오히려 노동자의 현장권력보다 우위에 서는 경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법과 제도를 개선시키는 정치투쟁에서도 후퇴하고 있으며 노동자와 고용 관련한 법과 제도가 개악되는 현실을 저지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며 노동운동 혁신의 방향이 무엇인가? 객관적 환경과 조건 탓도 있을 것이고 주체적 원인도 있을 것이다. 자본과 권력의 억압적이고 적대적인 태도, 법과 제도의 개악과 족쇄 등은 상수이다. 이러한 객관 현실에서 어떻게 노동운동이 혁신하고 새롭게 도약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에서 시작하는 것이 올바른 접근법이다.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투쟁방식의 전환, 현장 권력을 유지 강화시키면서 현장에 대한 자본의 침투에 대처할 수 있는 조직전략, 정파 갈등이 노동자의 민주적 단결을 저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운동의 혁신전략, 정치투쟁을 야당과의 정치협상과 로비력으로 치환시키는 편향에 대한 올바른 노동정치의 대안과 실천들, 여러 가지 노동운동이 보였던 한계, 오류, 편향들을 극복하는 것에서 혁신은 출발해야 한다.
진보신당과 민노당으로 분화되어 있는 진보정치, 노동정치의 현실은 이러한 노동운동의 혁신과 복원에 어떻게 작용을 하고 있는지는 이와 별개로 냉정하게 평가되고 분석되어야 한다.
노동운동의 혁신과 복원을 위한 과정에서 진보신당과 민노당이라는 노동정치의 분화와 갈등은 긍정적이고 순기능을 하기 보다는 오히려 노동운동 주체의 혁신과 단결을 가로막는 - 주체들의 선의와 무관하게 현실적으로 미치는 효과 -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며,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전략적 발전과 접근을 무력화시키고 야당 일반에 대한 정치협상으로 노동정치를 대체하려는 실리주의 경향을 부추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은 현실이다.
그래서 진보신당과 민노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치, 노동정치의 단결과 통합이 노동운동의 혁신과 복원을 보장해주는 보증수표는 아니지만, 그런 흐름과 노력을 뒷받침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론 진보정당의 단결과 통합을 넘어서, 진보정당이 노동운동의 혁신과 복원에 기여할 수 있는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노력해야 하며, 상호결합하고 지원하는 올바른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의 문제로 나아가야 한다.
연립정부 및 권력참여에 대한 태도
선거에서 다른 정치세력과 연합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다만 그 연합은 가치와 정체성이라는 원칙을 가진 연합이어야 하고, 일방주의적 연합이 아닌 호혜주의적 연합이어야 하는 것도 상식이다. 그리고 그 연합이 정치적 구걸이나 투항이 아니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치적 독립성을 대중적으로 확인시킬 수 있는 ‘내용과 힘’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내용과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연합은 당연하고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진보정당의 성장과 발전’이라는 전략적 방향에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총선과 대선은 그 성격과 질이 다르다는 점에서 연합 문제에 대한 고민은 심화되어야 한다. 총선은 299명의 의원을 뽑는 선거이고, 대선은 1명의 대선후보를 통해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문제이다. 즉 총선에서는 복수의 지역구 등에서 후보연합을 고려할 수 있는 폭이 열려 있고 또 정당비례 선거에서 자기 정당의 정체성을 선전하고 지지를 호소할 수 있 반면에, 대선에서는 1명의 대선후보에 대한 후보연합은 권력연합(연립정부)과 곧바로 연계되는 것이다. 총선에서는 가치연대, 정책연대, 후보조정 등을 통해 유연하게 연합을 고려할 수 있는 가능성과 여지가 있는 반면 대선에서는 그 폭이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선에서는 후보연합과 권력연합의 문제를 총선에서의 연합보다는 훨씬 엄격하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후보연합의 조건과 상황에 대한 엄격한 해석, 후보연합의 기준과 원칙에 대한 명확한 설정이 그래서 필요하다. 또한 후보연합이 곧 권력연합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권력연합 즉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것은 총선 등에서의 후보연합과 달리 그 정부와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보세력의 집권에서도 국정과 정책의 방향을 둘러싸고 논쟁과 갈등이 심화되고 때로는 조직적 분화까지고 나타났던 역사적 사례가 적지 않았는데, 비(非)진보세력의 권력에 진보세력이 참여하는 것은 정책과 국정 방향에서의 차이와 갈등을 이미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의 권력 참여는 비(非)진보세력의 정치권력에 진보정당이 하위파트너로 참여하면서 정치적으로 포섭되어 갈 퇴행적 길을 걷거나, 권력 참여를 통해 진보정치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에 근거한 길이든 둘 중의 하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선험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정치상황에서 권력참여 노선은 전자의 가능성이 높다.
