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말에게 재갈을 물린다. 욕조에서 나오자마자 사슬달린 재갈이나 두꺼운 벨트로 말의 발을 단단히 묶는다. 완벽한 무구들, 고삐와 엄지손가락을 죄는 고문 도구들을 지체 없이 장착한다. 그것들을 마구에 장착한다. 그리고 음경을 금속케이스에 집어넣는다. 주인의 뜻대로 낮이나 밤이나 2시간 동안 고삐를 죈다. 3, 4일간 감금. 고삐는 단단히 조이고 헐거워지기를 반복한다. 주인은 말에게 다가갈 때는 언제나 채찍을 들고 있으며, 채찍질을 한다. 말이 참지 못해 저항하면 고삐를 더 단단히 죈다.
사육과정을 통해 야생말의 욕망은 재배치되어 주인이 쥐는 고삐와 채찍, 편자의 발에 혼연일체가 되어 움직일 수 있는 사육된 말로 다시 태어난다. ‘들뢰즈’는 이러한 방식으로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드는 것은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으며, 욕망을 재배치하는 것을 통해 욕망의 흐름이 자유롭게 횡단하고 기쁨으로 소용돌이치는 사회를 향해 획기적으로 변혁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들뢰즈’의 주장처럼 욕망과 신체의 해방과정은 먼 후일의 과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실천 속에 담겨있는 것이라는 확신으로 프랑스의 노동자계급은 당당하게 총파업의 깃발을 올렸다.
“정년 2년 연장” 반대 투쟁으로 프랑스 전역은 봉기를 가늠하게 하는 투쟁들이 물결치고 있다. 이 투쟁에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대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결합하며 ‘68봉기’를 가늠하게 하는 노학연대가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다.
정유공장노동자들의 파업으로 프랑스는 연료가 바닥난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는 거 같고, 미화원 노동자들이 파업과, 교통, 운수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민들의 발이 묶이고 불편이 늘어나고 있지만, 프랑스 시민들의 파업지지율은 증가되고 있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청소년들은 “‘사르코지’ 네가 청소년들이 거리로 나오도록 꼬드겼어”라고 외치며, 시위대들은 ‘파리 교외로의 명랑한 산책으로는 더 이상 투쟁의 의미가 없다’, ‘우리가 국가경제를 마비시켜야만 지배계급의 관심은 우리를 향할 것이다’라고 외친다.
프랑스 ‘국립청소년교육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혁명적인 행동에 의해 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켜야 한다”고 응답한 청년의 수는 80년대 11%에서 현재 28%로 급격히 늘어나고 있으며, 사르코지 집권 이후 집회, 시위에는 프랑스 청년 절반가량이 참여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는 가운데, 방학과 휴가를 마친 11월, 프랑스 노동자들의 근본적 변혁을 향한 투쟁에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몇 개월 전부터 야단법석을 떨었던 11월 11-12일 G20 서울회의는 지난 수 십 년간 노동자민중을 고통의 나락으로 밀어 넣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정책과 구조를 온존시킴으로서 노동자계급 내부의 대립관계를 더더욱 강화시키려 하고 있을 뿐, 경주 재무장관회의 결과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프랑스 정상회담 일정만 결정한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태일 열사 40주기 노동자대회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열렸다.
전태일 열사 정신은,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지 않는 세상,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세상”을 꿈꾸는 해방정신이며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결의의 집합이 노동자대회의 전통일 것이다.
열사정신 계승의 외침이 매년 반복되어도 70년대 청계천은 중단되거나 달라진 것이 아니라 진행형일 뿐이다. 때문에 ‘투쟁의 상징 전태일’에서 ‘인간적 전태일’을 꿈꾸는 건 시기상조가 아닐까.
40년 전, 그를 죽음으로 내 몬 구조적 폭력은 현재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무기를 하나 더 빼들고 노동자계급을 공격하며 70년대 청계천인 영세사업장과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배고픔에 대한 호소조차 가로막으며 노동자계급 내부의 대립구도를 통해 ‘사육하는 말’을 만들어 가고 있다.
모순에 저항하고 절규하며 투쟁하는 열사의 정신이 발견되지 않고, 열사의 행렬이 반복적으로 이어지고 있어도 그 정신은 가을바람에 낙엽 흩날리듯, 분산고립의 형태로 부각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노동해방정신의 명맥을 이으며 열사정신 계승을 외치는 대오가 ‘노동해방 선봉대’였다.
2007년부터 매년 11월 초에 ‘노동해방선봉대’를 조직하여 전국 각 지역과 투쟁현장에서 사회변혁운동을 전파하고 당면 노동자민중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활동해 왔다. 올해도 11월 4일 서울 양재동을 출발하여 전국 투쟁현장을 돌고, 전태일의 해방정신을 선전, 선동하며 노동자대회 전야제에 결합함으로서 그 일정을 마쳤다.
‘노동해방선봉대’의 선전선동은 민주노조운동의 변혁지향에 대한 노선을 복원해 내고, 활동가들의 실천적 모습과 결의를 통해, 당면한 현재 위기를 극복하고, 70년대의 전태일을 오늘의 전태일로 부활시키기 위한 몸부림이 ‘기관 없는 신체’에 뜨겁고 격동적인 심장의 박동을 부추긴다.
정년을 늘이는데 반발하는 프랑스 청년, 노동자들. 정년을 늘리기 위해 투쟁해야하는 한국의 노동자들, 상반되는 요구가 작금의 상태를 반영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회복지조차도 투쟁에 비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고 근본적 변혁이 수반되지 않는 한, 이런 모순은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게 진실이다.
노동자대회에 결집된 대중적 투쟁의지가 도처에서 분출하고 있으며 공권력을 앞세운 이명박정권의 공세도 만만치 않다. 재능을 비롯한 특수고용의 문제는 해결기미를 보이지 않고, KEC노동자들에 대한 총체적 탄압에 대한 대응은 병원에 갇혀 있으며, 용산참사는 대법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수원과 광명에서는 철거민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쌍용차는 전망 없는 졸속매각으로 제2의 상하이차를 반복하고 있다. 현대차 비정규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며 불안정노동에 저항하며 생존을 향한 투쟁의 깃발을 올렸다.
들뢰즈의 논리적 철학과 전태일의 해방 철학이 결합하여 거대하게 조직된 ‘노동해방선봉대’를 힘 있게 조직하고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모순에 따른 저항을 조직하고 실천하는 것은 현 시기 노동자계급이 기본 임무가 아닐까.
분출하는 투쟁의 물꼬를 열어 내고, 도처에서 진행되는 투쟁을 계급적 투쟁으로 발전시켜, 투쟁대오의 한가운데 노동해방의 깃발을 세워내며,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투쟁으로 확산되어, 광란의 자본주의를 척결하고 해방된 세상을 열어가는 거대한 횃불이 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