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물길을 따라 걷다가 집으로 돌아온 후, 고단함 때문일까, 왼쪽 귀 아래에서부터 턱밑까지 단단하게 부어올랐다. 거울을 봐도 완전하게 드러난 비대칭의 얼굴모습도 문제였지만 물 한 모금 삼킬 수 없는 통증이 당장은 더 큰 문제였다. 병원을 가보지 않아서 병명이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 곧 나아질 거라 여기며 오른쪽으로 아주 조금씩만 물을 삼키며 며칠을 보냈다. 아픈 곳에 별 마음을 두지 않고 지내다 보니 어느 새 턱은 붓기가 가라앉고 나는 예전처럼 편안하게 앉아 단단한 현미밥알을 꿀떡꿀떡 잘도 삼키며 밥을 먹고 있다.
순례길 내내 벌겋게 익어갔던 살갗도 마른 껍질을 들어 올리며 허물을 벗는가 싶더니 어느 새 스스로 정리되어 있다. 내 몸은 늘 그랬다. 한겨울이면 악착같이 달라붙어 몸을 괴롭히던 감기 균도 이주일이면 자연스레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고열과 깊은 기침에 시달린 몸도 그렇게 독하게 한번 겪고 나면 일년내내 그런대로 큰 탈 없이 지날 수 있었다. 세월은 내게 그런 거였다. 내맡겨 두면 스스로 흐르고 흘러 다음 길로 갈 수 있는 힘을 주던 원천. 세월은 내게 믿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세월이 두렵다. 이 시간이 흐르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건가. 이 시간이 지나면, 이 시간의 잔혹한 파괴를 그대로 둔다면 백년이 지나도, 이백년이 지나도 되돌릴 수 없다는 낙동강. 드러난 강바닥과 그 속을 퍼 올리던 포크레인의 삽질, 주검처럼 베어져 강주위에 쌓여있던 습지의 나무들을 보고 온 지금, 나는 흐르는 세월이 두렵다.
기차에서 내리면 안동 시외 터미널로 찾아오라는 송경동 시인의 전화를 받고 나는 안동역에 도착해 곧장 택시에 올랐다. 시외 터미널로 가달라는 나의 말에 기사님은 바로 저기가 시외 터미널이라고 하신다. 기사님이 가리키는 손끝을 보니 정말 대형 버스들이 보인다. 타자마자 다시 택시에서 내려 길 건너편 시외 터미널로 왔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니 송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서울에서 온 일행들은 대형버스를 타고 이미 낙동강 수역으로 출발했고 송시인과 또 다른 한분이 울산에서 온 나를 태우러 승합차를 가지고 이곳까지 온 모양이다. 마침 서울에서 함께 온 일행 중 갑자기 몸이 아파서 다시 서울로 가야할 분들이 계셔서 막 그분들을 배웅하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안동 도심을 벗어나 외곽으로 달리니 곳곳에서 ‘낙동강 살리기’라는 현수막들이 펄럭인다. ‘4대강 살리기’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뻔히 알면서도 ‘낙동강 살리기’는 주민들이 낙동강 개발에 반대해서 걸어 놓은 현수막인줄로 알았다. 순진하게도 진짜 낙동강의 생명들을 살리기 위해 걸어놓은 간절한 염원들인 줄만 알았다. ‘낙동강 살리기’는 강바닥을 다 파헤쳐 놓은 잔혹한 현장 입구에도 걸려 있었다.
▲ 마애습지의 모습 [출처: 4대강 범대위] |
서울에서 온 일행이 미리 도착해 있던 마애 습지에 오니 일행들은 이미 습지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 버렸고 송경동 시인과 차를 운전하신 분과 함께 늦은 점심을 먹었다. 마애 습지란 지명은 이 지역에서 구석기 시대 선사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인 듯하다. 눈앞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긴 순례길을 생각해서인지 땡볕 아래에서도 모두들 두 그릇씩 밥을 먹는다.
안동에 살고 있는 안상학 시인과 천주교 4대강 저지 연대 곽재환 선생님이 오셨다. 오늘 우리 일행들을 안내해 주실 분들이다. 안상학 시인을 전에 뵌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난 스무 살 시절에 그분의 시를 읽은 적이 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대구, 대구의 남북을 가로 질러 금호강으로 합류하는 신천을 담은 시였다. 종아리까지 닿던 신천의 맑은 물을 놀이터 삼아 지낸 유년의 기억이 살아있는 나는 지금도 이 시를 읽으면 마음이 아프다.
