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이들과 함께 특별면회를 다녀오셨는데, 주고받은 이야기는 무엇이었나요?
장씨: 아이들에게 당부의 말을 했어요. 아빠가 없더라도 엄마 말 잘 듣고, 속상하게 하지 말고 잘 지내고 있으라고요. 주머니에 홍삼 젤리를 넣고 와서는 하나씩 선물이라고 주더라고요. 평택구치소에 있을 때는 과자를 한 봉지씩 가지고 나와서 주었어요. 아이들은 교도관이 옆에 있어서인지 어색해하고 말을 잘 못하고 앉아만 있더군요. 평택보다 수원은 특별면회 시간이 짧아서 이야기도 많이 못했어요.
면회는 얼마 만에 한 번씩 가시나요?
장씨: 일주일에 한번, 일이 오후 4시에 끝나니까 화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어요.
전씨: 일주일에 두 번 한번은 화상으로, 한번은 면회해요.
구속되어 있는 남편이 미웠던 적은 없었나요?
전씨: 남편이 구치소에 있으니 남편이 필요 할 때, 아이들에게도 아빠 역할이 있는데 아빠가 없다고 느낄 때 미워요. 우리 나이에 남편이 옆에 있어줘야 하는데 너무 처량해요.
장씨: 미운 것보다는 화가 날 때가 많아요.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되나 싶기도 하고... 이러다 우울증 생기겠어요. 남편 앞에서는 안쓰러워서 화도 내지 못해요.
쌍용자동차 77일 파업이 끝나고 지난 1년 동안 제일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전씨: 아이들이 대학교 1학년, 고등학교 3학년 이다 보니 경제적인 문제지요. 청소년기에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가는데 여유가 없는 게 힘들어요. 또 큰 아이들을 남편 몫까지 챙기려니 혼자 감당이 안돼서 힘들지. 전에는 손이 좋지 않아서(수술을 두 번이나 해서 손에 힘이 없어요) 시장도 다 남편이 봐주었었는데... 없으니 빈자리가 너무 커요.
장씨: 경제적인 것이 제일 힘들지요. 생계 책임져야 하고, 안하던 일을 하려니까 몸도 따라 주지 않고... 요즘에는 땀도 많이 흘리고 많이 힘들어요. 젊었을 때 일을 해야 하는데 나이 먹어서 하려니 힘들어 죽겠어요.
생계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장씨: 작년 9월부터 식당에서 일하고 있어요. 임금은 최저생계비 정도예요.
전씨: 물리치료 보조일 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만 두었어요. 저도 최저생계비 정도 받았어요. 금속노조해서 일정기간 동안 지원이 되니까 그나마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살림만 하다가 보니 할 것도 별로 없고. 아이들 크다 보니 들어가는 돈은 많으니 일을 안 할 수는 없고요. 간호조무사 자격증 땄는데 나이가 많아서 취직이 잘 안돼요. 자격증이 있어도 늦은 나이에 따니까 들어가기가 힘들어요.
작년 77일 투쟁할 때 가족대책위의 활동이 아직도 생생해요
장씨 : 그때 가대위 활동하고, 쫓아다니기 바빴죠. 아르바이트 간간히 하던 것도 안가고 집회 쫓아다니느라고 바빴어요. 공장 밖에서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 없었으니까요. 남편 힘 되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요.
전씨: 일 끝나고 바로 회사 가서 늦은 시간까지 쫓아다녔어요. 당시에는 집이 천안이어서 집도 멀고, 첫째 아이가 고3이라 새벽부터 움직여야 했고 작년은 너무 힘든 해였어요. 지금은 근처로 이사 와서 조금 나아졌어요. 남편이 노조 임원이었고 ‘함께 살자’고 싸우는 것이어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남편이 하는 일을 반대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고,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장씨: 맞아요, 너무 당연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작년 77일 투쟁할 때,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전씨 : 사측 사람들이 공장에 들어왔다가 나가던 날, 들고 있던 생수병을 앞에 있었던 가대위에 던져서 주광이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자경이가 소리를 지르면서 아이를 끌어안았는데 옆에 전경들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그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리고, 공장 안에서 밥을 먹는지 안 먹는지 걱정하고 있는데, 사측 사람이 ‘아줌마 집에나 가요’ 하는 소리에 갑자기 화가 나더라고요. 당신이 왜 가라마라 해 하면서 싸웠어요. 얼마나 화가 나던지 바락바락 소리가 질러지더라고요. 당신이나 가라고 한참 싸웠어요. 사측 사람이 째려만 봐도 시비 걸고 싶었던 심정이었어요. 공장 안 남편들은 주먹밥 먹고, 식수 단절 되고, 전기도 끊겼는데, 사측 사람들은 시간되니까 생수하고 도시락 들고 들어가는데 그렇게 화가 나더라고요.
