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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에 빼앗긴 ‘빛’, 두리반이 만드는 ‘희망의 빛’

[기고] 두리반은 전기가 없어도 길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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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아! 잠자다가 깨면 막 화가 나가지고 잠을 못 자요. 열이 나가지고. 어이없이 (내가) 끌려나오다니……. 폭력적으로 나를 끌어냈다는 거. 그렇게 (사람을) 끌어내도 되는 이 나라 법. 내가 세금 잘 내고, 죄짓지 않고 이제껏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그렇게 하루아침에 나를 끌어낼 수 있다니, (아니) 내가 어처구니없이 끌려 나갈 수밖에 없게 만들어놓은 이 나라 법. 그리고 나를 그렇게 끌어낸 그 인간들. 그 분기를 삭힐 수가 없는 거예요. 홧병이 들 정도로…….”

[출처: 사진 신대기]

여기서 말이 끊겼습니다. 눈시울이 불거지고 얼굴도 빠알갛게 달아오릅니다. 가쁘게 차오르는 숨을 억누르려고 깊게 숨을 들이쉽니다. 하지만 몸 깊숙이에서 치받혀 터진 한숨이 이성을 어이없이 무너뜨립니다. 전등이 있지만 켤 수 없는 공간, 그곳에 한 맺힌 숨소리가 메아리칩니다. 스멀스멀 창문 너머로 어둠이 밀려옵니다.

쉰세 살 안종녀. 자그마한 키에 또렷하고 야무진 눈 코 입. 도톰한 귓불.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당당함이 흠씬 배인 ‘맨얼’에는 세월이 비켜간 듯 주름살이 없습니다. 가지런한 하얀 이처럼 자신의 생각을 차곡차곡 정돈해서 이야기하던 안종녀. 눈가에 똑, 눈물이 맺히자 그간의 시간이 마구 흐트러집니다. 순간, 자음은 사라지고 모음만이 어두운 공간을 지배합니다.

[출처: 사진 신대기]

안종녀는 칼국수 집 사장입니다. 아니 사장이었습니다. 2009년 12월 24일 늦은 세 시 십칠 분까지는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 167의 31번지에 자리한 두리반의 사장이었습니다. 식당 안 마흔두 석을 빼곡하게 메웠던 점심 손님들이 떠나고, 띄엄띄엄 늦은 끼니를 챙기러 찾아들던 손님들도 끊길 즈음, 마지막 손님이 칼국수 국물을 들이켜고 천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을 탁자에 두고 출입문을 나서자마자, 안종녀의 삶은 확, 바뀌었습니다.

우악스런 사내들이 두리반 출입문을 밀치고 들어왔습니다. 식당의 집기들이 하나둘 들려나갔습니다. 내 식당의 내 물건들이 파장한 장거리에 나뒹구는 배추우거지처럼 길가에 널브러졌습니다. 끝내는 식탁 의자 칼 접시 냉장고 도마 대접 솥과 함께 안종녀의 몸뚱이도 거리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누구나 다 똑같았을 거예요. 어떤 사람이 자기 가게를 이런 식으로 빼앗기고 그냥 있을 수 있겠어요. 제가 마지막으로 들려나오자 제 가게를 빙 둘러 펜스가 쳐졌어요. 물건을 들어낼 때 옆에서부터 펜스를 치고 왔었나 봐요. 마지막으로 나를 내쫓고 출입문마저 딱 (펜스를) 치는데, 아……, 그때서야 실감이 나는 거야. 우중충한 잿빛 펜스를 보니 묘하더라고요. 내가 범접할 수가 없고 들어갈 수 없고 들어가면 안 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더라고요. 인제 막 가슴이 철렁철렁하는 거예요. 인제 정말 내 가게를 빼앗겼구나. 그 절망감, 그 막막함이 잿빛 펜스랑 아주 엄청나게 닮았어요.”

[출처: 사진 신대기]

안종녀 씨는 2005년에 시설투자비 1억300만원, 보증금 1,300만원을 내고 홍대입구역 가까이에 있는 한 건물에 입주해 칼국수 집을 열었습니다. 십년 가까이 옷 수선 집, 사우나 매점, 찜질방 식당을 하며 번 돈에 빚을 보태어 시작한 식당입니다. 가난한 소설가와 함께 운명을 동반한 안종녀. 자그마한 손마디에 생계의 무게가 톡톡 불거지도록 일해서 모은 돈을 탈탈 털은 겁니다.