150여년 전 프랑스 사회당에서의 연립정부 참여를 둘러싼 게드-조레스 논쟁, 1980년대 독일 녹색당의 연립정부 참여 논쟁, 1940년대 영국 노동당의 거국내각 참여 논쟁, 1990년대 이탈리아 재건공산당의 올리브동맹과 연립 참여 논쟁, 가깝게는 1997년 국민승리21에 참여했던 전국연합 세력들의 독자세력화와 정권교체에 대한 태도와 국민승리21에서의 철수 논쟁 등을 구체적 사례로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97년과 그 이전의 민주대연합론과 2011년의 신종 민주대연합론의 차이
“97년은 한국의 진보운동사에서 여러 모로 의미있는 해다. 무엇보다 대선 때마다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며 반목했던 NL과 PD그룹이 최초로 단일한 정치적 실천을 모색했다. PD(진보정치연합)와 NL(전국연합)이 ‘국민승리21’을 결성해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국민후보’로 추대했다. 여기에 96~97년 노동법 저지 투쟁을 통해 노동운동의 대표성을 획득한 민주노총이 결합했다. ‘NL-PD-노동’의 연합이라는 민노당의 기본 골격은 이때 짜여졌다.
그러나 대선이 다가오고 김대중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NL 계열은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방향을 틀었다. 한총련은 97년 10월 지구총련 의장단 회의에서 ‘신한국당 재집권 저지, 정권교체,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대선 방침을 정하고 전국연합에 국민후보 재고방침을 강력히 요구했다.
전국연합은 11월23일 개최된 제6기 2차 대의원대회에서 “전국연합은 지난 6월14일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결정한 ‘독자적 정치세력화와 민주적 정권교체’의 대선 방침 가운데 민주적 정권교체를 위한 노력이 국민승리21에서 실현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며, 국민승리21 후보가 ‘민주적 정권교체와 야권후보 단일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촉구한다”고 결정했다. 사실상 DJ로의 단일화를 촉구한 것이다. 국민승리21의 공동대표이던 이창복 전국연합 상임의장이 DJ 지지선언을 하며 선본을 이탈하는 일도 발생했다.
이와 관련해 국민승리21의 주요 간부 가운데 일부는 김대중, 노무현정부에서 여당 소속 의원이 되거나 고위공직자로 변신하게 된다. 이창복 공동대표는 16대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당선됐다. 유기홍 대변인은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간판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고영구 운영위원은 노무현정부에서 국정원장을 지냈다.”(경향신문 2008년 2월 13일자)
97년 이전의 민주대연합론은 민중의 독자적 정당 자체를 부정하였다. 연대연합을 할 수 있지만 그 독립적인 정치적 구심을 건설하는 것을 회피하거나 부정하였다. 전선조직을 얘기했지만 그것인 국민들에게 대중들에게 보수야당과 구분되는 정치적 독립성을 상징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보수야당과 구분되는 진보야당을 건설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노선이었기에 97년 이전의 민주대연합론에 대해 보수야당 추종주의라는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97년을 매개로 민중진영의 독자적 정당 건설을 부정할 수 없는 흐름이 되었고, 민주노동당은 독립적인 진보야당으로 건설되고 유지되었다. 97년 이후의 시점에서는 독립적인 진보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 등이 어떠한 정치적 판단과 노선을 걸을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이 된 것이다. 우경적 편향을 걸을 수도 있고, 좌경적 편향을 나타낼 수도 있다. 이제는 민주대연합론의 논점이 진보정당 인정 여부에서 진보정당 내부의 노선문제로 전환이 된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97년 이전의 민주대연합의 정치적 표현은 민주당에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입당할 것인가의 문제로 나타났고, 97년 이후에는 독립적인 진보정당이 민주당과 연합하거나 대결할 것인가의 문제로 나타난 것이다. 즉 97년 이전의 민주대연합론과의 논쟁과 투쟁은 정치적으로 서로 분리하여 독립적인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것이었다면 97년 이후의 논쟁과 투쟁은 진보정당 ‘내부’의 노선 투쟁과 갈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핵심은 지금 민주대연합론과의 논점은 분리의 문제가 아니라 노선투쟁의 문제라는 것이다. 97년 이전은 민주대연합론자들이 동의하지도 않았고 참여하지도 않았던 진보정당의 건설이라는 논점이었다면, 이제는 진보정당 내부의 우경적 경향과 어떻게 논쟁하고 싸울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민주대연합 추진 진보정당과 민주대연합 반대 진보정당으로 분화하거나 나뉘는 문제로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이 민주당과의 무조건적 연합론으로 경도되면서 정치적 실리주의를 지향하는 것을 비판할 수 있지만, 민주노동당이 정치적으로 소멸하면서 민주당의 하위파트너로 전락하는 것을 진보정당의 자연스러운 분화이자 정치적 귀결이라고 평론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은 올바르지도 적절하지도 않은 것이다.
