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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정부만도 못한 반MB 경제정책*

[칼럼] 금리인상, 환율인하...긴축정책이 과연 진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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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축정책이 과연 진보인가?

1930년대 대공황 이래 최대의 경제위기라던 2007/2009년 위기는 2010년을 전환점으로 해서 산업순환상 새로운 회복국면으로 들어선 것 같다. 그러나 위기 후에도 신자유주의의 지배가 지속되는 상황이어서 저성장-저고용-금융투기-금융위기라는 신자유주의에 고유한 금융지배와 금융위기 메커니즘은 앞으로도 계속 작동될 것이다. 경제위기에 대한 국가개입은 세간의 기대와 달리 신자유주의의 재편 또는 재건을 가져왔고, 따라서 자본주의 세계는 신자유주의의 구조위기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순환상 회복국면으로의 전환을 배경으로 경제정책의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즉, 물가안정이냐 성장이냐,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금리와 환율정책에 대해 정부와 시민단체 그리고 정치권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위기 시의 성장 및 확장정책의 기조를 여전히 유지하고자 하는 바, 이를 위해 금리인상을 주저하고 환율하락(원화강세)을 억제하고자 한다. 투자유도와 수출증대를 통해 성장과 고용증대를 도모하겠다는 정책이다. 이에 반해 경제개혁연대의 김상조 교수는 성장 및 확장정책이 인플레를 가져올 것이라며 금리인상과 환율하락을 통해 물가를 잡아야 한다고 긴축정책을 주장한다. 경제회복과 함께 세계적으로 석유, 곡물, 광물자원의 가격등귀가 우려스러운 상황에서 물가를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는 반MB 정당들에서도, 개혁적인 인터넷 매체에서도, 또 민간경제연구소에서도 나오고 있다. 이렇게 신자유주의 독재권력이라는 MB정부와 개혁적인 또는 진보적인(?) 반MB 연합의 논쟁이라는 대립구도가 각인되면서 긴축정책이 대중을 위한 진보적인 경제정책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그러나 이런 대립구도는 신자유주의와 진보적 경제정책의 대립관계를 왜곡하는 잘못된 논쟁구도다. 우선 경제사상적으로 보면, 확장정책(케인스주의 정책)이 긴축정책(신자유주의 정책)보다는 진보적인 정책이다. 긴축정책은 전형적인 보수적 정책이다. 따라서 반MB 긴축정책보다는 MB정부의 확장정책이 보다 진보적인 것이며, 또한 경제위기 후 경제회복 기조를 안착시키는데 보다 합당한 정책이라 할 것이다. 긴축과 물가안정, 이를 통한 성장과 고용의 희생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이며, 이런 점에서 여론상의 논쟁구도와는 달리 실제로는 반MB연합이 신자유주의를 대변하고 있다.

그런데 MB정부의 확장정책이 과연 케인스주의 정책인가, 이런 질문이 당연히 제기된다. 물론 MB정부의 확장정책을 결코 케인스주의 정책이라 할 수는 없다. MB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는 분명 신자유주의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그 교리와 달리 현실정책에서는 불가피하게 케인스주의의 요소도 포괄한다. 왜냐하면 긴축과 탈조절이라는 신자유주의의 교리는 현실에서 그대로 적용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945년 이래 현대자본주의는 국가의 경제개입 없이는 더 이상 자기 발로 살아갈 수가 없다. 경제로부터의 국가의 축출은 불가피하게 자본주의 조절의 위기와 파국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름아닌 1930년대 대공황의 교훈이었고, 그 이래 국가의 전면적인 경제개입은 자본주의 존립의 불가결한 조건이 되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교리에 현혹되어 신자유주의가 시장으로부터 국가를 축출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신자유주의 하에서도 국가개입주의는 폐지되지 않았다. 국가개입주의는 다만 형태와 내용이 변화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케인스주의로부터 신자유주의로 국가개입주의(국가독점자본주의)의 변종이 바뀌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가 한편에서는 긴축과 탈조절을 주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강력한 개입주의를 실천한다는 점에서 이 사상과 정책은 극도로 모순적인 것이다. 이 모순은 기본적으로 현대자본주의 하에서 국가개입을 폐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폐지를 최적균형의 조건으로서 상정한 이론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모순을 이해하면 신자유주의 정권이 현실의 경제정책에서 케인스주의 요소를 포함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이번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국가들은 막대한 재정자금을 투입하였다. 그 때문에 몇몇 국가들은 심각한 채무위기에 몰릴 정도였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귀환과 케인스주의의 복귀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 신자유주의 정권의 대명사이었던 미국의 레이건 정부도 1980년대 기록적인 재정적자를 가져왔었다. 무엇보다 막대한 군사비 지출을 통한 군수수요의 창출 때문이었는데, 이를 종종 군사적 케인스주의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케인스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의 구성요소이며, 신자유주의 이론과 정책의 모순의 표현이다.

