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청년유니온] |
청년 실업에 대한 뉴스를 들을 때면 남의 일 같지 않다. 밖으로 뛰쳐나가 기어이 담배 한 개비를 물게 된다. 참 생각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말이 청년 실업이다. 거기에 지방대 출신은 이 사회에서 더욱 차별받고 있다는 말까지 들으면, 담배 한 개비 정도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현실을 고발해주는 고마움보다는 너무 공고한 사실처럼 내뱉는 게 못내 아쉽다. 청년 실업도 서러운데, 지방대 출신이라고 해서 이 사회에서 웅크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도 너무 서글프다.
얼마 전 모 방송사의 뉴스에서 아예 지방대 출신을 ‘루저’로 표현했다고 한다. 솔직히 지방이라 해도 전주라는 제법 큰 도시에서 살고 있어서인지 지방대 출신으로서 받는 설움이 덜한 편이다. 하지만 요즘 같아서는 우리 사회가 지방대생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뼈저리게 알아버리고도 남는다.
고등학교 교실에(심지어는 중학교 교실에까지) 붙어 있는 급훈도 ‘10분 더 공부하면 남편이 바뀐다’거나 ‘3시간 자면 2호선 타고 4시간 자면 7호선 탄다’라는 문구가 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거기에는 아예 지방대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서울대ㆍ연대ㆍ고대는 ‘스카이(SKY)’고, 그 아래는 서울 내에 있는 ‘인(in)서울’이고, 그 한참 아래가 ‘지잡대(지방의 잡다한 대학)’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도는 것이다.
‘아직 풋풋하고 앞날이 창창하던’ 시절이 있었다
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청년 실업이라는 말은 그저 남의 얘기 정도로만 생각했다. 특히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2000년도까지만 해도 그다지 실감할 수 없었다. 물론 철이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나름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해서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은 라면만 끓여 먹고 살더라도 펜을 휘둘러 세상을 변혁하자라는, 정말로 ‘지구를 지켜라’식의 가당찮은 꿈속에 살던 시절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IMF 이후 신자유주의의 정책이 급속도로 추진되면서 이 땅 청년들의 삶과 생계가 위협받기 시작했던 초기였는데, 내가 너무 둔감했던 것이다.
아무튼 그때는 ‘아직 풋풋하고 앞날이 창창한’(정말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새내기라는 생각에 신나게 놀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잔디밭을 지나면 과 선배들이나 동기들 할 것 없이 적어도 한 무리 정도는 술을 마시며 잡다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도서관에 가도 친구들은 토익, 토플 책을 꺼내기보다는 시집이나 소설책을 펼쳐 보는 모습이 익숙했다.
그러다가 선배들은 어렵게, 그렇지만 그럭저럭 취업을 했고 후배들은 더 이상 잔디밭이 아닌 도서관에 처박혔다. 이런 모습들 사이에서 나는 갈 곳 몰라 방황만 했다.
창창하던 이야기가 ‘구질구질한 선배의 자기 과시’로 전락하고...
그렇게 한 해 두 해 학교를 다녔고 어느덧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때, 상황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함께 문학을 논하던 동기들은 입시학원에서 아이들에게 언어영역 문제의 정답 찍어주기에 열중했고, 다들 피곤해 보였다. 그리고 갓 입학한 후배들에게 예전의 이야기는 그저 무용담이고 구질구질한 예비역 선배의 자기 과시 정도일 뿐이었다.
학교 분위기는 취업과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흡사 회사와 같았고,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시가 안 써진다고 투정부리며 우는 친구도 없었고 글을 쓰기 위해 사색한다며 여기저기 떠도는 친구도 없었다. 그게 다는 아니었지만 상황이 역전되었던 것이다.
시와 문학을 사랑해서 문창과에 온 친구들은 어느덧 대출한 학자금의 이자라도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돈을 벌어야 했던 나와 친구들은 누구보다 현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점점 학점에 신경이 곤두섰고, 졸업 후 앞날에 대한 걱정과 투자에 온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대학 안에 이러한 변화가 진행되는 동안 나 역시 변신해야 했다. 그리고 가능할지 모를 ‘사회로의 입사’를 준비해야 했다. (삶이 보이는 창)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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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삶이 보이는 창' 2010년 9~10월 호에 실린 글입니다. 3회에 걸쳐 연재됩니다.(제휴=참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