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재판은 마녀사냥식 국가보안법 남용 문제와 우리사회에서 사회주의의 의식과 활동에 대한 판단이 주요 쟁점이라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또 이 재판에 서울대 김세균, 김수행 교수 등 지식인들이 대거 증인으로 등장에 법정이 마치 세미나 장을 방불케 했다.
3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진행된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오세철 교수 등 4인에게는 7년, 나머지 4인에게는 5년을 구형했다. 아래 글은 이날 오세철 교수가 법정에서 행한 최후진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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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진술
또 하나는 부르주아지가 항상 내뱉는 낙관론입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스스로 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장치를 내장하고 있고 투기를 근절시키면 실제 경제는 잘 운영되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두 가지 입장보다 더욱 세련되고 지배적 입장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순환적 위기로 규정하고 조용히 참고 기다리면 비바람이 그치고 순탄한 항해를 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19세기 자본주의에서 일어났던 광경이며 20세기와 21세기 자본주의 위기에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논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는 상승기에 있고 무한히 확장되는 19세기 자본주의의 위기였고 맑스도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이 위기를 과잉 생산의 전염병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과잉 생산의 경향은 기아, 가난, 실업을 가져왔지만 그것은 상품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은 상품, 너무 많은 산업, 너무 많은 자원 때문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은 경쟁을 통해 무정부로 체제를 끌고 가는 자본주의의 기능인데, 새로운 임노동과 상품을 찾아 새로운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생산관계를 확장하고 심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19세기는 위기의 순간을 건강한 심장이 뛰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20세기에는 1차 세계대전을 정점으로 이러한 상승기의 자본주의가 마감을 하고 전 지구가 임노동과 상품의 생산관계로 확장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자본주의를 1919년 코민테른은 “전쟁인가 혁명인가”의 시기로 규정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세계시장의 쟁탈과 통제를 위한 제국주의 전쟁으로 나아갔으며 다른 한 편으로 과잉생산 경향은 19세기와 달리 세계경제를 불안정과 파괴의 반영구적인 위기로 종속시키는 만성적인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모순은 2천만의 목숨을 앗아가고 20-30%의 실업자를 만든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인 1차 세계대전과 1929년 세계대공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는 한 쪽에 경제의 국가화를 통한 국가 자본주의라는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과 다른 쪽에 사적 부르주아지와 국가 관료주의가 결합한 자유주의국가들을 형성시켰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을 포함하는 세계자본주의는 25년 동안 재건과 부채 증가에 힘입어 예외적인 번영을 했으며, 정부 관료, 노조 지도자, 경제학자, 자칭 “맑스주의자들”까지 자본주의가 결정적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했다고 호언장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67년 파운드화의 평가절하, 1971년 달러위기, 1973년 오일 쇼크, 1974-75년의 경기 후퇴, 1979년 인플레이션 위기, 1982년 부채 위기, 1987년 월스트리트 위기, 1989년 경기 후퇴, 1992-93년 유럽 통화의 혼란, 1997년 아시아의 ‘호랑이’와 ‘용’의 위기, 2001년 미국의 “신경제”의 위기, 2007년 서브프라임 위기, 2008년 리먼 브라더스 등 금융위기, 2009-2010년 재정위기로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연속되는 위기는 ‘순환적’ 위기, ‘주기적’ 위기입니까? 백 번, 천 번 아닙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결코 치유할 수 없는 병, 지불능력이 있는 시장의 부족 때문이며 이윤율 저하 때문입니다. 1929년 세계대공황은 거대한 국가 개입을 통해 극단적인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지만, 요즈음의 금융위기, 재정위기처럼 국가의 구제금융이나 국가부채라는 단기 처방으로는 자본주의라는 체제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고, 생산력의 확대가 불가능한 막다른 길목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는 그 막다른 골목에서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국가부채에 의존하는 것이며 과잉생산의 출구를 가공적인 시장의 창조에서 찾는 것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세계 자본주의는 엄청난 부채를 짊어짐으로써 재앙을 피해 왔습니다. 자본주의에서 부채는 마약중독자에게 마약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모든 부채의 결과는 지불 가능한 시장을 찾지 못하고 결국 전 세계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전 세계 노동자의 가난,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생태적 재앙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끝나가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갑작스런 파멸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자본주의 역사에서 서서히 끝나는 마지막 단계, 체제 몰락의 단계입니다. 우리는 100년 전의 “전쟁인가, 혁명인가”의 화두를 진지하게 꺼내들고 다시 한 번 “야만인가, 사회주의인가”를 말하는 역사적 인식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실천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는 혁명적 맑스주의 원칙에 올바르게 설 사회주의자들의 단결과 통일을 요구합니다. 화폐, 상품, 시장, 임노동, 교환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이 살아 숨쉬는 노동해방 사회의 건설을 위해서 말입니다.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에서 이윤율 하락과 시장 포화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총체적 위기가 임계점에 다다랐음은 이미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 분석으로 확인된 것이지만, 지금은 야만으로서의 자본주의와 문명으로서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본주의 체제는 임금노예도 먹여 살릴 수 없는 체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매일 굶주림으로 10만 명이 죽어가고 있고 10세 미만 어린이는 매 5초마다 죽습니다. 8억 4천 2백만 명이 만성적인 영양실조로 고통 받고 있으며 60억 인구 중 20억이 식품비 인상으로 매일매일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는 경제번영의 환상을 유지할 수 없는 체제입니다. 인도와 중국의 경제 기적은 환상임이 드러났으며 중국에서는 2008년 상반기에 2천만 명이 해고 되었고, 6만 7천개의 회사가 파산했습니다.
