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내가 있던 사무실에서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던 민주당사는 찾아놓고서도 건물을 돌아 돌아서야 겨우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인터뷰 나왔는데요.”
오랜 외지 생활로 만연한 피로의 얼굴들이 고개를 들었다. “기자 분이신가 부네.” 누워있던 사람들 가운데 유독 까만 얼굴이 말을 걸었다. 처진 눈꼬리로 서슴없는 반가움을 표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어투로 ‘아저씨’란 단어가 절로 떠올랐다.
“마중 나갔는디.” 다시 긴 보도를 달려 좁은 입구를 통과해 나가니 입구 곁에서 세 분이 서성이고 있었다. 인사를 꾸벅 하자 마중 나왔다는 분들이 머쓱해졌다. “아까부터 서 있었는디 못 봤나 부네.”, “우리가 시커멓게 입고 있응게 그르지.” 좁디좁은 입구 하나만 보면서 들어온 것이 새삼 죄송해졌다.
자식에게 되물림 되는 노동자의 한
“나는 요즘 젊은이들 보믄 애 낳지 말라 그려요. 애 낳으믄 너랑 똑같이 자라서 똑같이 이런 억울한 일 당하면서 살 거라고.”
의자에 앉자마자 방명선 조합원은 휑한 회의실 모서리 구석구석이 벙벙 울리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 뭐. 우리 애들이 커 봐야 우리랑 똑 같은 인생이겄지.”
체 념과 냉소, 그들에게는 그것이 삶을 버티게 하는 버팀목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그들의 막다른 ‘인생’을 구성해 온 유일한 내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스스로 체화시켰던 그 냉소에, 그리고 그 냉소를 강요했던 세상에 맞서고 있다.
냉소와 체념은 세상을 유지하게 하는 작동원리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을 규정해버림으로써 사용자는 하던 버릇 그대로 노동자를 부릴 수 있게 된다. 세상은 지금까지처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굴러갈 수 있다. 부도덕도 부당함도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그 울분은 체념을 넘어 세상을 향한 냉소가 되어 꽂힌다.
80일의 버스파업 사태에 대해 여론의 불만은 극에 달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제 욕심만 채우려 시민들의 불편은 뒷전이냐.”는 식의 비난들이다. 사실 ‘나만 잘 살면 된다’라는 이기심은 매번 10분, 20분을 쫓기듯 달려가는 노동자들에게는 사치스러운 담론이다. 버스 노동자들에게는 ‘나만 잘 살면 된다’보다는 ‘일단 살고 보자’라는 것이 그들의 진실에 더 가까운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 버스파업노동자들에게 시민들이 쏟아 붓고 있는 “너만 잘 살면 그만이냐”라는 비난은 그런 의미에서 맞지 않다.
전주의 유행어, “어이, 송 시장”
“전주를 가야 헌다니께. 여기는 그냥 우리가 지키고 있는 것이고, 다 전주에서 싸우고 있응께.” 그렇게 내려온 전주였다. 시외버스터미널로 들어서자마자 입구에 불을 피워놓고 모여 앉은 파업 대오를 만났다. 잔뜩 껴안은 옷에 붉은 머리띠가 선명했다.
“조금만 더 빨리 왔으믄 전주대 항의집회에 같이 갔을 텐디.” 전주대에서 집회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거기서 오늘 호남고속 김택수 회장의 명예박사학위 수료식이 있다고 했다. “이 판국에 그러고 앉어 있어. 뭔 놈의 명예박사학위는….”
김택수 회장은 작년 4월 13일 전주대에 1억 원의 대학발전기금을 쾌척한 일이 있었다. 김택수 회장이 쾌척한 1억 원은 현재까지 체불되어 있는 버스노동자들의 임금에서 나온 것이라는 추측과 더불어 김택수 회장의 재력과 그로 인해 비롯된 세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케 하는 이야기들이 노동자들로부터 속속 터져 나왔다.
“어이, 송 시장! 그러더래니께.” 전주 농성장에서도 앉는 곳마다 노동자들이 빠짐없이 하는 이야기였다. 민주당사에서도 역시 같은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 이야기를 반복해 들을 때마다 밀려드는 생각은 분노감보다 허탈감이었다. “역시”라는 혼잣말이 입안에서 계속 맴돌았다.
