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밝았다. “아빠가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나?” 흔들어 깨운다. 기척이 없다. 또 다시 흔들어 깨운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작년의 기억이, 작년 4월 25일의 고통이 순간 가슴속에 쿵하고 떨어진다. 그렇게 아빠는 일어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한 달 보름 뒤면 엄마의 첫 번째 기일인데...
쌍용자동차 무급자(1년 뒤 복직예정자) 임00 씨는 그렇게 세상을 등졌다. 토끼 같은 마누라가 모질게도 10층 베란다에서 뛰어 내리던 그 순간을 지키지 못한 사내의 아픔과 고통을 가슴속 납덩이로 남긴 채, 고등학생과 중학생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더는 보지 못하는 아픔을 우악스레 움켜쥔 채 모질게 세상과 이별했다. 그것도 마누라가 죽은 같은 아파트에서.
희망이 있을 것이란 환상을 심어주며 끊임없이 고통 속에 살게 하는 희망고문. 결국 희망이 없다는 것을 죽음으로서 혹은 이별을 통해서 확인하는 ‘희망고문’. 쌍용자동차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죽음의 실체다.
▲ 1월27일 산업은행 규탄 결의대회 장소에 쌍용차 노동자들이 손바닥 도장을 찍은 '공장으로 돌아가자'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출처: 금속노동자] |
쌍용자동차는 2009년 파업을 종료하면서 이른바 ‘8/6노사대타협’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국민을 상대로 한 약속이기에 소위 국민적 합의였다. 핵심사항은 “무급자에 한하여 1년 뒤 순환 복직한다”였다. 1년이 경과한 2010년 8월 6일. 무급자 462명은 공장으로 들어가는 기쁨이 아니라 쌍용자동차 사용자측을 경찰에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해야 했다.
1년만 버티면, 1년만 더 이 고통스런 생활을 버티면 공장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란 기대와 희망은 ‘복직계획이 없다’는 사용자측의 버티기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1년이 되기 넉 달 전, 아내를 잃은 슬픔은 복직이라는 기대 속에 그나마 잠시 묻을 수 있었다. 그러나 1년이면 복직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콩나물처럼 커나가는 아이들과는 정반대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쌍용자동차 출신이라는 사회적 낙인과 냉대 속에 일자리 찾기가 어려워도 아이들을 지키고 아내의 몫까지 살고 버텨야 한다는 아비의 비장함을 꺾을 순 없었다. 막노동에 날품팔이도 부끄럽지 않았고, 명절이면 더욱 커지는 아내의 빈자리도 곱씹으며 버텼다. 그러나 더는 버틸 힘이 없었던 것일까? 고인과 마직막을 함께한 친구는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것 같더라”는 유언아닌 유언을 전달하며 오열한다. 고통과 슬픔의 크기는 혼자만 아는 것일까? 절망의 깊이는 본인만이 가늠하는 것일까?
쌍용자동차 파업이후 13이란 숫자가 을씨년스럽게 또 남았다. 사망자의 숫자다. 무급자는 462명에서 461명으로 숫자가 줄어들었다. 사망으로 빠진 탓이다. 쌍용자동차 희망퇴직자의 잇단 자살과 무급자의 사망, 사회적 인과관계로 볼 때 뗄레야 뗄 수 없다. 사용자측이 이렇듯 버티고 뭉갠다면 숫자는 늘 것이고 숫자는 줄 것이다. 어느 숫자를 늘리고 어느 숫자를 줄일 것인가. 이건 오롯 쌍용자동차 사용자측의 몫이다.
2월 26일. 남은 아이들에겐 충격과 공포의 날이다. 이 아이들에게 위로할 수 있는 단어가 세상에 존재는 하는 것일까? 타들어 가는 담배만큼이나 쌍용자동차 해고자와 무급자들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통장잔고 4만원, 카드빚 150만원. 임00조합원이 세상에 남긴 유서와도 같은 쌍용자동차 무급자들의 참혹한 현실이다.
사용자측의 진정어린 사과와 유가족으로 덩그러니 남겨진 아이들에 대한 정신적 심리적 치유 그리고 유가족에 대한 생계대책 또한 무급자에 대한 복직요구, 정말 무리하고 부당한 요구인가? 정말 그런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