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철거민 투쟁의 상징처럼 남은 이 한 장의 이미지. ‘파견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하게 현장에 착근하는 판화가 이윤엽의 작품이다. 이 이미지가 없었다면 철거민들의 절박한 외침이 그렇게 멀리까지 가닿을 수 있었을까. 그날의 참사가 3년 가까이 잊히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었을까. 쉽사리 가정하고 결론내릴 수 없지만, 의문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지난 6일,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판화가 이윤엽의 작업실을 찾았다. 평택 대추리, 용산 철거민 투쟁을 함께하고 언젠가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현장’에 스며들어 자신의 판화에 현장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롯이 담아내는 그.
작가 이윤엽이 그렇게도 열심히 현장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지, 현장에서는 무엇을 보고 느끼는지, 그에게 예술은 무엇인지 물었다. “민중미술이 싫어서 그림을 그만두게 됐다”는 그는 이제 판화를 통해 “‘진짜 민중미술’을” 그것도 “제대로 해 보고 싶다” 말했다.
▲ 이윤엽 판화가의 작업실 |
이원재(원재)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이윤엽(윤엽) 예술하면서 지냈지 뭐.
원재 요즘 관심 있는 건 뭐예요?
윤엽 관심사 없는데. 진짜 관심이 없어.
원재 진짜 인터뷰 비협조적이야. 그럼 하고 있는 작업은 있어요?
윤엽 아, 다음 달에 일본에서 전시하기로 했어요. 오키나와에 ‘사키마미술관’이라고 있대요. 거기서 전시하자고 해서 준비하고 있어요.
원재 새 작업으로 하세요?
윤엽 미쳤어요. 새 작업으로 어떻게 해.(웃음) 그쪽 사람들이 여기 와서 작품 보고 있는 걸로 하기로 했지. 그래도 다시 찍어야 하고 준비해야 하니까.
원재 전시는 언제에요?
윤엽 5월 11일부터요.
원재 무슨 연예오락프로그램 같네. 전시를 앞두고 출연하는.
윤엽 하하하.
▲ 판화가 이윤엽 |
“다른 사람도 나처럼 행복해야 해.
그게 내가 파견미술 하는 이유야”
원재 대추리, 용산 이후 주로 작업했던 작가들이 ‘파견미술’이라는 용어를 계속 쓰잖아요. 그 표현은 언제부터 썼어요?
윤엽 용산 끝나고 나서 썼을 걸요.
원재 왜 그 용어를 계속 쓰는 거예요? 그 단어가 마음에 들어요?
윤엽 자조적인 의미가 있는데, 사실 예술가들이 비정규직보다 더 힘들어요. ‘선생님’ 소리만 듣다 뿐이지 굉장히 힘들어. 근데 어느 날 GM대우 노동자들하고 얘기하는데 그들이 비정규직 중에 최고 더러운 게 파견노동자래. 그래서 ‘우리는 그럼 파견미술가쯤 하면 되겠다’ 해서 그렇게 된 거죠.
원재 대추리와 용산은 사회적으로도 이슈였지만 말씀한 파견미술팀에도 중요한 계기였을 텐데, 지금 돌이켜봤을 때 이윤엽에게 그 많은 시간과 관계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어요?
윤엽 대추리 때만 해도 잘 못 느꼈는데 용산을 거치면서 예술이 갖고 있는 힘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느꼈지. 얼마 전에도 한겨울에 추웠을 때 대우노동자들이 탑에 올라갔잖아요. 거기 가서 노동자들 자고 있을 때 천막에 솜이불처럼 문양을 그려줬는데, 돌아오면서 이 사람들이 깨어나서 자기들이 덮고 자던 포장들에 솜이불처럼 모양이 그려져 있는 걸 보면 실제로 솜이불은 아니지만 솜이불보다 훨씬 훌륭하게 느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현장에 와서 이들도 외롭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확실히 잡혔고요. 거기에 돌아오는 뿌듯함이 있어요. 그런 느낌들이 굉장히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든요. 그 이상 다른 생각은 안했던 거 같아.
원재 파견미술 하면서 제일 힘든 건 뭐예요?
윤엽 현장에 갔을 때가 제일 어렵죠. 그 앞에 서서 어떻게 해야지 상상할 때. 기본적으로 뽀다구 나게 해야 하는데 돈이 없는 한계가 있고. 일을 막상 시작하면 힘든 건 없어요.
