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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정규직 동지들께 간곡히 호소드립니다“

[비정규직없는 공장 꿈꾸며](1) 사내하청 노동자가 정규직 동지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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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태워버릴 것 같던 한여름의 뜨거운 더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저만치 물러가고, 아침저녁으로 옷깃을 여미게 하는 쌀쌀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대법판결 이후 정규직화에 대한 뜨거운 열망과 일말의 불안

저는 대형트럭과 버스를 생산하는 현대차 전주공장에서 2003년부터 8년째 트럭을 만들고 있는 사내하청 노동자입니다. 추석 연휴가 지난 후 토요일 아침 8시부터 일요일 아침 8시까지 24시간 철야 근무를 마치고 책상에 앉아 이렇게 정규직 동지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지난 7월 22일 대법원에서 현대자동차에서 2년이 지난 사내하청 노동자는 정규직이라는 판결이 난 후 두 달이 훌쩍 흘렀습니다. 2005년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 이후 불었던 불법파견 정규직화의 바람이 대법원 판결 이후 다시 공장을 휘감았습니다.

전주공장은 900여명의 사내하청 노동자 중 금속노조 조합원이 200여명에서 370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울산공장과 아산공장의 분위기도 뜨겁게 달아올라 3개 공장의 비정규직 조합원은 950명에서 2700명으로 3배 가까이 증가했고, 정규직화에 대한 열망은 어느 때보다도 높습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현대차 자본과 5년 전 패배의 기억으로 여러 동료들이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기 계약직으로 보낸 9개월

2003년 12월이었습니다. 학교 친구의 소개로 현대차 전주공장 트럭부의 평화기업이란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차 전주공장의 업체’라는 친구의 얘기를 듣고, 저는 ‘그래도 업체 직원이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공장에 들어가자 관리자들은 저를 ‘단기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단기직’은 아르바이트와 비슷한 개념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 학교를 졸업하지 않아 졸업식을 다녀오겠다며 월차휴가라는 것을 처음 쓰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업체의 관리자는 “안가면 안 되겠냐, 네가 빠지면 누가 네 자리에서 일을 하냐?”는 등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권리라고 같이 일하는 정규직 형님들에게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저와 비슷한 단기직들은 “우리는 비정규직 중에 또 비정규직”이라며 자조 섞인 얘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렇게 9개월 동안 트럭공장에 이 곳 저 곳을 옮겨 다니며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내하청업체의 노사협의회 위원으로 “하청업체의 직원을 뽑을 거면 현재 우리 업체의 소속인 단기직을 채용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운이 좋게도 사내하청업체인 평화기업의 ‘단기직’ 사원이 아닌 직원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깨달았습니다. 비록 힘이 없고 언제 짤릴 지 모르는 비정규직이지만 모여서 한 목소리를 내고 같이 행동하면 뭔가는 조금 바뀔 수 있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005년 2월 금속노조 현대차전주 비정규직지회가 설립되면서 노조에 가입하고 대의원을 시작으로 열심히 노조활동을 했습니다. 단기직 노동자들을 나처럼 업체의 직원이라도 만들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2005년 패배의 아픔을 딛고 지켜낸 노동조합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동부에서 현대차의 100개가 넘는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2005년과 2006년 저는 희망을 보았고 열심히 투쟁하였습니다. “사실은 내가 단기직도, 사내하청업체 직원도 아닌, 현대자동차의 정규직이 되었어야 했구나”라는 생각이 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파업을 하고, 라인을 끊고, 공장을 점거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차 자본은 역시 대단했습니다. 노동부의 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해 해고, 징계, 급여가압류, 고소․고발 등 숱한 탄압을 계속하였습니다.

현대차는 정규직 신규채용을 미끼로 업체 사장, 관리자, 정규직 노동자 등 온갖 인맥을 동원해 노동조합 탈퇴를 강요했습니다. 450명이던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은 하나둘씩 조합을 탈퇴하였고 200여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남은 200여명의 조합원들은 절대 노동조합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노동조합이 있음으로써 달라진 것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월차휴가를 제대로 사용할 권리, 아프면 산재를 신청할 권리, 분할당하고 차별당하지 않을 권리, 비정규악법으로 인해 해고되지 않을 권리, 스스로 나서서 투쟁할 권리, 죽지 않고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일할 권리, 노동3권을 보장받을 권리 등 달라진 것들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18명 정리해고에 맞선 아름다운 연대

2008년 가을 시작된 세계 경제위기는 자동차 노동자들, 특히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가혹한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2008년 11월 에쿠스공장 115명을 시작으로 현대차 울산과 아산공장에서 1천여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쫓겨났습니다.
GM대우차도 정규직 전환배치로 비정규직 1천여명을 짤랐습니다. 짤리지 않은 노동자들도 임금삭감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차 전주공장은 조금 달랐습니다. 정규직 동지들이 “단 한 명의 노동자도 공장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며 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회사는 물량감소를 이유로 수차례 구조조정을 시도했지만 정규직 노동자들이 회사와 협상을 거부하며 비정규직 해고를 막았습니다.

결국 회사는 2010년 3월 하루 8대 만들던 버스를 6대로 줄인다며 정규직 42명을 전환배치하고, 사내하청 노동자 18명을 정리해고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정규직 노동자 3,500명은 세 차례에 걸쳐 잔업거부 투쟁을 벌였고, 버스부 노동자들은 특근거부까지 전개했습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두 차례에 걸친 특근거부 투쟁과 함께 정규직 동지들의 투쟁은 ‘아름다운 연대’로 전국에 알려졌습니다. 비록 18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회사의 협박에 못견뎌 떠났지만 연대의 의미는 가슴 깊은 곳에 아로새겨졌습니다.

희망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비정규직만이 투쟁에 나섰다면 몹시 힘겹고 버거운 싸움이었을 테지만 정규직 동지들의 수많은 연대와 관심은 비정규직만의 외로운 투쟁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연대라는 결실은 많은 비정규직 동지들이 길거리로 내몰릴 위기를 막아 주었고,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대법원 판결 그리고 비정규직 없는 공장

2010년 7월 22일, 대법원의 판결은 저희에게 다시 한 번 희망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이제 우리 비정규직 동지들은 현대차 자본과 한 판 싸움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반쪽짜리 대법원 판결에 따른 2년 이상 근무한 사내하청만이 아니라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위해 싸울 것이며, 소송에만 치우치지 않고 투쟁하려고 합니다. 아침마다 전주공장 정문 앞 도로에서 시계탑까지 200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차 자본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2005~6년처럼 비정규직 동지들에게 온갖 탄압과 폭력을 가할 것입니다. 현대차가 노조에 새로 가입한 비정규직을 모두 탈퇴시키라며 업체 사장들을 협박하고 있다는 얘기는 매일매일 확인되고 있습니다.

정규직 동지들, 투쟁의 주체는 분명히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비정규직 동지들만으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정규직 동지들의 관심과 연대는 그 한계를 뚫고 나갈 소중한 무기입니다. 지난 3월 현대차 전주공장 정규직의 연대가 생생한 증거입니다.

추석 연휴에 저는 두 아이와 함께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습니다. 이번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반드시 승리해 비정규직 없는 공장, 비정규직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할 곳이 없는 사회, 간신히 취직해도 비정규직인 사회를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이 땅에 비정규직이 사라지려면 먼저 현대자동차 공장이 비정규직 없는 공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되어 마침내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현대차 정규직 동지들께 다시 한 번 간곡히 호소드립니다. 동지들의 관심과 연대, 투쟁은 전국의 85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크나큰 희망의 불꽃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