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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주홍글씨, 제4신분 비정규직 [2]

형도 동생도 하청으로 시작하는 인생, 비정규직 세대를 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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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제4신분

팽팽하다. 울산 현대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공장 점거가 6일로 22일째를 맞고 있지만 조합원들의 점거농성에는 흔들림이 없다. 먼저 농성부터 풀라는 현대차 사측의 입장과 “정규직화에 대한 성과 있는 합의가 없다면 농성을 풀지 않겠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입장은 아직도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농성 조합원들을 22일이나 강하게 버티게 만드는 정규직화 열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한축으로는 하청이라는 신분이 불러온 공장과 일상의 차별이 있었다면, 다른 한 축으로는 이들이 수년간 경험했던 간접고용 비정규직 일자리 자체에 문제점이 있다.

이들의 질문은 단순했다. 한번 비정규직은 영원히 비정규직이어야 할까? 만약 직업이동의 자유가 있고 계층과 신분상승의 기회가 주어진 ‘사회’라고 한다면 이 말은 틀렸다. 그러나 이들에게 자유와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비정규직은 족쇄와 같은 신분, 떨쳐낼 수 없는 주홍글씨이며,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제4신분일 뿐이었다.

  4일 회사쪽이 대형H빔을 단 포크레인으로 농성중인 1공장 유리창을 부수자 조합원들이 창문에 매달렸다.

최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 8월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300인 이상 1939개 사업장의 41.2%가 사내하도급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사내하도급을 활용한 300인 이상의 788개 원청 사업장이 8,529개의 사내하도급 업체를 두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이 올 3월 통계청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07년 3월 이후 다른 비정규직 고용형태는 감소했지만 파견근로는 오히려 17만5천명(1.1%)에서 21만2천명(1.3%)으로 3만7천명이 증가했다. 간접고용 형태는 더 늘어난다는 것이다.

문제는 간접고용이 불러온 고용불안과 사회문제가 심각한데도 정부나 재계는 계속 청년실업자들에게 눈높이를 낮추라고만 하고 있다는데 있다. 실제 정부가 지난 10월에 발표한 고용 밑그림인 국가고용전략 2020도 이런 비정규직 일자리 확산을 통한 고용율 상승을 꾀하고 있다.

통계와 정부 정책이 말해주듯 울산 현대차 농성장에서 만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현대차 하청으로 들어오기 전에도 사회에 첫 발을 내 딛으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간접 고용을 경험해 왔다. 그리고 오랜 세월 하청 생활에서 간접고용 형태가 하나의 신분이 됐음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또 IMF 외환위기 이후 노동유연화 정책이 불러온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를 경험한 이들이 많아 고용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농성중인 하청 노동자 중 30대 초중반들은 대부분 20대 중후반에 입사했다. 그들은 전형적인 98년 IMF 구조조정이 강요한 노동유연화 정책의 희생자였다. 한국 사회는 일부 운 좋고 돈과 빽이 있는 사람에게만 정규직 일자리를 허용했다.

이들 상당수는 대부분 현대차 하청업체에 입사하기 전에도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해야 했다. 불안정한 일자리란 매년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같은 일을 해도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삶도 불안해진다.

양질의 일자리가 없어지면서 비정규직은 이들 또래 세대에겐 보통명사가 됐다. 불안정한 노동세대의 불안 한 삶은 또래 친구나 또래 가족에게 똑같이 덮쳤다. 비정규직이 세대화가 된 것이다.

사회 첫 발, 형도 동생도 하청 인생으로 시작

올해 33살의 A씨는 2000년 23살 때 현대차 하청업체에 입사했다. 그가 하청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 흘렀다. A씨는 현대차 비정규직이 되기 전까지도 온갖 하청 업체 일을 했다.

A씨의 친동생도 역시 현대자동차 하청 노동자다. 사고만 치고 다녔던 자신과는 다르게 동생은 좀 더 잘 살기를 바랐지만 비슷한 세대를 사는 동생도 노동유연화 정책을 피할 수는 없었다. 돈과 빽이 있어야 양질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난한 집안의 두 형제는 하청노동자의 길을 걸어야 했다. 그래서 형은 동생이 하청노동자로 일하는 게 마음이 아프다.

