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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살던 아저씨들을 투사로 만드는 세상”

[현장르포] “왜 버스 안 와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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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버스파업이 4월 6일로 120일을 맞고, 고공단식농성이 12일이 넘어가고 있다. 버스파업 지도부도 조합원 스스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파업이 이렇게 오래갈 줄도, 조합원이 끈질기게 잘 버틸지 수 있을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버스노동자들이 굳건히 버틸 수 있는 것은 워낙에 어용노조에게 당한 것이 많아서 사업주에게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하면서 맺힌 한이 많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현장르포 "왜 버스 안 와요" 두번째 연재는 이런 노동자들의 애환과 어떻게 파업에 나서게 됐고, 왜 4개월 넘게 버틸 수밖에 없는지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불쌍한 사람들은 어디 가서 아무 짓도 말아야

신성여객 방명선 공동위원장은 “민주노총으로 가면 이렇게는 안 살겠지 하고 기사들이 너도나도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시작된 파업이에요”라고 파업이 시작된 경위를 이야기했다.

지난 2010년 8월 2일, 전주시와 전북도 19개 버스운송사업조합 소속 사업자 대표들과 한국노총 전북지부 자동차노동조합연맹 조합장들은 통상임금과 관련해 1인당 100만 원의 위로금을 지급하고 통상임금 소송을 취하하고, 향후 소송을 제기하지 않기로 합의서를 작성했다. 1인당 1000만 원 이상씩 받아야 할 돈이었지만 100만 원의 위로금을 지급하고 끝내버리려 한 것이다. 이것이 사태의 발단이었다.

“전주 호남여객에서 몇 년 간의 재판 끝에 통상임금은 합법이다는 판결이 나오니께 각 사에서 이번 임금협상에서 그것을 피하려고 통상임금 자체를 없애고 우리 전라북도 전 조합원에게 위로금 명복으로 80만원에서 100만 원선으로 다 줘버린 거유. 그동안 현장에 한 번도 안 나오던 회사 놈들이 박카스 하나 가지고 와서 도장 찍어라, 그런 거쥬. 사실 돈도 없고 일 하나 더 시켜주믄 몇 년 더 일하믄 본전은 되겄지, 하면서 그냥 도장 찍어준 거여요. 이렇게 순진하게 일하는 사람들이었어유.”

  버스농성장에 조합원의 사진이 걸려있다. 조합원 그 누구도 버스파업이 걸려있는 사진만큼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출처: 참소리]

그 일을 겪으면서 조합원들 모두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한다. 순진하게, 사업주들의 온갖 횡포에도 그저 묵묵히 “이리 살면 되겄지”하던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유례없는 한파로 길바닥이 얼어붙던 12월, 모질게 그 냉바닥의 현실을 딛고 일어난 것이다.

그 과정에서 회사가 시로부터 부당하게 보조금을 받은 부분도 드러났다. “버스보조금은 도민의 혈세인데 이 부분을 사측이 부풀려서 지원을 받은 거예요. 버스회사에서 시에다 올린 버스 기사들 임금 산정표에 나와 있는 금액이 260만 원, 직행은 285만 원이었는데요. 우리 전주 시내 버스 기사들이 실제 받는 금액은 세금 공제한 금액이 120만 원에서 130만 원이란 말이에요. 그 나머지 차액은 어디 간 거냔 말이죠.”

신성여객 방명선 공동위원장은 “그 많은 보조금들을 다 횡령하고도 사업주들은 아주 당당하다”며 울화를 터뜨렸다. “불쌍한 사람들은 어디 가서 아무 짓도 말아야 해요.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요. 이 나라는 법도 없고 권력이 첫째잖아요.”

