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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지위 회복을 위해 싸우는 시간강사들(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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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앞, 물기 하나 없는 빌딩 가득한 거리에 작은 텐트가 홀로 세워져 있다. 텐트가 세워진 지 4년째다. 예순을 넘긴 노부부가 이곳에서 농성 중이다. 김동애(65), 김영곤(63) 부부이다. 이들은 ‘시간강사 교원지위 회복’을 내걸고 싸우고 있다. 6개월 단위 계약에 의존하는 비정규 교수, 시간강사. 싸움은 비정규직의 숙명인 ‘계약해지’로부터 비롯됐다.


시혜를 베풀었다는 대학

한성대학교에서 동양사를 가르치던 김동애 교수는 92년 대학으로부터 대우교수를 제안받는다. 교과부에 전임강사로 이름을 올리지만, 실제로는 시간강사 신분인 이들을 대우교수라 했다. 전임교원 충족률을 높이기 위한 대학의 편법이다.

강사가 무슨 힘이 있다고 편법을 운운할까. 대학은 대우교수가 되면 기존 강사료에 2배를 주겠다고 했다.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남편에, 커가는 두 아이를 둔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강사료로는 생활을 꾸려가기 빠듯했다. 시간강사의 처지가 그랬다. 한 강의 당 3, 4만원의 강의료를 받는 게 고작이었다. 강의가 없는 방학은 보릿고개였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면 전임교수를 시켜주는 관례가 있다는 주변의 말도 그녀에게는 희망이었다. 1년 단위마다 재계약을 하는 대우교수로 살았다.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999년 가을 학기, 그녀는 반절로 줄은 강사료를 받았다. 이상하게 여겨 대학 측에 문의를 했다. 학교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은 이제 대우교수가 아니라 강사다.’

사정은 이러했다. 편법임용을 한 것이 교과부에 들통나 갑작스럽게 그녀의 직위를 해제시킨 것이다. 그녀는 일방적인 계약해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학교는 ‘7년 6개월 동안 시혜를 베풀었으니’ 조용히 넘어가라고 했다.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단지 반절의 강사료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강사를 하며 받은 설움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나이 50이 넘었다. 교수 한번 못 해봤지만, 더는 미련이 없었다. 그녀는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했다. 직위 해제 및 감봉 무효 소송이었다. 결국 강사 자리를 잃고, 퇴직금 지급 소송도 함께하게 된다.


강사는 노동자도, 교원도 아니다?

법원은 ‘강사는 법적지위가 없다’는 이유로 소송을 기각했다. 시간강사는 교원도 노동자도 아니라고 했다. 시간강사와 대학은 종속관계가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선생님(교원)이 아니었다. 심지어 노동자도 아니라고 했다. 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노동부로 문제를 가져갔다. 근로기준법이 강사의 지위를 밝혀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노동부는 시간강사를 ‘단시간 노동자’라고 판단했다. 그러니 퇴직금도 받을 수 없었다. 연구시간과 수업 준비, 학생 지도 시간이 모두 배제된 채 그저 주 9시간의 강의만을 가지고 내린 결론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에 진정을 했다. 결국 인권위에서 ‘강사는 차별 받고 있다. 제도 개선․신분 보장 해야 한다’는 권고안을 받아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는데 5년이 걸렸다.

변한 것은 없었다. 그녀가 얻은 것은 인권위의 강제력 없는 권고안뿐이다. 잃은 것은 많았다. 강의도, 시간강사인 친구들도 잃었다. 친구들은 대학 눈치를 보며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5년을 홀로 싸웠다. 법정 싸움을 하면 할수록 그녀는 혀를 내둘렀다.

‘강사가 이렇게 아무런 법적 지위도 없다니.’

단시간 노동자, 파트타이머였다. 어떤 권리도 없이 대학이 원하면 보따리 싸들고 가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다. 어떤 법도 강사에게 보호막이 돼줄 수 없었다. 부당했다. 그녀는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 정상화 투쟁본부(이하 투본)>를 만들었다. 국회 앞에 농성천막을 세웠다. 그녀의 남편 김영곤 교수(고려대 비정규 교수)도 합류했다. 2007년 9월의 일이다.

사라진 교원 지위

노부부를 길거리로 내민 것은 무엇인가? <투본>의 요구는 ‘시간강사 교원지위 회복’이다. 강사의 교원지위는 77년 교육법 개정으로 사라졌다. 박정희 정권의 ‘지식인분할정책’의 하나였다. 강사의 지위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학계의 입을 봉한 것이다. 그 후 시간강사는 ‘보따리장수’ 신세가 되었다.

강사의 처지를 빗댄 농담이 있다.

“교수님, 연구실이 어디세요?”

학생이 묻자, 시간강사가 대답한다.