동생은 02년 8월에 입사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에 복학하기 전에 도장부 알바로 일을 시작했지만 사회는 동생을 계속 하청 노동자로 묶어두었다. 양질의 일자리 자체나 거의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처: 합동취재팀]
A씨도 사회 첫발을 하청인생으로 시작했다. 외환위기가 시작한 97년, 19살의 앳된 고등학교 3학년이던 A씨는 현대중공업에서 중전기로 현장실습을 나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곳도 중공업 사내하청업체였다. 시급 2400원. 시급으로만 치면 2000년 현대자동차 입사 때보다 더 많았다. 심지어 야간 할증도 있었다. 그래서 19살인데도 한 달 내내 야간근로를 뛰었다.

그러나 중전기 입사 후 3개월째부터 급여가 안 나오기 시작했다. “외주 용역 업체였습니다. 사장이 이번 일만 챙기고 도망가자는 기조였어요. 동료들과 누군가는 가서 임금을 달라고 말해야 해서 제가 뽑혔습니다. 그런데 사장이 사무실에서 하는 꼴을 보고 의자를 던져 버리고 나왔습니다.”

그는 바로 현대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 현대와 관련한 어떤 업체의 아르바이트 자리도 안 나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곤 D나이론이라는 사내하청 업체에 들어갔다. 친구 아버님의 회사였다. 그는 여기서도 오래 있지 못했다. “저랑 주로 같이 일한 분이 연세가 많았어요. 그런 영감님을 정규직 과장이 막 대했어요. 영감님이 당하고 있으니 어린 마음에 과장에게 대들었어요” 그는 98년 가을에 쫓겨났다.

IMF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무렵 20살 나이로 일자리에서 쫓겨난 A씨는 경제위기의 고통을 고스란히 받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면제를 받았지만 군대에 기를 쓰고 입대 하려고 했다. “일자리도 없는데 군대에 가면 밥도 먹여주고 어려운 시기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면제라 안됐어요. 당시는 IMF로 제 또래들이 일자리가 없어 다 군대를 갔어요. 저도 3번이나 다시 지원했지만 제가 집안 가장이라는 이유로 군대에서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일은 없죠 그러니 집에서 눈치만 보이고, 군대 가면 밥은 먹여주니..”

외환위기는 전 국민적인 금모으기 운동을 불러 일으켰고 일자리가 없어진 청년들은 일단 소나기를 피해보자고 너도나도 군대를 지원했다. 그래서 훈련소 입소도 몇 달씩 기다려야 했다.

결국 A씨는 집안 눈치를 피하기 위해 온갖 알바를 시작했다. 행사장에 가서 노래도 부르고 약장사도 해보고 영업직도 단기로 했다.

99년엔 부산의 삼촌 커피숍을 도왔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던 A씨는 2000년 중순 울산으로 왔다. 10월께 광고지를 보고 현대자동차 하청업체에 들어왔다. 몇 년을 지나니 블랙리스트가 사라져 있었다.

“그때 만해도 현대차 일이 힘들어서 반나절만 일을 하고 나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일이 힘들었거든요. 처음 트럭 일을 했는데 키퍼라고 해서 땜빵개념으로 각종 공정 곳곳을 돌아 다녔어요”

“그때는 뭐가 차별이고 뭐가 부당한지도 몰랐는데 03년에 정규직 첫 입사자를 모집 했어요.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그 사람들 월급봉투를 봤는데 우리가 아무리 일해도 받을 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이게 차별이구나. 거기다 내가 그 사람들보다 일도 더 많이 하고요. 내 보다 나이 어린 정규직엔 막말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가 더 나이가 많은데 관리자들은 막말을 했어요. ‘너는 비정규직’이라며 함부로 대했습니다.”

A씨도 당시 정규직을 지원했었다. 하지만 그는 소위 연줄이 없어 비정규직으로 남았다. “나중에 정규직 형님이 하는 말이 ‘너희는 비정규직이라 안 된 거고 (정규직이) 된 거는 능력이다’고 말했던 게 생생합니다”

하지만 현대자동차 생산 공정은 누가 뭐래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차이가 없었다. “내 앞에 정규직이 작업을 안 해주면 내가 일을 못하고, 내가 작업을 쉬면 내 뒤의 정규직이 일을 못합니다.”