두리반은 여럿이 둘러앉아서 먹을 수 있는 둥근 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상에 남편이 쓰는 소설의 원고지가 놓이고 두 아들의 장래가 달려있었습니다. ‘욕심 없이 이 식당만 꾸려나가면 남편이 소설 창작에 집중할 수 있고, 자식들 배 굶게는 하지 않을 거야!’ 안종녀는 소박한 바람으로 식탁을 닦고 설거지를 했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 밤 열시 너머까지 식당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었지만 콧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2.
2007년, 두리반 옆에 도시공항철도 역사가 세워진다는 계획이 나오자 안종녀의 희망은 무너졌습니다. 주변 땅 값이 수직을 그으며 올랐습니다. 두리반이 있던 건물도 팔렸습니다. 이 건물은 세입자 보호의무가 없는 민간 기업이 주도하는 ‘지구단위계획구역’에 속하였습니다. 안종녀는 한 푼 보상도 없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평생 모은 돈에 빚이 포함된 일억 원이 넘는 시설투자비가 고스란히 허공으로 사라졌습니다.

“두 해 장사를 했는데, 건물이 팔렸다고 나가래요. 빚도 갚지 못했는데, 시설투자비 한 푼 보상해주지 않고 나가라는 거예요. 식당이 빼앗기게 생겼다니까 둘째(아들)는 다니던 영어 학원을 그만두고, 휴대폰도 딱 반납했어요. 혼자 공부하겠대요. 첫째(아들)는 수능이랑 다 보고 대학 입학 앞두고, 집안이 이렇게 되니까, 지난 오월에 군대에 자진 입대했어요.”

철거 통보는 식당이 있던 건물만이 아닙니다. 남편의 창작, 두 아들의 학업, 안종녀의 삶도 철거 위기에 몰렸습니다. 스무 해 동안 차곡차곡 쌓아왔던 한 가정의 운명이 우르르 주저앉았습니다.

“시공사가 제게 주겠다는 돈이 이사 비용 삼백만 원뿐이어요. 그걸 준다면서 강제로 (식당을) 들어내겠다는 거예요. 일억 넘는 돈을 투자했는데, 꼴랑 삼백만 원 받고 제 발로 걸어 나갈 사람이 어딨어요! 용산 철거민은 살려고 망루에 올라갔는데, 내 같은 경우에는 죽고 싶더라고요. 내가 어떻게 죽어야 잘 복수 할 수 있을까? 정말 칼을 물고 죽어야 할까, 휘발유를 뿌리고 죽어야 될까, 그런 심정이었어요.”

안종녀는 식당에서 쫓겨난 바로 다음날, 자신의 키보다 높은 울타리에 갇힌 두리반 앞을 하루 종일 서성였습니다. 이왕에 쫓겨난 것 이제 잊고 다시 시작하자는 생각이 슬그머니 찾아들었지만 이내 도리질을 쳤습니다. ‘저 벽을 허물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 수가 없다!’ 자신과 두리반을 갈라 세운 잿빛 펜스가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여겨졌습니다.

철물점으로 갔습니다. 굵은 철사를 끊는데 사용하는 절단기를 샀습니다. 절단기를 가슴에 품고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12월 26일 새벽 1시. 안종녀는 절단기를 들고 두리반 앞으로 갔습니다. 찬바람이 휘잉, 불었습니다. 얼굴을 감싼 스카프를 벗어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었습니다.

“제가 잘랐어요. 유채림 씨(남편)가 주저주저하는 거예요. 절단기를 이리 주라고, 내가 자르겠다, 그랬어요. 내가 짤랐어요. 초조하고 불안하고 누가 쳐다볼까 싶고 그랬는데, 철사를 짜르고 철판을 걷어냈어요. 아무 생각도 안 났어요. 정신없이 짜르는데 누가 나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요. 더 미친 듯 짤랐어요. 누가 그만 짜르라고 막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용역들인 줄 알고 더 정신없이 절단기를 놀렸어요. 누가 내 어깨를 낚아채는데, 유채림 씨였어요.”

안종녀는 남편을 ‘유채림 씨’라고 부릅니다. 연애 때는 ‘해성 씨’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소설가 남편의 필명을 부릅니다. ‘채림 씨’라 부르면 여자 이름 같아 성을 함께 부릅니다.

“제가 펜스를 뜯고 들어가자고 그랬더니 유채림 씨가 이래요. 소설 써서 돈 벌어갖고 쪼그맣고 이쁜 가게 내줄게, 하지 말자, 하지 말자, 그랬어요.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내가 철거될 건물에 들어가 버티면 유채림 씨가 편안히 집에서 소설을 쓸 수 있겠어요? 아이들이 제대로 공불할 수 있겠어요? 그걸 뻔히 알면서 이 길을 택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어제까지 내가 장사를 했던 내 가겐데 이렇게 쫓겨나다니, 도저히 용납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숨이 안 쉬어 지는 거예요. 내가, 숨이, 가슴이 콱 막혀가지고 아주 죽을 것 같더라고요. 만약 그때 겁나고 두려워서 결국 (가게를) 포기했다면, 아마 집에서 가슴 치며 살다 죽었을 거예요.”