소위 권력승계(3대세습) 등 북한 쟁점에 대한 입장
남과 북의 관계는 UN에 동시가입한 ‘국가와 국가’의 관계이면서, 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 규정되어 있듯이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북의 정책과 행동, 주요이슈에 대한 것이 남한 민중의 관심사이기도 하고 정치적 의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일본 중국 미국 국내의 문제가 국제정치의 관심사라면 북한의 문제는 국내정치의 관심사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이슈화와 관심사에도 사안 사건의 성격에 따라 강도와 비중이 달라진다. 북의 핵 개발과 연평도 포격의 경우는 관심사를 넘어서 실제 체감되는 남한 민중들의 삶과도 직결되는 것이고, 북의 권력승계 문제는 중대한 관심사에 해당되는 것이다.
더욱이 반공체제 분단체제 하의 남한 사회에서 진보정당은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대안사회의 상이 북한과 무엇이 다른 것인지, 무엇이 유사한 것인지, 북한과 적대하고 대결해야 하는지, 북한과 협력하고 대화해야 하는지를 대중적으로 밝힐 것을 요구받고 있다. 즉 진보정당의 ‘입장’이 북한 사회, 북한 정책과 관련하여 투명하게 밝힐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진보진영에서는 북한식 사회주의 모델이 - 북한이 사회주의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은 있지만 이것은 별도의 논점으로 정리하자 - 남한 진보정당이 추구하는 국가와 대안사회의 모델이 아니라는 점에는 이견이 거의 없을 것이다. 또한 북한을 적대와 대결의 대상이 아니라 협력과 대화의 대상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점에도 이견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진보정당은 북한 문제에 대한 이러한 일반론적 정리를 넘어서야 한다. 왜냐면 정치와 운동을 항상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한 민중들에게 관심의 대상이기도 하고, 정치세력으로서 자기 입장을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내야 하는 북한의 정책과 사건에 대한 최소한의 자기 정리가 필요하며, 그 핵심은 북의 핵 실험과 핵 무장, 소위 3대세습으로 표현되는 권력승계의 문제에 대한 진보정당으로서의 자기입장이 필요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북한 문제는 남한과 직접 부딪치고 연계되는 사건이 아닌 경우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거꾸로 생각해보면 북한 정부도 남한 정부의 정책, 남한 사회의 정치사회적 의제, 남한 정부의 성격에 대해서도 논평하거나 입장을 밝히는 경우가 많고 심할 경우는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전혀 없다.
더욱이 ‘우리 민족끼리 통일하자’고 하면서 우리 민족 내부의 이슈와 의제에 대해 자기 입장을 가지지 않는 진보정당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미달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북한을 부정하거나 적대하는 것이 아닌 공존과 대화의 대상이라는 기본 입장을 견지하는 속에서 진보정당의 입장정리이고 태도가 되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만 있지 않다. 북한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회피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지만 북한 쟁점과 문제에 대해서 세력간의 입장 차이가 분명히 있는 상황에서 어느 일방적 입장으로 정리하는 것이 단결과 통합의 전제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동의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패권주의이고 폭력일 수 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북한 쟁점에 대한 남한 진보정당의 최소한의 자기입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추상적이고 일반론적 정리는 되어 있다는 점에서, 남한 국민들에게 관심이 되고 있는 북의 핵문제와 권력승계에 대한 남한의 자주적인 진보정당은 어떤 입장인지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
최근 인터넷언론에 기고한 진보신당의 대표적인 좌파 이론가의 긴 글에서 연립정부 등 권력에 대한 태도 문제가 새로운 진보정당의 진로와 전망에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주장을 들었다. 그런데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글에서 새로운 진보정당의 건설 진로 전망에서 북한 쟁점에 대한 것이 결정적이고 사활적인 것이라는 주장과 언급을 단 한 구절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우연인가? 아니면 그의 이성적인 태도인가? 궁금할 뿐이다.