그는 7월 22일 대법원이 현대차 사내하청을 불법파견이라고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도 긴가민가했다. 그러다 서울 고법에서 현대차 사쪽의 위헌신청을 기각하고 다시한번 불법파견을 인정하자 공장안 컨베이어 사이를 환호를 지르며 돌아다녔다.

“비정규직 인생을 바꾸는 파업”

83년에 태어난 20대 후반의 B씨. B씨는 04년 11월에 입사해 올해 하청 5년차다. 아직 서른도 안 된 나이지만 B씨도 비정규직이라는 낙인에 받은 상처가 컸다. 그는 처음엔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아르바이트로 입사했다. 오래 있을 생각이 아니었지만 젊은 나이라 힘든 줄 모르고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자동차 다니는 데요’ 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대부분 정규직인지 하청인지 묻는다. “정규직인지를 안 물어 보면 그냥 자동차 다니는 게 되요. 미리 하청이라고 대답하지 않아요. 누구 앞에 굽히지 않고 싶지 않았다고 할까요.”

그는 이번 농성이 시작할 때 개인 사정이 있어 처음부터 결합하지 못했다. 그러다 TV 와 인터넷을 보고 사람들과 전화 통화도 하면서 집에 있는 게 마음이 불편했다. “500명이 나와 같은 목적으로 공장안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데 제 사정이 있다고 집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엄마한테는 농담 반으로 출근한다면서 오래 못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농성 6일 정도 지나서 농성장에 들어왔습니다.”

B씨의 친구들 중에 대기업 정규직은 열에 하나 꼴로 있다고 했다. 그 외는 자영업이나 중소기업, 협력업체 등에 일한다. 그는 자신과 같은 공정에 자기 또래의 정규직 친구가 있다. 하지만 반별 회식에서라도 같은 자리에 앉으면 자존심이 상할 때가 있다. “내가 그 친구보다 짬밥도 오래 됐고, 하는 일도 똑같고, 화장실 땜빵도 서로 같이 하는데 임금차이는 많이 납니다. 웃긴 사회죠. 일한 만큼 벌어가는 게 상식인데 비정규직이 일도 더 많이 하고 잔업도 더 많이 하고 월차도 더 안 씁니다. 왜 난 더 많이 일을 하는데 임금은 더 적을까. 더 힘든 일을 하는데 임금에 차이가 왜 날까요”

아직 젊은 그에게 이번 파업은 인생을 바꾸는 파업이다. 사람들 앞에서 뭔가 마음에 걸리지 않고 자동차에 다닌다고 말을 하고 싶은 열망은 인생을 바꾸고 있었다. “이번 파업은 인생의 반환점이 될 겁니다. 정규직을 쟁취할 거니까요. 새로운 인생이 시작 될 거예요. 이젠 남들 앞에서 당당해지고 부끄럽지 않고 싶어요. 만약 실패하면 해고가 되거나 징계를 받겠지만 저의 또 다른 삶이 시작될 겁니다.”

맨아워(Man Hour) 협상 때마다 덮치는 불안, “자동차는 희망이 없다”

05년 1월에 입사해 현대차 하청에서 6년 동안 근무한 C씨는 계속 이직을 꿈꾼다. C씨는 올해 31살이다. 그는 자신이 용돈으로 쓸 만한 돈이 턱없이 부족하다. 입사 6년이 됐지만 상여가 없는 달은 이것저것 떼면 120-130만원을 받는다. 그 돈으로 매달 적금과 보험을 넣고 있다. “제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은 거의 없습니다. 어디라도 갈라치면 집에 손을 벌려야 합니다.”

그는 어머니와 산다. 결혼도 하지 않았다. 애인도 없다. 그는 적금으로 82만원을 붓는다. 여기에 종신보험, 상조, 장기주택마련 저축도 따로 든다. 그나마 상여금을 받는 달에 그 돈을 쪼개서 생활비로 쓴다. 인터넷, 휴대폰, 가스비 등을 내고 나면 따로 쓸 만한 여유가 없다.