“서울 나 9448”

강사가 말한 건 자신의 차번호다. 연구실도 교수실도 없다. 그나마 학교가 내준 두어 평짜리 공동 휴게실이 전부다. 평균 강사료는 시간당 3만5000원(2009년 기준)이다. 주 9시간 강의를 한다고 해도 일 년 임금이 1000만원도 되지 않는다. 도시 근로자의 최저 생계비가 1600만원이라고 한다. 시간강사로 먹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시간강사들은 어떠한 부당함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들이 시간강의 처지를 감수하는 것은 교수가 된다는 희망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 교수 중 비정규 교수(초빙교수, 겸임교수, 대우교수, 강의전담교수, 비정년트랙, 시간강사)가 차지하는 비율은 55%에 다다른다. 시간강사의 수는 10년 전보다 1만5000명이나 늘었다. 교수로 가는 문턱은 나날이 높아진다.

용역업체 직원, 비정규직으로 학교를 채우고 있는 대학재단이다(대학 행정직원, 청소노동자, 교내식당노동자 이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그런 대학이 시간강사를 정규직으로 전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함은 당연하다. 오히려 2년 이상 근무 시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한다는 비정규 보호법을 피해가기 위해, 2년 이상 강의한 강사들에게 다음 학기 강의를 주지 않고 있다.

교수 임용 기회가 적어지니 시간강사들 간의 경쟁은 심해진다. 자연스레 권리를 말하는 목소리는 작아진다. 지도교수의 말 하나에 교수 임용 여부가 갈리는 상황이다. 교수의 말은 법이 된다. 누군가는 이 관계를 <교수와 제자=종속관계=교수=개>라고 고발했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 시간강사의 죽음

지난해 5월 25일, 서정민 박사(45)는 자신의 집에서 연탄불을 피운 채 목숨을 끊었다. 유서 몇 장을 남긴 채였다. 유서에서 그는 아내와 자식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고발했다.

"저는 스트레스성 자살입니다. B 교수님을 처벌해 주세요. B 교수님에게 당한 종의 흔적은 내 e-mail에 일부 있고 한국연구재단연구실, 유서에 밝힌 내용. 그리고 B 교수와 쓴 모든 논문(대략 54권)은 제가 쓴 논문으로 이름만 들어갔습니다."

그는 조선대 영어영문학 박사이자 시간강사였다. 서정민 박사의 고발은 자신의 논문을 도용한 교수로 끝나지 않았다.

"교수 한 마리(자리)가 1억5000만, 3억 원이라군요. 저는 두 번 제의 받았습니다. 대략 2년 전 전남의 모 대학 '6000만 원', 두 달 전 경기도 모 대학 '1억 원'이더군요. 썩었습니다."

암묵적인 사실인 교수 임용 비리였다. 그는 생의 마지막 요청을 했다.

"강사들 그대로 두시면 안 됩니다. 수사 의뢰합니다."

수사 의뢰합니다

2010년 5월 마지막 날, 서정민 박사 추모 미사가 국회 앞에서 있었다. 김동애 교수는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채 기도를 했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며칠 간 앓았다고 했다.


서정민 박사의 유서에 그녀의 이름이 있었다.

"김동애 교수님! 죄송합니다. 투쟁에 함께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한 줄이 그녀를 괴롭혔다. ‘내가 1000일이 되도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아까운 목숨을 또 잃었구나.’ 그녀가 싸움을 시작한 후, 9명의 시간강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는 좁은 천막 안에서 며칠을 앓아누웠다.

각 대학, 교육과학기술부, 국회 앞에서 3년 넘게 1인 시위를 했다. 그럼에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교원지위회복을 다룬 고등교육법 개정안은 매년 국회에 발의됐지만, 번번이 논의도 없이 폐기됐다.

그러나 서정민 박사의 죽음이 언론에 알려졌다. 유서는 공개됐다. 그의 생의 마지막 부탁인 수사요청은 받아들여졌다. 교수 비리 사건이 수사에 들어갔다. 그의 죽음으로 여론이 형성되자, 사회통합위원회는 시간강사의 교원지위 개정 방안을 내놓겠다고 했다.

서정민 교수 유서 마지막에는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전하는 말이 나온다.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죄송합니다. 여러분 성적이라도 처리하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열심히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다시 한 번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마지막까지 제자들을 눈에 밟혀 하던 선생님, 서정민 박사가 교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수많은 서정민 박사들이 더 이상은 부당한 대우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을까, 기대가 모아졌다.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그 후, 반년이 흘렀다. B교수는 무혐의 처리되었다. 서정민 박사가 고발한 논문 대필, 교수채용 비리 혐의는 인정되지 않았다. B교수는 서정민 박사의 논문을 지도한 것일 뿐이라 했다.

이 사태를 두고 김동애 교수는 말했다.

“예수님이 그랬어요. 죄가 없는 자들만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요. 그러니 아무도 못 던졌지요. 마찬가지에요. 혐의를 받은 교수에게 돌을 던질 수 없는 거예요. 대학사회에서 죄 없는 교수와 강사만이 돌을 던질 수 있으니까요.”

서정민 박사 사건을 둘러싸고, 한국비정규교수노조는 김동애 교수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정재호 조선대분회장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였다. 싸움은 새로이 시작되고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