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도 보지 마.
엄마 못보고 산지가 30년이 넘었네. 생각해보니까 내가 그 나이더라구. 엄마 가버린 나이. 나 스무살 때. 그땐 왜 그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나몰라. 쉰둘인데. 쉰둘일 뿐인데...
그냥 엄마 많이 아프니까, 아부지 뵈기 싫어 죽겠는데 자꾸 집에 와서 있으라 하니까, 졸려 죽겠는데 새벽기도 가라 하니까, 복수찬 데 돌미나리가 좋다고 한겨울에 그거 뜯어오라 그러니까, 병원 갈 돈도 없는 집구석이니까, 갈거면 빨랑 가라고 생각한 적, 솔직히 많았어. 그게 젤 걸리고.
엄마 임종 못 본 거 다행이라고 생각해. 새끼들은 죄다 이기적이니까. 이왕 안 볼 거면 염하는 것도 안 봐야 했는데 그지같은 외삼촌이 억지로 끌고가서 봐 버렸네. 복어처럼 땡땡해선 시퍼런 심줄이 미나리처럼 돋아났던 배가 시커멓게 푹 꺼졌더라구. 난 그게 다 아부지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엄마 뱃속으로 낳지도 않은 언니들 키우면서 쌓인 스트레스거나. 엄마 속이 그렇게 썩어 문드러진 게 나 때문이란 생각 끝까지 안하려 했지.
엄마. 엄마두 그거 알았어? 엄마를 자전거 뒤에 싣고 다니는 걸 내가 참 좋아한 거. 평생 40kg이 안 넘어 바람에 날릴까 한손으로 등을 받쳐야 했던 우리 엄마.
그냥 그렇게 달려서 도망가고 싶었다. 어디든. 그걸 할 수 없었던 나는 번번이 엇나가 홀로 탄 자전거를 하염없이 굴려 갈 수 없는 길까지 가곤 했다. 열다섯살 때. 꽤 멀리 갔었다. 안 돌아가려 했으니까.
근데 엄마가 보고 싶더라.
내가 자전거 안 태워주면 그 무거운 짐을 들고 혼자 시장에서 돌아올 엄마. 산을 내려와 긴 외출에서 돌아오던 그 노을 서럽던 저녁. 장날이었던가 봐. 오가는 사람이 제법 많았던 먼지나던 신작로. 집 언저리쯤에서 눈으로 엄마를 찾는데 엄마보다 먼저 본 게 저만치에서 툭하고 떨어지던 주황색 나이롱 바가지였어. 흩어지던 콩나물. 콩나물 위에 떨어지던 눈물.
부산 와서 첫월급. 그 눈물나는 돈을 받아 엄마 쉐타 사고 법랑냄비 사니까 없더라. 그걸로 내가 지은 죄 갚았다고 생각했어. 다. 엄마 유품 정리하는데 그딴 게 구석구석에서 나오대. 쉐타는 반다지에서, 냄비는 선반 위에서 박스 채로, 중학교 때 신문배달해서 사준 털신은 농안에서...
왜 그딴 걸 하나도 안쓰고 죽었냐. 이누무 이상한 엄마야.
정신 놓았다가도 진수, 진수 부르며 눈을 뜨려 기를 쓰던 진수도 갔다. 진수는 니가 좀 거둬줘라. 나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내가 그 새낄 어떻게 거두냐. 엄마 찾아 갔으니까 엄마가 거둬.
첫 징역 살때 큰언니가 면회를 왔더라. 외포리에서 그 먼길을 오면서 멀미를 으찌 했는지 입술까지 하얘. 제대로 말도 못하고 허리 펴고 서 있지도 못하고 면회시간이 끝났는데 가면서 그러대. "그르니 엄마가 일찍 죽길 을마나 다행이냐"...그런 말은 박혀. 잘 빠지지도 않고.
그러고보니 살면서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날보다 엄마가 없어서 참 다행이다 싶은 날이 더 많았네.
근데두 엄마. 보고 싶을 때가 있어. 한번만, 잠깐만이라도, 안 되면 먼발치에서라도 봤으면 좋겠다 싶은 날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