MB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잘못된 비판

케인스주의와 신자유주의는 국가개입주의인가 아닌가, 또 확장정책인가 아닌가로 구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구별은 다만 이데올로기적 기만일 뿐이다. 실제로는 국가개입주의의 목표와 내용이 무엇인가가 양자의 차이를 결정한다. 케인스주의는 국가개입주의와 확장정책을 독점자본에 대한 규제와 통제, 그리고 소득재분배 및 사회보장 확대 등 노동자계급 조건의 개선과 결합시키고자 한다. 반면 신자유주의는 국가개입주의와 긴축정책을 독점자본의 이윤보장과, 사회보장 해체 그리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과 결합시킨다. 이런 목적에 유효하다면 신자유주의는 물론 국가개입주의의 해체와 확장정책도 추구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그렇게 모순적인 정책이지만, 반노동/친독점이라는 일관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논란 중인 4대강 사업을 비롯해서 성장과 일자리를 위한 MB정부의 확장정책도 케인스주의 정책은 아니고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자본주의 경제의 현실적인 위기에 직면하여 긴축과 탈조절이라는 신자유주의 교리에 따라 정책을 실행할 수는 없다는 이 사상과 이론의 모순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이런 정책은 현실의 객관적 요구에 직면하여 불가피하게 신자유주의 교리를 이탈한 것이지만, 반노동/친독점이라는 신자유주의의 일관된 목적에 종속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책은 신자유주의 교리를 교조적, 급진적으로 주장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이고 온건한 정책이다. 따라서 현 경제정세에서 긴축정책을 요구하는 반MB연합보다는 확장정책을 고집하는 MB정부의 경제정책이 보다 현실적인 정책이라 할 것이다.

또한 MB정부의 경제정책에 ‘토건국가’와 ‘삽질’이라는 딱지를 붙여 무언가 박정희 시대의 개발정책과 독재정권의 계승자라는 이미지를 교묘하게 연상시키는 시민단체들의 비판도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개발독재의 케인스주의와 MB정부의 신자유주의 독재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경제정책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사상적으로 개발독재의 케인스주의가 시민단체들의 신자유주의 정책보다는 그래도 진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현재의 경제정책 논쟁에서 MB정부와 반MB연합 간의 ‘보수 대 개혁’ 또는 ‘보수 대 진보’라는 논쟁 구도는 사실관계를 심하게 왜곡하고 있다.

보수파-자유주의파-진보파의 정치구도 속에서 자유주의적 시민사회단체를 이렇게 공격하면 좌파가 보수파와 합작해서 민주주의를 퇴행시킨다는 비난이 제기되곤 한다. 일종의 흑색선전이라고 할 이런 비난이 나로서는 사실 한 두 번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로 우향우한 한겨레’(월간 <말>, 2001. 1)라는 내 글에 대한 김동민 교수와 강준만 교수의 반박이 그러했다. 이런 비난은 진보파의 반(反)신자유주의 정치를 견제하고 진보파를 자유주의파로 견인하려는 얄팍한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안티조선’ 운동을 선동했던 김동민 교수, 이 사람은 조선일보에 투고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다른 사람을 공격하면서 정작 자신은 노무현 정부의 권력을 등에 업고 SBS 사외이사로 가지 않았나? 조선일보는 안 되는데 SBS는 괜찮다는 게 언론개혁운동이라면, 나는 이런 운동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결국 시민단체와 자유주의 권력 간의 커넥션을 수호하기 위해 이런 종류의 악성 비난을 퍼부었다고 생각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보다 신중하게 말한다면, 반MB 시민단체가 MB정부보다 더 신자유주의적이라는 건 아니다. MB정부가 더 진보적이어서 확장정책을 쓰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양자는 모두 신자유주의 정책의 기조를 공유한다. 차이가 있다면, MB정부는 경제정책을 현실적으로 담당하고 있어 현실의 경제위기와 대중들의 경제적 상태를 어떻게든 정치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반면(그래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교조적으로 집행하기가 어렵다), 경제개혁연대 같은 시민단체는 이런 책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신자유주의 교리에 보다 충실하게 비판할 수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재벌의 소유 및 경제력 집중에 대항해서 전투적으로 논쟁하는 진보적인(?) 경제개혁연대나 참여연대를 정말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자본의 담합과 인수합병 그에 따른 집중과 계열지배, 요컨대 독점지배에 의한 경쟁의 왜곡을 비판하며 경쟁정책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정책의 하나의 핵심요소다. 독일 신자유주의, 이른바 사회적 시장경제론에서 경쟁정책의 지위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반독점정책은 제도화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반독점정책으로 과연 경쟁질서를 확립했는가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현실을 보면 20세기 이래 독점자본의 지배구조가 강화되어왔다는 것이다. 요컨대 반독점정책은 자본주의의 독점화 경향을 극복하기는커녕 완화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반독점정책이 일종의 기만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참여연대가 권력에 들어가면 재벌구조를 철폐하고 경쟁질서를 확립할까? 단언컨대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다름아닌 독점자본주의 100년의 역사가 이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독점자본의 사회화