안종녀는 두리반에서 죽겠다는 마음으로 울타리를 걷어냈습니다. 다시는 쫓겨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2009년 연말, 세입자의 권리를 뭉개며 진행되는 철거에 맞선 두리반 농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죽으려고 들어간’ 두리반에서 안종녀는 새로운 빛을 찾았습니다. 두리반의 ‘기막힌 사연’이 알려지자 홍대 주변 클럽에서 ‘아트’하는 인디밴드들이 몰려왔습니다. 대학생이 찾아오고, 시민들이 함께 하고, 문학인들이 나섰습니다. ‘엄보컬’과 ‘김선수’는 매주 월요일 ‘하늘지붕음악회’, ‘푸른영상’은 화요일마다 ‘다큐상영회’, 금요일에는 ‘칼국수음악회’, 토요일에는 ‘자립음악회’로 두리반 너른 밥상을 풍성하게 차렸습니다. 그렇게 200일이 넘어서자 두리반은 홍대 앞 ‘명소’로 자리를 굳혔습니다.

[출처: 사진 신대기]

3.
‘현대인에게 전기는 물과 공기나 마찬가지로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기본요소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이 들어가 사는 교도소에도 전기는 넣어주며, 포로수용소에도 전기는 들어온다. 두리반이 교도소나 포로수용소보다 못한 곳이란 말인가!’ - 박일환 시인 <결국 두리반에 전기가 끊겼다> 가운데서

두리반 농성 208일째인 지난 7월 21일, 한국전력에서 전기를 끊었습니다. 조금씩 희망의 싹을 틔우던 두리반이 한순간 암흑이 되었습니다. 선풍기 날개가 멈추고 웅웅 울던 냉장고가 숨죽였습니다.

‘빛으로 밝은 세상을, 사랑으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겠습니다. 세상에 빛을, 이웃에 사랑을’- 한국전력의 CF 영상에서

아름다운 가락에 맞춰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뛰노는 텔레비전 광고와 달리 한국전력은 ‘단전’으로 어두운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이웃에게 사랑’은커녕 가족의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으려고 합니다. ‘세상에 빛’은커녕 한 가족을 세상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전력회사가 만든 암흑에 맞서 빛을 만드는 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곳곳에서 건전지로 켜지는 전기촛불을 두리반으로 보냈습니다. 출근길 시민들이 출근카드를 찍듯 아이스박스에 채울 얼음 팩을 두리반에 건네주고 일터로 갑니다. 냉장고가 멈췄지만 두리반에서는 시원한 물이 쉼 없이 솟아납니다. 자전거 발전기가 들어서고 태양열 발전기를 옥상에 세웠습니다. 한국전력의 전기가 없어도 일렉트릭 기타의 멋진 연주가 두리반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두리반을 아끼는 사람들이 스스로 전지의 음과 양이 되었습니다. 이웃이 어우러져 밝힌, 세상의 단 하나 뿐인 빛을 만들었습니다.

[출처: 사진 신대기]

4.
“혹시 소설이나 시를 쓰진 않았어요?”

주섬주섬 취재수첩을 챙기다가 물었습니다. 안종녀의 얼굴에는 소설가 유채림보다 더 그윽한 문학의 빛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문학을 좋아해서 서점에서 일했고, 서점에서 일하다 작가를 꿈꾸던 유채림 씨를 만났어요. 부평의 서점에서 일했는데, 성탄절 날 카드를 사려고 (유채림 씨가) 들어온 거예요. (대목이 지났으니) 카드를 싸게 주겠지 싶어 온 거래요. 그런데 서점에서 카드를 싸게 팔지 않거든요. 남은 것은 다 반품하니까요. 가격대로 오백 원이라고 하니까 못 사는 거예요. (카드를) 못 사고 가는데, 남자가 돈 오백 원이 없어서 카드를 못 사고 뒤돌아 나서면 뒤통수가 얼마나 뜨거울까 싶어 제가 불러서 그냥 카드를 줬어요. 제가 줬더니 고맙다고 말하고 돌아서서 가다가 다시 저한테 온 거예요. 종이를 쭈뼛하며 내밀어요. 자기가 쓴 시라고 주는 거예요.”

[출처: 사진 신대기]

남편과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찢어진 속옷 차림으로 검정 고무신을 신고 서점에 나타나는 가난한 문학청년 유채림. 안종녀를 만나면 첫 마디가 “배고프다”였습니다. 그래도 이 남자와 결혼하면 문학에 대해 밤새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습니다.