▲ 이원재 문화연대 활동가 |
원재 예술가들 중에서도 특히 파견미술 팀은 한국에서 현실 참여적이고 진보적인 활동을 하잖아요. 그런데 왜 예술가 관련 정책이나 제도개혁 관련한 의제는 안 다뤄요?
윤엽 관심이 없지.
원재 작가들은 비정규직 파견노동자 임금도 안 되는 돈으로 생존하면서 자기들 생계에는 관심이 없어요?
윤엽 나쁜 대답일 수도 있는데, 행복해서 관심이 없어요. 예술가들이 행복하지 않은 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행복하지 않은 예술가들이 너무 많아요. 잘 먹고 사는 예술가들도 있어요. 큰 마켓은 잘살고 작은 마켓 망해가는 것처럼 예술가들도 똑같아요. 근데 내가 먹고 살라고 자본의 논리 안에 들어가려니까 힘든 거거든. 예술가들은 꿍꿍이속에서 상상하고 생각하고 이런 거에 행복해할 줄 알아야 해요. 그래야 의미 있다고 생각해.
나는 ‘풀이 났네, 아 좋다’ ‘다음에 뭐하지’ 이런 생각들을 하는 게 행복해요. 다른 사람들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서 파견을 나가는 거예요. 현장에서 힘든 게 있다면, 나는 행복한데 현장은 힘드니까 그런 괴리들이 생겨서 힘든 거고. 누군가 발언 좀 하라고 얘기할 때 발언을 안 하는 가장 큰 이유도, 나는 언제나 마이크를 들면 제일 먼저 ‘여기서 이러지 말고 시골로 가세요’ 이러고 싶어요. 어쩌면 세상은 다 예술가처럼 살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지. 왜 그렇게 안 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민중미술이 싫었어.
근데 내가 그리기만 하면 민중미술이 되는 거야”
원재 미대 들어가기 전부터 극장 간판 일을 하셨잖아요. 전부터 그림이 그리고 싶어서 했던 거예요? 아님 생업이나 노동 개념으로 했던 건가?
윤엽 학교 다닐 때 내가 공부를 못했어요. 미래에 대한 생각은 안 하고 놀기만 하다 고등학교를 딱 졸업했는데, 할 게 없으니 앞이 깜깜하잖아. 그러다 어느 날 중앙극장에서 ‘킹콩’을 리바이벌해서 보여주는 거야. 어렸을 때 아버지가 킹콩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그때 재밌게 본 기억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우연히 보러 갔다가 화장실에 갔는데 밑에 ‘뺑키통’이 보이대. ‘저게 뭐지?’ 하고 그거 따라서 쭉 들어갔더니 이런 큰 공간에서 극장 간판을 그리고 있더라고요. 되게 멋있대. ‘와 멋있다’ 하고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서 ‘저 여기서 일 좀 하면 안될까요’ 해서, 그때 시작했지.
▲ 물고기 영정 |
윤엽 그 전이지.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 잘 그린다, 뭐 잘 만든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그림은 남들보다 잘 그리는 줄 알고 관심 가졌죠.
원재 판화 처음 시작한 게 1996년도 맞죠? 첫 목판 작업이 민족예술 표지로도 쓰였던 ‘산드래미 최씨’던데.
윤엽 오. 그건 어디서 찾았어요? 인터뷰할 맛 나네.
원재 그 전에는 그림 그렸을 거 아니에요. 학교 다닐 때 걸개그림도 많이 그리지 않았어요? 근데 왜 판화를 하게 됐어요?
윤엽 그림 되게 잘 그리고 싶었지.
원재 잘 그리셨잖아요.
윤엽 아니 그러니까, 얘기를 하자면 긴데… 엄청 길어져도 괜찮아?
원재 괜찮아요. 제가 정리할 거 아니니까.(웃음)
윤엽 난 그림을 되게 잘 그리고 싶었어요. 근데 그림만 그리면 민중미술이 됐어요. 내가 민중미술을 좋아했으면 모르겠는데 민중미술을 싫어했거든. 나랑 친한 선배들이 하는 민중미술 전시를 가서 보면 극장 간판 그리는 사람보다 못 그리는 것 같고, 그들의 캠퍼스 안에 ‘민중’이 내가 노가다 하면서 보는 민중과 되게 달랐어요. 그게 꼴 보기 싫었어. 근데 내가 그림만 그리면 그 싫은 그림이 되는 거야. 그래서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못 그렸었어요.