장씨: 다 비슷할 거예요.
아이들은 몇 명이고 나이는 어떻게 됩니까?
장씨: 고2(딸), 중2(아들)예요.
전씨: 대학교1학년(아들), 고3(딸). 작년도 그렇고 올해도 그렇고 고3이라... 5시 30분에 일어나고 밥 먹고 7시에 나가서 학교 데려다주고 파업하면서 10시 넘어서 집에 가고. 작년은 인생최대의 악몽이었어요.
아이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장씨: 어느 정도 커서 아빠를 이해할 나이는 된 것 같아요. 아이들이 별로 말 수가 없기는 한데, 한 번씩 물어보면 아버지가 자랑스럽다는 이야기는 해요. 딸이 대견한 게 학비 신청서도 직접 들고 와요. 창피해 할까봐 신청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그렇지 않아 다행이에요. 국제 관련학교를 가서 유엔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라고 하더라고요.
전씨: 우리 아이들은 조용한 성격은 아니에요. 아들은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더라고요. 아빠를 원망하지 않냐고 물어보니까 왜 아빠를 원망 하냐고요. 정당한 싸움인지 알기 때문이지요. 앞장서서 하는 것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하고요. 그런데 큰 아이는 긍정적인데, 둘째는 부정정인 편이였어요. 아빠가 구속되면 다시는 안 본다고 했었으니까요. 그 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면회도 잘 다니고 있고, 지난 재판에서 증인으로 갈 때는 떨지 말고 말 잘하고 오라고 하더라고요.
재판이 진행 중인데, 재판 방청하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전씨: 남편들 얼굴 보면 너무 많이 변하고 말라서... 죄수복 입고 앉아있는 것이 너무 안쓰럽고 불쌍해요. 왜 저 사람들이 저기에 앉아있는지도 모르겠고요. 재판 갈 때마다 눈물이 나요.
장씨: 죄인이라고 앉아있는데... 마이너스 될까봐 하고 싶은 말도 다 못하겠고 그렇더라고요.
구속자 가족들끼리 가끔 만나시나요? 만나면 어떠신가요?
장씨: 면회 갈 때나 재판 때 보고, 가끔 서로 위안 삼아서 생일이면 생일 챙겨 주고, 어쩌다 전화하다가 목소리가 좋지 않으면 위로해 주려고 보고, 한번 모이자 해서 모이기도 하고, 지부 사무실 방문하게 되면 밥 같이 먹자고 해서 모이고, 변호사 간담회 할 때, 지부에서 가족들 모임 할 때 보고요.
전씨: 만나면 서로 위안이 되고 같은 처지니까 소통이 되고 해요. 같이 느꼈기 때문에 이야기하고 웃을 수도 있고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불편해요. 자꾸 물어보고 대답해야 하고 만나기가 싫어요. 길거리 다니다가도 사람들 만나면 싫어요. 아저씨 어떻게 됐어? 물어보면 화가 나요. 사람들 안보고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제일 속 편해요. 처지가 다르니까 어울리기가 힘든 것 같아요.
장씨: 77일 싸움이 없었으면, 이 일 아니었으면 가까워질 일도 별로 없었죠.
구속된 이후 남편이 가족들에게 하는 말은?
장씨: 지금 안정이 안 되어 있는 상태예요. 항소심 선고가 8월 9일이거든요. 가족들에게는 짐이 되어 버린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전에는 부업도 하지 말고 아이들 잘 키우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일 잘 갔다 왔냐고 물어보는 것도 마음이 안 좋다고 하더라고요.
전씨: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라고 하고 면회 와주니 고맙다고 하고... 미안하다는 말도 해요. 편지도 일주일에 3통 올 때도 있어요.
바람이 있다면?
모두: 한가지지요. 빨리 남편이 가족들 품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지요.
8월 9일이 항소심 선고 날이다. 장영희 씨는 이번에 남편이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다른 가족들은 모두 집행유예로 나오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다. 최근 쌍용차 관련 항소심 선고가 1심과 변동이 없어 가족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 더욱 안타까운 상황이다. (기사제휴=미디어충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