…시에서 배차 간격을 늘려주지 않아 화장실을 가지 못해 방광염에 걸리고, 밥 먹을 시간은커녕 종점에서 잠시 땅을 밟을 식사조차 허락되지 않는 이들의 삶 속에서 더 이상의 절망이 들어찰 곳은 없어 보였다. “하다못해 행선판이라도 바꿀 시간을 줘야쥬. 바로 돌려 나가다 보니까 신호대기하고 있는 동안 내려서 행선판을 바꿔야 한다니까요.”

80여 일로 치닫는 파업사태에 생계는 어쩌시냐고 물었더니, “어렵쥬. 이혼한 집들도 많아유”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파업 대오들은 대부분 40, 50대인데 모두 집에 자식들도 하나, 둘씩 있어서 생계가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요즘 졸업시즌에다 입학 시즌인데요. 우리 기사들 전부 아들딸 다 중․고등학생들이고 한데, 거기도 못가보고 이러고 있는 거죠.” 꽃다발을 들고 삼삼오오 길을 지나는 가족들을 보면서 하루 앞에 보이지 않는 파업노동자들은 죽음을 더러 생각한다고 했다. 막다른 길에 놓여진 노동자들은 “답이 없어유”라고 입을 모은다.

  버스노동자들은 두차례에 걸친 행정대집행으로 파업수단인 버스마저 탈취당하고 결국 온 몸을 던져야 하는 고공단식농성까지 내몰리게됐다. [출처: 참소리]

“우리는 전부 구속 결의했어유.” 그들은 마지막까지 결사 항전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했다. 그들의 결의 앞에 나도 마주 주먹을 쥐어보였지만 그간 더 깊게 패였을 그들의 고단함들이 눈가에서 짙은 그림자로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헤어짐

길이 어둑해져오자 호남고속 김현철 조합원이 터미널로 데려다주겠다 했다. 수염이 무성하게 자란 얼굴이 선하게 웃으면서 서울서 내려오시느라 고생하셨다고 했다. 걸음이 불편해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난 2월 11일 경찰 진압 과정에서 조합원들이 많이 맞아 다쳤다면서 보인도 허리를 다쳐 치료를 받고 있노라 했다. 그러더니 잠깐 기다리시라면서 트렁크에서 이런저런 파업관련 자료들을 찾아내 건네주었다. 그날 하루 동안 그렇게 조합원들에게 건네받은 자료만도 책 몇 권 분량은 되었다. 터미널로 가는 동안 하나하나 넘겨보면서 그들의 지난 80일이 얼마나 길었을지, 생각할수록 한탄과 분노로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부천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20분 차였는데 20분에 터미널에 도착해놓고 보니 김현철 조합원은 “일단 이리로 뛰어 들어가서 버스를 타유. 버스는 저리 돌아서 이 길목을 지나가니께 내가 잡고 있을 게요”했다.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로 “감사하다”는 말만 던져두고 터미널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 버스를 잡아탔는데, 터미널을 돌아나가는 길목, 그 자리에 약속한 대로 김현철 조합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문을 열어두고 있다가 버스가 다가서자 달려오며 버스를 잡아 세웠다. 내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자 그제야 그도 선한 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양손을 마주 흔들었다.

버스가 그를 한참 지나친 후에도 계속 눈에 밟혀왔다. 착하게만 살던 아저씨들을 하루아침에 투사로 만들 수 있는 세상. 그리고 그들의 절박한 투쟁에 관심조차 없는 세상. 조용하게 흔들리는 버스 내부의 낯모르는 풍경들이 새삼 삭막하게 여겨졌다.


[덧붙임] 현장르포 "왜 버스 안 와요"는 <삶이 보이는 창>3,4월호에 실렸습니다. 원글이 길어 참소리에서 필자의 허락을 얻어 짧게 편집을 해 두 차례에 걸쳐 싣게 됐습니다. 필자인 이혜정님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 편집부장입니다.
  • 비정규직

    다 때려죽일 놈들입니다.
    버스파업이 승리하면 이 투쟁은 반자본주의 자본주의철폐투쟁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마침내 사회주의건설로 가야 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