민중미술 비판하는 사람들 말처럼 예술이 너무 직접적이면 안 되는데 너무 직접적이라는 느낌도 있었어요. 그러다 대학 졸업할 즈음에 목판화라는 걸 알았는데 목판화라는 게 중간에 나무라는 게 있어서 같은 농사꾼을 그리더라도, 팔뚝에 힘줄을 그려도 나무가 중간에서 좀 순화를 시켜줘요. 굉장히 새로웠지. 그림만 그리면 되는 게 아니라 나무도 잘라야 되고 깎아야 되는 과정 자체도 나랑 맞았고. 그래서 목판화를 하게 됐지.
▲ 작업실 내부 |
근데 목판화를 재밌어서 좀 하니까 오윤 같다, 이철수 같다, ‘산드래미 최씨’ 같은 경우에는 정원철이랑 비슷하다, 이런 얘기가 들리잖아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누구지?’ 하고 찾아들어 가보니까 그들이 너무 잘하잖아. 그래서 ‘아, 나는 재주가 없는 거 같다’ 그러고 한동안 또 목판화를 안 했었어요. 진짜 안했지. 포기하고 찻집 했었어요. 찻집 하면서 취미로 판화하고 개량한복 입고 차 주면 괜찮잖아.
원재 그런데 어떻게 다시 하게 됐어요?
윤엽 2002년도에 찻집하고 있는데 우연히 누가 개인전을 빵꾸 냈다고, 사장님이 전시 한번 하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전시를 했었어요. 아무도 안 봤지. 근데 벽에다 내 그림 걸어놓고 내가 뻑 간 거야. 사람들 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예술가들은 자기 얘기가 있고 자기 철학을 그림에 담아야 하고 세상에 얘기해야 하고. 근데 나 같은 경우 자기 얘기가 없었어요. 그래서 내 그림이 안 나온다고 생각하고 그만뒀던 거거든. 근데 내가 그린 그림을 쭉 보니까 그래도 ‘내 게’ 있는 거 같은 거예요. 희망을 얻은 거지. 그래서 ‘나 이제 작가해야지’ 하고 바로 찻집 정리하고 동탄으로 갔어요. 실제로 작업을 하기 시작한 건 2002년도. 월드컵 때문에 기억이 나요. 사람들이 월드컵 때문에 아우성 칠 때 난 작업실 짓느라 존나 바빴다고.
원재 좀 전에 민중미술이 너무 사실적이라고 했잖아요. 그럼에도 계속 민중미술을 했고, 심지어 판화는 프레임이라는 물리적 제한이 있어서 전시공간 안에서조차 변주하기 쉽지 않잖아요? 개념미술보다 제약이 많을 텐데.
윤엽 맞아요. 판화는 굉장히 단순하고 무식해요. 사실 너무 뻔하지. 나무에 잉크를 바르고 종이를 찍고 끝나. 이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장난칠 게 없는 거지. 그래서 판화 같은 경우 아우라라든가, 작가적 상상력이라든가, 작품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상상력의 폭이 굉장히 작아요. 많은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판화를 안 할 수 있어요. 근데 나에게는 오히려 그게 매력으로 다가와요. 그래서 이게 하면 할수록 할 게 많거든요. 하고 싶은 것도 더 많고. 그리고 일단 내가 한 작업 중에 ‘아 이거다’라는 작업이 없어요. 그래서 계속 하게 돼는 거고.
▲ 판화 '쓰러지는 사람' |
원재 나무라는 필터링 과정이 하나 더 있더라도 판화는 어쨌든 형식적으로, 선배가 하기 싫었다는 민중미술과 마찬가지로 리얼리즘적이에요.
윤엽 나는 80년대 민중미술이 좀 관념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지금 이만큼 거리를 두고 보면 그래서 내가 그걸 싫어했던 것 같아. 근데 그때는 그게 필요했어요. 미술사를 놓고 보면 그게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다고. 그전의 그림들을 보면 모더니즘이라고 해서, 점 하나 찍고 이런 것들이 개판을 쳤었어요. 근데 민중미술, 리얼리티라는 걸 학교에서 가르쳐줬을 리도 없고 각개전투로 해서 끌고 나온 거잖아요. 그런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조였지. 그때는 그게 그렇게 존재했지만, 나는 지금 정말 리얼리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원재 진짜 리얼리티?