셋째, 생태적 재앙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지구의 온난화를 보면 지구의 평균 온도는 1896년 이래 0.6% 증가했고, 20세기는 북반구에서 지난 천 년 동안 그 이전보다 가장 심각한 온난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눈 덮인 지역은 1960년 말 이래 10% 감소했으며 북극빙하의 두께는 40% 감소했습니다. 평균 해수면은 20세기 동안 10-20% 상승했는데, 이러한 해수면 상승은 지난 3천년 보다 10배 증가한 것입니다. 또한 90년 동안 지구에 대한 약탈은 남벌, 토양 침식, 오염(공기, 수질), 화학 방사능 물질의 살포, 동식물의 파괴, 전염병의 폭발 등으로 나타나 생태적 재앙은 종합적이고 지구적 형태로 구성되어 앞으로 얼마나 심각해질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에 맞선 계급투쟁의 역사는 어떠했습니까? 계급투쟁은 항상적이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제1인터내셔널은 상승기 자본주의의 능력 때문에, 제2인터내셔널은 혁명주의의 포기와 민족주의 때문에, 그리고 코민테른은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한 스탈린주의의 반혁명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특히 1930년대 이후의 반혁명세력은 국가자본주의의 본질을 호도하면서 ‘사회주의’를 참칭하였고, 결국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양 진영의 대립을 위장하면서 세계노동자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해 왔습니다.
더구나 1989년 동구블럭과 스탈린 체제의 몰락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명백한 승리”, “계급투쟁의 종말”, 그리고 심지어 노동계급 자체의 종말이라고 떠드는 부르주아지의 캠페인은 노동계급을 그 의식과 전투성 수준에서 심각하게 후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1990년대 동안 노동계급은 투쟁을 전적으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기의 투쟁의 기관이었던 노동조합에 필적할 폭이나 그리고 능력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89년 이래 노동계급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의 연금에 대한 공격에 대한 반대투쟁이 전기가 되었습니다. 노동자의 투쟁은 대부분 중심 국가에 영향을 주었는데, 미국의 2005년 보잉과 뉴욕 교통의 투쟁, 독일에서는 2004년 다임러와 오펠 투쟁, 2006년 봄 의사 투쟁, 2007년 독일 텔레콤 투쟁, 영국의 2005년 8월 런던 공항 투쟁, 프랑스의 2006년 CPE 반대 투쟁이 있고, 주변부 국가들로는 두바이의 2006년 봄 건설 노동자 투쟁, 방글라데시의 2006년 봄 방직 노동자 투쟁, 이집트의 2007년 봄 방직 노동자 투쟁 등이 있습니다.
2006년 이후 2008년까지 벌어진 세계의 노동자 계급의 투쟁은 이집트, 두바이, 알제리, 베네수엘라, 페루, 터키, 그리스, 핀란드, 불가리아, 헝가리, 러시아, 이탈리아,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중국 등 전 세계로 확대되고 있으며 2009년부터 심화되는 대공황과 자본주의의 위기에 맞선 노동계급의 투쟁은 최근 프랑스에서의 연금개혁에 대한 반대투쟁에서 보듯이 점점 치열한 공세로 나아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위와 같은 세계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쇠퇴의 마지막 경향과 그 위기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전가는 예외 없이 전 세계노동자들의 필연적인 투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닌 동물과 같은 야만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존엄성으로 행복하게 살 것인가의 기로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모순의 깊이와 폭은 이른바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수준보다 더욱 심각하고 이미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를 쌓아온 유럽의 국가들의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참상보다 훨씬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G20 정상회의의 한국 개최라는 허장성세나 총량적인 경제 지표로 말할 수 없는 계급적인 인간의 삶의 문제입니다.
자본은 본래부터 세계적이었고 민족 자본끼리의 경쟁과 다툼은 있었지만 항상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를 위해 손잡고 그 위기를 은폐하고 노동자인 인간을 공격해 왔습니다. 노동자는 자본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윤극대화와 무한경쟁의 법칙으로만 움직이고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와 싸웁니다.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맑스주의자는 이와 같은 인류사회의 역사법칙과 사회체제의 법칙의 본질을 파헤치고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위한 방향을 제시하며 이를 가로막는 비인간적인 체제와 법칙을 비판하고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계급과 함께 싸워왔습니다.
그를 위해 당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투쟁적 실천을 해 왔습니다. 적어도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이러한 맑스주의자들의 실천이 법적인 제재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들의 사상과 실천이 인류사회의 진보에 공헌했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버금가게 맑스의 「자본론」이나 「공산주의자 선언」등 저작들이 폭넓게 읽히고 있습니다.
이번의 사노련 사건은 한국사회가 얼마나 야만적인 사상 탄압을 하는 사회인지를 전 세계에 드러내는 역사적 사건이며 세계의 사회주의 재판 역사에서 오점으로 남을 것입니다. 앞으로 보다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사회주의 운동, 맑스주의 운동이 세계적으로나 우리나라에서 폭넓게, 그리고 힘차게 펼쳐질 것입니다. 사법기구가 조직사건은 다룰지 모르지만, 사회주의 운동, 맑스주의 운동은 억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인류와 노동자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 운동과 실현이 법의 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존경과 신뢰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