C씨는 9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군대를 다녀오고 04년에 졸업하고 난 후 7개월간 전공을 살려 일을 했다. 그러나 조그만 사무소인데다 월급은 80만원, 20년 동안 막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일자리였다. 결국 그는 운송회사 배차원 일로 이직 했다. 여기선 130만원을 받았다. 밥은 줬지만 4대 보험은 안됐다. 고용보험이 뭔지도 몰랐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사회였다.

배차원도 임금과 적성이 맞지 않았다. 그는 일을 그만두고 7개월 동안 놀았다. 24살에 백수가 된 것이다. 어머니는 백수가 된 아들에게 눈만 뜨면 싫은 소리를 했다. 거의 폐인처럼 살았다. “어머니는 백수 시절 입만 떼면 제 가슴에 비수를 꽂았습니다. 저도 말만하면 같이 받아쳤고요”

그가 현대차 사내하청에 입사하자 가장 좋아하신 분은 어머니였다. 어디서 일하느냐가 아니라 그냥 일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셨다. 그는 현대차 하청에서 근 6년을 일했지만 1년에 3천 만원을 넘게 받은 적이 딱 한번 있었다. 그는 세금을 떼고 나면 1년에 2700만원 정도를 받는다.

“국가고용전략이란 걸 뉴스로 봤는데 앞으론 파견법도 우리 같은 생산직에 적용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소송한 게 거기 적용 되나요. 그 뉴스를 보고 이제 제조업도 안정적인 일자리가 거의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자동차는 더 희망이 없다고 봅니다.”

그는 어느새 고용문제의 전문가가 돼 있었다. C씨는 6년 동안 이직을 하기 위해 100여 곳을 넘게 알아봤다. 그에게 자동차 산업은 사양산업이기 때문이다. “자동차 산업은 점차 모듈화되고 자동화 되면서 최소 인원으로 공장을 돌릴 겁니다. 내가 운 좋게 그 최소 인원에 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동차 산업 자체가 인력을 계속 구조조정 할 것이라고 현장에서 몸으로 느낀 것이다. 그는 정규직이 되어도 최소인원을 만들려는 자동차 산업의 유연화 전략에 평생 시달릴 것이라고 봤다.

“매년 고용불안에 시달렸습니다. 맨아워 협상이 시작되면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매년 그러다 보니 내발로 걸어 나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등 떠밀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걸어가겠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못 벗어나고 여기 까지 왔습니다.”

불안한 비정규직은 그의 취미를 자격증 공부로 만들었다. 07년부터 자격증 공부를 시작해 각종 전기, 산업기사 작업증을 7-8개 땄다. 그는 주로 기능직 정규직 일자리에 100여 번이 넘게 지원했다. 그러나 전부 떨어졌다. 6년 동안 주야간 근무 할 것 없이 하루 5시간씩 자격증 공부를 했다. 그는 지금도 떠나고 싶다.

“처음엔 떨어질 때마다 내 일상으로 돌아오기 힘들어 오래 걸렸어요. 자괴감도 컸습니다. 어디를 써도 결과가 같을 때 다시 일상으로 오는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그게 자주 반복되니 나중엔 쉽게 받아 들여 지더라구요.”

C씨는 고용불안만 없었어도 사람들이 이렇게 까지 오래 농성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비정규직이라 주눅이 들어 살아왔다고 했다. 소개팅을 했는데 하청이라는 이유로 큰 상처를 받고 나서는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삶이 하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만성피로에 시달리면서도 피 말리는 자격증 공부를 하게 만들었다.

“형님이 삼성 직원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하청 직원 이었습니다”

D씨는 29살이던 2002년에 현대차 하청업체에 입사했다. 그는 하청이 뭔지를 알고 있었다. 형님이 삼성 정규직 직원인줄 알았다가 99년도에 형님 소개로 삼성 협력업체 비정규직으로 일을 해 보니까 형님도 비정규직이었다. 깜짝 놀랐다. 중소기업에 들어가면 중소기업 직원 일 줄 알았는데 자신은 아예 하청의 하청업체였다. 노트북 뼈대를 만드는 업체였는데 3개월 후 그만 뒀다. 임금이나 복지혜택 둘 다 별로 였고 정규직이랑 섞여서 일을 했다. 남자 직원이 5명이었는데 자신만 하청이었다.