1987년 11월의 신천(新川)
신천교가 보이는 길목을 지켜선
가로수는 하나 둘 가을 흔적을 지우고
팽팽하게 바람을 안고 있는 선거 현수막은
가지를 붙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강남약국 앞 버스정류소 무인 판매대에서
문득 주워든 때 지난 조간신문
사람들이 표표히 떠도는 모습을 배경으로
현수막에 붙박힌 무표정한 이름들이 웃고 있다
순간 사회면에서 비상하는 철새들
왜가리 청둥오리 두루미 고니떼 무리
을숙도에 잠시 머물다 북상할 거라는 단신(短信)
저 썩어 흐르는 신천에도 철새는 날아올까
검은 물만 흐르는 신천 가득
철새는 날아올 수 있을까 날아와
저렇게 시린 발목을 담그고 있어낼까
신천을 가로지른 철교 아래
신천동 산동네 사람들이 모여 나와
영세민 취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철새무리
장화를 신고 오물을 건지는 아저씨, 철새
수건 머리 쓰고 돌 나르는 아줌마, 철새
허접쓰레기 소각하는 할머니 철새, 할아버지
철새, 매캐한 연기는 바람부는 방향으로 누워 흐르고
하천둑에 붙박힌 녹색 깃발은 제자리 펄럭임을
하고 있다 정오 한때
낮은 하늘에 걸린 전투기 한 대 여전히
철새는 날아오지 않고 사람들이
식어버린 밥을 먹고 모닥불 가에 모여든다
천변 봉제공장 여공들은 잠시 은행잎처럼
몇몇은 담장 밑에 옹송거리며 앉아 있고
더러는 노점 떡볶이를 먹으며 재잘대고 있다
늦가을 바람에 날리는 햇살 속에서
낙엽들만 철새처럼 와그르르 몰려다니는
저 썩어 흐르는 신천은 무사해도 되는가
무사해도 되는가
신천은 금호강으로 흘러들고 금호강은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이십삼년전의 신천은 섬유 공업의 발전과 함께 썩어 있었다. ‘수출만이 살길이다’는 구호가 펄럭이던 시절, 장시간 저임금에 노동자가 죽고, 섬유 공단에서 흘러나온 독성 강한 폐수로 신천이 죽고, 이제는 본류인 낙동강이 위험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멈추지 않는 강물의 수난사가 이 시 한편에서 다 읽히는 것 같다.
▲ 바닥이 드러난 구담보 습지 [출처: 서해식 제공] |
마애습지를 떠나 구담보 공사현장으로 가는 길에 창밖을 보니 대부분의 논들이 농사를 짓지 않는 휴경지이다. 낙동강 강바닥을 퍼 올린 준설토를 쌓아 두기 위해 이년 정도 휴경지로 둘 예정이라고 한다. 논 주인인 농민들 중에도 낙동강 개발 공사가 잘못 되었다는 걸 알고 계신 분들도 많지만 대부분이 농사짓고 살기가 어려운 형편이니 정부의 보상안을 받아들이고 땅을 내어 주고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 일인당 농가 부채를 떠올리면 농민들의 그런 선택을 탓할 수만은 없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당장은 얼마의 돈이 위로가 되겠지만 당장 몇 년 안에 닥칠지도 모를 재앙을 떠올리면 공사를 막는 길 외엔 우리 삶에 그 무엇도 대안이 없다는 게 분명해지는데 말이다. 강 하류로 내려갈수록 4대강 문제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던지는 섬뜩한 경고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의 고도를 넘어서고 있는 강의 수위를 곳곳에서 예측할 수 있었다.
▲ 구담보 옆 제방 [출처: 서해식 제공] |
구담교에서 내려 구담보 공사현장을 바라보았다. 강 유역과 전체 면적이 압록강 다음이라는 낙동강의 위세를 누르기라도 하듯 공식적으로만 8개의 보 설치가 계획되어 있는데 구담보는 공식적으로는 보 건설 계획에 들지 않았지만 강 상류의 물을 가두기 위해 보가 만들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낙동강에 세워질 보 중에서 비교적 수심이 낮다는 구담보 주변의 제방의 높이가 저렇게 높은데 하류로 갈수록 수심이 깊어지는 보를 가두기 위해서는 얼마나 높은 제방을 쌓아야 할까. 본래 강은 땅의 틈을 파고들어 흐르는 것, 인위적인 강 개발로 주변 땅보다 수미터 이상 수위가 높아진 강을 상상하는 일은 기이하다. 강주변의 땅을 강바닥을 파낸 흙(준설토)로 돋운다고 해도 그 면적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여름철에 집중호우나 태풍이 잦은 자연환경에서는 불어난 물의 양이 제방을 넘어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을 삼키는 일을 상상하는 일은 무리한 일이 아니다. 거대한 재앙을 예고하며 시작되는 낙동강 개발, 우리는 지금 그 상류에 서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