윤엽 내가 생각하기에 민중은, 기본적으로 재수가 없어. 나쁜 놈들이 많아. 내가 나이 4, 50 된 사람이랑 같이 노가다를 다녔는데 그 사람은 실제로 게으르고 농땡이 피워. 근데 민중미술을 그리는 데 가보면 그 사람이 영웅이 되어 있어요. 내 생각으로는 그런 사람은 그렇게 꾸미고 미화하지 않아도, 실제 그대로 그려도 사실은 아름다워요. 나쁜 놈을 나쁘다고, 천박한 사람을 천박하다고 얘기해도 아름답다는 거야. 내가 지금도 못하고, 하고 싶은 건 그렇게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원재 그럼 지금 사람들이 이윤엽에게 민중미술가라고 하면 동의할 수 있어요?
윤엽 그럼요.
“‘진짜 민중미술’을 하고 싶어.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있을 거 같아”
원재 요즘처럼 답답한 세상에 작가 이윤엽은 어떤 사회, 어떤 변화를 상상하고 계신지요.
윤엽 꿈꾸는 사회… 그런 건 없어요. 용산이라고 그러면, 재개발 정책이 어때야 한다거나 철거민 없어지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거나 그런 생각까지는 안 가요. 나는 나에 집착해요. 용산, 대추리, 어느 현장을 가든지 그건 나와 상관있기 때문이에요. 내 역사와 상관있기 때문인 거고. 스물 몇 살 까지 나는 철거민이었어요. 우리 어머니도 노상장사에 쫓겨 다니고 그랬었고. 정말 그렇게 살았었어요.
예술이라는 게, 정말 진솔하거나 솔직하다면 자기 얘기밖에 할 수가 없는 거 같아요. 내가 삽을 들고 걸어가고 있는 사람을 보고 ‘저거 그리고 싶다’ 생각을 했을 때, 그게 왜 그리고 싶을까 생각해 보면 저 사람이 삽을 들고 가는 그 느낌을 내가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림이 그리고 싶은 거예요. 아주 단순한 건데, 나는 그걸 몰랐었어요. 나는 내 지난 역사 속에 있었던 사람들에 충실한 거예요. 그것도 내가 단단해지고 고여 있지 않으려고 그런 거고, 그렇게 하는 행위가 행복하고 좋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고요.
나는 왜 꿈꾸는 세상이 없나. 그건 나에 대한 불만이기도 해요. 내가 만약에 그 정도까지 생각을 갖고 있었으면 난 정말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었을 거야.(웃음) 그게 정확하게만 있다면… 나는 어쩌면 불같이 살 수도 있어.
원재 하고 싶은 작업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게 있어요?
윤엽 난 정말 제대로 된 민중미술을 하고 싶어요.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있을 거 같아. 오히려 더 크거나 확대해서 보는 것보다 나한테 더 집착하면 그게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민중미술을 열심히 한 사람들이 혹시라도 이 글을 보면 참 갑갑할 수도 있는데, 물론 바빠서 안 보겠지만, 그래도 뻔뻔하게 얘기하자면, 나는 민중이라는 게 밖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해. 그걸 밖으로 꺼내면 훌륭한 민중미술 될 수 있을 거예요. 그게 내가 생각하는 예술이고, 그런 예술은 그야말로 땅에 딱 달라붙어서 하는 민중미술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보여주지는 못했어요.
원재 그걸 보여주기 위해 준비하는 게 있다면.
윤엽 …그게 그렇게 한방에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니에요.(웃음) 그걸 무슨 작정하고 하지는 않죠. 가수든, 글 쓰는 사람이든 다 감동을 주고 싶어 할 거예요. 예술가들은 그게 존재의 이유가 돼요. 그런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 생각을 계속 갖고 있는 거죠.
인터뷰_이원재
문화운동가. 문화연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상상력과 지구력의 힘을 믿는다. “새로운 시대를 겨누어 변함없이 날카로운 질문과 실천을 던지는 노장을 꿈꾼다”
정리_김도연 민중언론 참세상 기자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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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피리부는 사나이(piri.jinbo.net)에도 함께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