“저는 문학을 사랑했어요. 그래서 유채림 씨랑 결혼했는지 몰라요. 내가 유채림 씨랑 결혼하면 뭔가를 배울 것 같아서. 막상 결혼을 하니…… (잠시 침묵 뒤 목소리가 떨리며) 정말 결혼해서 산다는 것은, 정말 아이를 낳아서 키운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현실이더라고요. 가난한 소설가 남편과 살아야하니……. 정말 내가 시나 소설을 쓰고 싶었으면 직장 잘 다니는 신랑이랑 결혼 했어야지, 소설가랑 결혼해서는 소설 어쩌구 저쩌구가…….”

안종녀는 일본의 다자이오자무의 소설을 이야기하고 사르트로의 ‘구토’를 말합니다. 이성복 시인을 좋아했고,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에 푹 빠졌던 젊은 시절의 기억들을 생생하게 살려냅니다.

“유채림 씨랑 결혼해 살면서 아마 이런 것도 있긴 있었을 거예요. 내 꿈이 있고 그 사람 꿈이 있는데 함께 하지 못한다는 거. 그런 불공평함. 누가 (문학에 더) 능력이 있고 그런 기준은 사실 없는 거잖아요. 제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당신도 당신 일을 하고 싶듯 나도 내 일을 하고 싶다, 솔직히 그렇게 (말)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엄마이기 때문에 여자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거의 포기해야 되는 그런 거……. (말을 멈추고 한동안 손으로 볼을 쓰다듬다가) 유채림 씨랑 살면서 힘들고 가난하고 그런 거 때문에는 불행하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가난한 소설가의 아내로 산다는 것’을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손 마디마디에 툭 불거져 쓰여 있으니까요. 안종녀는 자신이 포기한 젊은 날의 꿈을 훗날에 ‘나 억울하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며 열 손가락을 번갈아 주무릅니다.

“농성을 하다 보니 남편이 변한 것 같아요. 그니까 남편은 남편인데, 함께 농성을 하니까 동지기도 하잖아요. 근데 두리반에서 동지를 찾다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는 남편 행세를 하는 거죠. 남편의 권위라든가, 이런 걸 내세우며. 생각이 다르면 동지로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회의나 상의해서 결정해야 되는 것을 나 빼놓고 한다든가, 이러는 거죠. 동지로서 나를 인정하지 않고. 한번은 둘이 집에를 갔는데, 동지는 간데없고 남편만 있는 거예요. 농성을 한다는 이유로 다정다감했던 내 남편이 뻣뻣하고 차갑게 변했다가……, 남편이 필요할 때는, 남편은 간데없고 동지로만 있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도 소설가 유채림과 결혼하고 싶다는 안종녀. 그는 남편의 자리에는 남편이, 동지의 자리에는 동지가 있기를 바랍니다.

5.
이제 ‘사막의 우물, 두리반’ 농성 300일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견디는 것조차 굉장히 벅차고 힘든’ 안종녀의 시간, 이 시간은 안종녀의 잃었던 꿈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안종녀는 어떤 시인이나 소설가도 쓰지 못하는 문학작품을 온몸으로 또박또박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처: 사진 신대기]

“제가 다시 두리반을 차리는 게 목표고, 그게 승리라고 생각해요. 지금껏 함께 해주신 분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분들이 지금처럼 두리반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식당을 반드시 만들 거예요.”

야무지다 못해 아름다운, 그래서 더욱 빛나는 안종녀. 전기가 없어도 두리반에서는 길을 잃지 않습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암흑 속에서 빛을 만들고 세상에 없는 길을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사방이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 오롯이 서 있는 두리반. 언젠가 건물은 철거될 겁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무너졌던 꿈이 새롭게 주춧돌을 세우고 지붕을 이을 겁니다. 그날, 너른 둥그런 밥상에 여럿이 둘러앉아 칼국수를 나눌 겁니다.
덧붙이는 말

이 글의 전문은 진보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 11,12월 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 그렇군요!

    그렇군요!
    많은 분들의 마음과 손길, 참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는 좋지 않은 일도 많이 일어나지만,
    이렇게 힘든 분들에게 쏜살같이 향하여 함께 하는
    분들도 참 많네요^^

    항상 힘 내시길 빕니다.
    너무나 당연한 권리에의 요구를 '승리'로 표현하는 게 뭐합니다마는, 투쟁하시는 게 맞으니, 꼭! 승리하시기 바래요.

  • jaba

    여보~ 올 겨울엔 두리반에 연탄을 놔드려야겠어요~ *^^*
    두리반이 있어서 행복했고 두리반이 있어서 지금도 감동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두리반에서 먹었던 얼큰한 얼큰이칼국수를 다시 먹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