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년 8월5일 경찰특공대가 쌍용차 조립3,4팀 옥상 진압에 성공했다. [출처: 미디어충청] |
▲ 김 씨는 저 옥상 있다가 찍힌 사진으로 옥쇄파업 뒤 구속됐다. [출처: 미디어충청] |
단 몇 줄로 1년의 고통을 다 표현할 수 없겠지만, 무급휴직자인 김 씨는 ‘쌍용차 대타협 1년’ 이후의 삶을 짤막하게 소개했다.
“구치소 안에 있을 때 무급자 신청 소식을 들었어요. 여러 가지 알아보지도 못한 채 신청 했고, 무급휴직자로 선정되었어요. 주변에서는 ‘그래도 해고된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하시는데, 현장에 들어간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이라… 1년을 보내면서 생계로 인한 어려움과 현장 복귀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아 ‘차라리 무급신청을 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낫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했었어요.”
무급휴직자 선정은 ‘당사자와 충분한 협의’를 거친다고 했다. 회사 관리자인 심사위원단 앞에서 파업 참여자들은 ‘반성한다, 잘못했다’는 답변을 요구받았다. 그렇게 ‘충분한’ 반성의 과정이 전제였다. 회사는 조금이라도 밉보이면, 무급휴직자에서 제외될 수 있음을 ‘충분하게’ 알려줬다.
“현장복귀가 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은 회사의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어요. 회사가 복귀시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패배주의가 많은 것 같아요. ‘작년에 그렇게 싸웠을 때도 그랬는데, 지금은 금속이나 민주노총을 믿을 수 있느냐…’ ‘국민들의 기억에서 쌍용차는 다 잊혀 졌는데, 소수인 우리끼리 해서 뭐가 되겠느냐…’라는 심정이죠.”
개별로 흩어져 있는 무급휴직자들은 회사의 협박과 탄압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투쟁하면,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도 가질 수 없었다. 그렇게 희망이 잿빛으로 변해가는 1년이었다.
‘무급휴직자에 대해서는 1년 경과 후 생산물량에 따라 순환근무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며, 실질적 방안으로 주간 연속 2교대를 실시한다.’, ‘무급휴직자와 희망퇴직자에 대해서는 정부, 지역사회 및 협력업체 등과 긴밀한 협조를 통하여 취업알선, 직업훈련, 생계안정 등 필요한 조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2009년 8월 6일 노사합의서에 있는 무급휴직자와 관련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무급휴직 기간 동안 생계안정을 위해 지역사회와 함께 노력한다던 회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지역에서 일자리가 넘쳐나는 것도 아니고, 정규직이라고 해봐야 150만원이 안 되는 돈이다 보니 늘어가는 것은 대출 빚뿐이었다. 그나마 안정적이라는 곳은 쌍용차 출신들을 거부하기 일쑤였다. 대부분 일용직으로밖에 취업을 할 수 없었다. 그도 소득이 없다 보니 ‘저소득 전세금 대출’을 신청했는데, 70%까지라던 대출은 ‘상환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30%밖에 받을 수 없었다.
▲ 09년 8월6일 마지막 노사협상에서 사측은 '무급휴직 기간 동안 생계안정을 위해 지역사회와 함께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출처: 미디어충청] |
“제가 일하는 곳에도 10여명의 쌍용차 출신 노동자들이 있어요. 일하는 환경이 너무 열악해요. 선풍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휴게공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밥도 배달 오면 바닥에서 그냥 먹어요. 아프다고 쉴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내는 아프고 힘들면 쉬라고 하는데,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오히려 ‘나가라’는 말로 들려요.”
무엇보다 무급휴직자들을 제일 힘들 게 하는 것은 현장복귀에 대한 회사의 ‘노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단 한 차례도 회사로부터 ‘현장복귀가 어떻게 될 것이다’라는 연락을 받은 적이 없어요. 오히려 법정에서 만난 회사 관리직들은 ‘복직시킬 일이 없을 것’이라고 떠들고 다니더라고요.”
그는 합의서가 나왔을 때부터 ‘복직’이 쉽지는 않을 거라 여겼지만, 대국민 대타협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회사의 태도가 이렇게까지 ‘막가파식’으로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공장 문을 나서자마자 회사는 보란 듯이 파업 참가자들에게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고, 어용노조를 세우고, 끊임없이 파업 참가자들을 갈라치기 했다.
“어쨌든 약속을 했으면, 이행을 못하는 사람이 어떤 이유로 못하니까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정말 뻔뻔한 거죠. 대국민 대타협이라고 해놓고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국민들을 기만한 거밖에 안 되잖아요.”
그는 회사의 태도에 대해 분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의 무급휴직자들이 생계 때문에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현실도 안타까워했다. 정리해고 된 조합원들은 비록 몇 달뿐이었지만 실업수당이나 금속노조에서 지원한 장기투쟁사업장 생계비가 있었다. 하지만 무급휴직자들에게는 아무런 지원이 없었다. 생계라는 커다란 벽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회사에 대한 조합원들의 투쟁을 어렵게 만들어 왔다. 그도 의지는 있지만, 휴일에 있는 일정에 간간히 참여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1년 뒤 현장복귀 시키겠다는 합의를 이행하게 하기 위해서, 지금이라도 무급휴직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해야 해요. 삼삼오오 일용직으로 일하는 무급휴직자들과 징계해고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지부에서 현장순회를 했으면 좋겠어요.”
그는 흩어져 있지만, 투쟁을 함께 경험한 조합원들인지라 지부가 확실하게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면 회사의 회유와 탄압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회사의 합의 불이행에 대한 분노는 조합원들의 마음속에 누구나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 씨는 복직의 시기는 ‘우리가 어떻게 투쟁하느냐에 따라’에 달려 있고, 특히나 지금은 ‘고용보장에 대한 대책 없이 진행되는 매각에 맞서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 때’라 더욱 조직화에 힘을 쏟을 때라고 했다.
지역 시민들이나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더니, 의외로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나왔다. 예전에 쌍용차가 소위 잘 나가던 시절에 지역과 어려운 처지의 노동자들을 위해 ‘무엇을 했나’라는 반성이 많이 든단다.
“쌍용차에 다니면서 지역 시민을 위해 한 게 없어서 너무 죄송할 따름이에요. 예전에 정리해고 문제가 터졌을 때 관심 갖고, 함께 연대하지 못했어요. 이제 우리가 힘들다 보니까 관심과 연대를 바라게 되더라구요. 하지만 정리해고 문제는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일어날 일이니까 쌍용차만의 문제라고 국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건 국가와 기업이 책임져야 하는 위기를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책임 전가해 벌어진 일이잖아요. 사회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쌍용차 매각 투쟁에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습니다.”
▲ 아직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고, 쌍용차 매각은 노동자들의 고용보장에 대한 아무런 대책없이 추진되고 있다. [출처: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 |
그는 모두다 현장에 돌아가야 하지만, 가장 먼저 현장 복직은 ‘징계해고자’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산자’들이었지만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을 거부하고, 함께 투쟁했던 그들에 대한 탄압이 다른 무엇보다 부당하고 아프단다. 나보다 다른 이들을 먼저 걱정하고, 아파하는 김 씨의 마음이 함께 투쟁했던 쌍용차 노동자들의 마음이 아닐까. 투쟁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던 쌍용차 노동자들. 함께 싸워 함께 살자던 그들의 믿음이 잿빛이 아니라 푸르른 희망으로 이어가게 하는 것은 함께 하는 우리 사회 모두의 몫이 아닐까.(기사제휴=미디어충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