그러다 2001년에 친구소개로 울산 현대 하이스코에 입사했다. 하이스코 일자리도 전부 하청이었다. 시급은 2,200원. 주야 2교대였는데 세금을 떼고 나면 손에 들어오는 게 100만원 정도 밖에 안됐다. 다시 구인구직 신문인 교차로를 뒤졌다. 현대 미포조선에서 시급 5천원 짜리 일자리가 나왔다. ‘좋다, 일만 열심히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이곳도 하청업체였다. 그런데 일이 많이 없었다. 주간만 일을 하니까 시간이 적었다. 또 교차로를 찾았다. 현대차 공장에서 600%를 준다고 해서 아무래도 돈을 모으려면 주야를 열심히 뛰어야겠다고 생각했다.

D씨가 입사 할 당시 시급은 2500원이었다. 세금을 떼고 110만원을 받았다. 그래도 임단협 타결 성과급이 나오면 그게 그나마 위안이 됐다.

그는 처음에 멋도 모르고 특근 지원을 하면서 몸이 하나씩 고장 났다. 갑상선 기능항진증이 왔다. 눈이 돌출했다. 그 다음부터는 돈이 우선이 아니다 싶어 특근을 자제했다. 당시 특근을 하면 7만원을 받았다.

그는 고용불안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밝혔다. “차종이 바뀌면 모듈이 섭니다. 그때 고용이 제일 불안합니다.” 매년 계속 되는 고용불안은 이들을 진저리 치게 했다.

2-30대 사회 첫발 비정규직으로 내 딛고 영원한 비정규직


이들 비정규직의 삶을 불안하게 만든 노동유연화는 1998년 외환위기로 IMF(국제금융기구)의 구제기금을 받는 조건으로 추진됐다. 이에 따라 직업안정법상 노동력 거래에 대한 규제가 축소되고 간접고용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노동유연화 전략은 1998년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의 제정을 이끌었고, 직업안정법상 금지된 유료 근로자공급사업에서 “근로자 파견사업”을 예외로 허용했다. 사실상 노동력에 대한 중간 거래가 합법화 된 것이다. 이는 현대차 사내하청 업체처럼 노동력에 대한 중간 거래를 통해 이익을 취하는 인력업체의 성황을 불렀다. 노동력 중개행위를 두고 노동계는 “본질적으로 인간을 거래하는 것”이라고 반발해 왔다.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대표는 이런 하청 노동자들의 실태를 두고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됐다고 진단했다. 간접고용과 비정규직 일자리로 인해 안정적인 청년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김혜진 대표는 “현재 비정규직이 몇 %냐가 아니라 신규 취업하는 일자리에 정규직 일자리가 몇 %냐가 비정규직 문제의 척도가 된다”며 “이미 2-30대는 처음부터 비정규직으로 취직하게 되고 한번 비정규직은 계속 비정규직으로 사실상 정규직은 불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김혜진 대표는 “정부나 재계는 청년실업자들에게 눈높이를 낮춰서 취업을 하라고 하지만 청년들은 한번 비정규직은 영원히 비정규직이 됨을 느끼고 있다”며 “해가 갈수록 2-30대 청년 일자리는 압도적으로 비정규직 일자리가 많아지는 방식으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이어 “이제는 하나의 직장에 취직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장만하는 희망이 없는 상태가 됐다. 그런 희망이 어려우면 일자리를 통해 안정적인 삶을 사는 꿈을 꾸는 게 불가능해 지고 불만이 누적 된다”며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그동안 희망이 없는 불안한 삶인데도 그 불만을 터트릴 대상이 모호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현대차 비정규직들이 원청 사업주에게 분노하고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은 중요한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울산=미디어충청,울산노동뉴스,참세상 합동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