새진보당의 시대정신과 좌파블럭
진보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의 필요성과 현실성에 대해 공감을 하지만 그것이 과거지향적이 아닌 미래지향적인 재편이 되기 위해서는 진보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드러내야 한다는 지적을 많이 한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러저러한 현실적 불가피성을 이유로 새진보당 건설을 제시하는 것은 이성적인 동의를 얻을지언정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과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한다고 지적한다.
두 가지 측면을 분리하여 봐야 한다. 새로운 진보정당의 가치라는 점에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가치를 발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 진보신당의 생태/평화/평등/연대의 가치가 낡은 것인가? 민주노동당의 자주/평등,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이라는 지향과 가치가 낡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 중에서 어떤 가치에 정세의 중심과 비중을 둘 것인지는 논의할 수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새로운 가치개념을 발명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진보정당 내에서 이러한 가치들을 실천적으로 집약한 이념과 노선이 생태주의/ 여성주의/ 사회주의(사민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분단체제라는 한반도의 특수성 속에서 민족문제와 평화의 문제가 그 못지않은 비중을 가지게 된다.
새진보당 내의 좌파블럭이라는 것은 반NL이라는 ‘반대그룹’의 성격을 가져서는 안된다. 이것은 누구나 공유하는 것이다. 블록이든 그룹이든 정파이든 당 내의 동질적인 정책그룹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무엇에 대한 공통의 지향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녹색사회주의 혹은 여성주의, 혹은 녹색주의라는 이념적, 노선적 동질성에 근거한 정책그룹을 만드는 것이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화된 진보정당의 정책그룹들이 협력하기도 하고 연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경쟁하기도 해야 한다. 이러한 녹색/여성/사회주의라는 지향과 가치들이 하나의 총체적 담론으로 정리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동질적인 정책그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좌파블럭은 하나일 수도 있고, 복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진보신당을 함께 해오고 실천해왔던 그룹이라고 하여 동질적이지는 않다.
그러기에 진보신당 출신의 정책그룹이 하나일 필요도 없으며, 복수라고 하여 힘이 약화되거나 또 다른 패권주의적 경향에 질식당할 것을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복수라고 하더라도 사안과 성격에 따라 협력할 수도 있으며, 일상의 시기에는 자신의 정체성에 근거하여 다양한 실천사업과 조직사업, 정책사업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두게 될 것이다.
안으로는 이러한 담론과 정책 지향들이 하나의 진보정당 속에서 공존하면서 서로 정책경쟁을 하면서 견제하기도 하고, 서로의 빈 지점을 채워주는 지원 역할을 하는 조직문화의 정당,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 진보정당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의 패권주의, 정파갈등의 악무한이라는 아픈 상처와 과거를 치유하는 것은 그런 퇴행적 모습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결의와 공감대, 그런 퇴행을 방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 등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몇 가지 조치와 방책을 넘어서 진보정당의 현대화, 차이의 공존과 정책 경쟁이 이뤄지는 ‘현대화되고 이성이 지배’하는 진보정당론에 대한 공감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밖으로는 새진보당이 만들고자 하는 대안사회의 상, 이념적 범주가 아니라 어떠한 대안사회로 대한민국의 개조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과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없었던 것이 아니다. 과거 분당 이전의 진보정치연구소에서는 <사회국가 : 대한민국 재설계도>라는 것으로 사회개조의 방향을 제기했다. 이것은 유시민씨의 소위 <사회투자국가>에 대한 대항담론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이러한 기조와는 달리 <복지국가>담론으로 대안사회의 상을 제시하는 그룹이 나타나고, 이러한 국가담론을 매개로, 민주당 내의, 혹은 민주당과의 정치적 합작을 추진하는 흐름이 나타나기도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복지국가 담론이 새진보당이 제시하는 한국사회 개조론이 될 수 없다. 새진보당은 <노동 존중과 시민 주체의 평화국가>라는 방향에서 대한민국 개조론의 담론을 설정해야 하고, 이것이 사회국가 문제의식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본다.
그리고 남은 것들
남은 것들이 또 몇 가지 있다. 그것은 조금 미루고 필요할 때 논의를 이어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