반독점정책으로 재벌을 극복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독점화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이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의 경제학자들 같은 신자유주의자들과는 달리 맑스주의 좌파는 독점자본의 사회화를 요구한다. 거대하게 발전한 독점자본을 경쟁자본으로 분할하는 게 아니라 거대독점자본을 국가와 사회의 소유로 전환하고 통제하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에 조응하는, 진정으로 독점자본을 극복하는 길이다. 재벌그룹을 경쟁자본으로 분할하는 것(이른바 재벌해체론)은 겉으로 보기에 독점지배에 대한 대안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을 증대시켜 자본주의 위기를 심화시킨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대자본들이 독점담합으로 나간 이유는 바로 독점에 의한 시장지배를 통해 이런 무정부성의 위험을 회피하고 높은 이윤을 획득하기 위함이었다. 경쟁질서를 확립하겠다는 것은 자본주의 역사를 뒤집어놓겠다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망상의 표현이고, 대중을 기만하고 호도하는 이데올로기다. 유감스럽게도 진보진영 내에서도 독립적인 대기업으로 재벌을 해체하여 경쟁체제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진보진영의 이런 대안은 시민단체의 신자유주의와 달리 (독립적인 개별 대기업의) 소유와 통제의 사회화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시장경쟁을 통한 조절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발전에 역행하는 무정부적이고 위험한 대안이라 할 것이다.

현재 세계적인 인플레의 직접적인 원인은 금융위기를 신자유주의 재건의 방식으로 극복한 후유증 때문이다. 금융자본의 회생을 위한 막대한 유동성 공급과 공적자금 투입, 그에 따른 적자재정이 인플레가 심화되는 배경이다. 금융자본의 사적 손실처리를 강제했다면, 유동성 공급과 공적자금 투입은 최소화되었을 것이고, 확장정책의 인플레 효과는 크게 경감되었을 것이다. 또 다른 인플레 요인은 한편에서 독점가격의 지배와, 다른 한편에서 경제회복 국면에 벌어지는 식량, 에너지, 자원 등의 공급제한과 그에 따른 국제투기에 있다. 따라서 인플레 대책도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단순한 긴축정책과 금리인상/환율인하가 될 수 없다. 이런 정책으로는 인플레도 못 잡고 경제회복만 위협할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 인플레의 복합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인플레를 잡기 위해서는 복합적인 원인들에 대응해서 다면적인 대응책이 요구된다.

우선 경제회복을 위해서는 확장정책의 지속이 필요하다. 문제는 세계적인 구조위기와 금융시장의 지배 하에서 확장정책은 투자의 활성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인플레의 확산만 가져올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위험을 막기 위해서는 한편에서 금융시장의 지배를 제한 또는 청산해서 금융부문의 과잉화폐/과잉자본을 강제적으로 감가해야 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이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투자를 확대할 수 있도록 독점자본과 은행에 대한 사회화 프로그램의 도입이 불가결하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진보적인 좌파의 대안이다. 이 대안은 위에서 거론한 인플레의 세 가지 원인을 척결하는 매우 효과적인 대책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에만 확장정책은 스태그플레이션의 우려를 불식하고 안정적인 성장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MB정부의 확장정책이 성장과 고용의 증대를 가져오기 어렵고 인플레 논쟁에 휩싸이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확장정책이 성공할 수 있는 정책적 조건을 갖출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MB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이와 같은 사회화 프로그램의 부정 위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은 반MB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다만 신자유주의 긴축을 교조적으로 주장하는 반MB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MB정부만도 못하다는 비판이 추가되어야 한다.

* 이 칼럼의 원래 제목은 “MB정부만도 못한 참여연대 경제정책”이었다. 제목과 함께 내용도 상응하게 수정하였다. 수정 이유는 참여연대의 이의제기 때문이다. 환율·금리 논쟁에서 경제개혁연대의 김상조 교수의 입장을 참여연대의 입장으로 비판한 것이 문제였다. 참여연대의 경제개혁센터는 2006년 경제개혁연대라는 이름으로 참여연대에서 분리하였으므로 두 단체를 동일단체로 상정하여 비판한 것은 필자의 불찰이었다. 따라서 정정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원래 칼럼의 취지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경제개혁연대가 참여연대로부터 분리되었어도 경제개혁연대는 참여연대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지금도 참여연대는 소액주주운동을 비롯해서 신자유주의 재벌개혁의 관점에서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