전주 버스파업이 36일째 접어들던 지난 1월 12일, 송하진 전주시장이 중재를 해서 마련된 노사 교섭 자리에서 호남고속 김택수 회장은 송하진 시장을 그렇게 불렀단다. 이에 송 시장은 붉어진 얼굴로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 “세상에 교섭 장소에서 시장한테 ‘어이 송 시장!’이 뭐냐고, 세상에.”
[출처: 참소리] |
민주당의 아성, 전주. 그 속의 은밀한 관계들
전북은 민주당의 아성답게, 전주시장을 비롯해 전북도지사까지 모두 민주당 소속이었다. 버스사업주들 대부분이 민주당 당원일 뿐만 아니라 호남고속 김택수 회장, 전북고속 황의종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전북 버스파업에 대해 책임이 있는 당사자들이 모두 민주당이라니. 왜 전주 버스노동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반MB’, ‘반한나라당’을 외치면서 ‘반MB연합’까지도 불사하는 이 시절에 뜬금없이 먼 서울까지 와서 그것도 민주당사 회의실에 앉아 농성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민주당사를 찾아간 날 그 연유를 물었더니 노동자들은 앞 다투어 대답했었다.
“전북은 민주당이 한나라당여유.” … 80일간 반복되고 반복되어온 그들의 한탄은 배신감과 분노로 바뀌어 있었다. 노동자들은 “민주당과 사업주들의 유착관계가 사태를 이 지경으로 몰고 온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김택수 호남고속 회장은 전주의 실세여요.” 실제로 김택수 회장은 전북 상공회의협의회 회장을 비롯 전주상공회의소 회장, 전북도민일보 회장, 전북택시사업조합 이사장, 전북운수연수원 이사장, 경초학원 호남제일고 이사장 등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재전 순창군향우회 회장까지 역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난 2010년, 이 향우회 신년하례회 및 정기총회에는 김택수 회장을 비롯, 김완주 도지사 부인 김정자 여사, 송하진 전주시장, 정동영 국회의원과 부인 민혜경 여사가 함께 참석했었다고 한다. 전주 버스노동자들의 의혹이 단순 의혹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다름 아닌 여기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향우회 쫓아 다니게 생겼냐고요.” 80일 파업사태로 치닫고 있는 시점에서도 향우회 친목 다짐을 찾아다니는 정동영 의원의 행보에 대해 신성여객 방명선 공동위원장은 황당함을 넘어 분노감을 표시했다. 시민여객 오해관 조합원은 “다 한 통속이겄쥬”라면서 별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송하진 시장이나 김완주 도지사,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 전북고속 황의종 대표이사, 호남고속 김택수 회장 전부 고향이 순창이래니께요.”
▲ 민주당 탈당신고서 [출처: 한국비정규노동센터] |
이들의 친분 관계가 사태해결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파업 중인 버스노동자들은 이미 전원 민주당 탈당서를 준비해둔 상태였다.
기괴한 이미지의 시대
이미지는 진실을 가리게 하는 힘이 있다. 이미지가 창궐하는 이 시대에 모든 인격은 그리고 인권은 단지 이미지 한 장으로 존재한다.
…정치인들의 행보는 대개가 비슷하다. 이번 전주 버스파업 사태에 대해서도 민주당 정치인들은 입장 발표만 거듭할 뿐, 사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은 하지 않고 있다. 버스노동자들의 유례없는 80일 파업사태에 대해 민주당은 어설프게 중재시도만 할 일인지 적극 연대해야할 일인지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 전주 지역구 출신 정동영 국회의원은 버스파업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제스쳐를 몇차례 취했지만 별다른 진전없이 파업이 110일을 넘겨 장기화 되는 등 버스노동자들은 그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출처: 정동영 국회의원 홈페이지] |
…민주당이 진정 노동자들을 위한 정권, 서민을 위한 정권을 표방한다면, 멀리 갈 것 없다. 홍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GM대우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얼굴 도장 찍기 전에 직접 제 발로 찾아온 노동자들을 먼저 만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모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매번 노력하고 있다는 말만 거듭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진정성이다. 그들은 노동자를 위해 뛸 생각은 없지만 ‘노동자들을 위해 뛰는 정치인의 이미지’를 갖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다. 일단 이미지란 것은 만들어지고 나면 적당히 재구성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제고 유용한 것이므로 그들에겐 손해 볼 일 없는 부분일 테다.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은 온갖 이미지의 담론들만 무성한 것이 우리네 정치판이라니. 씁쓸함 뒤로 울화가 치밀었다. (제휴=참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