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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 보다 더 불편한...지구온난화는 진실일까?

[기고]「불편한 진실」과 「진보와 그의 적들」을 통해 본 신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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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불편한 진실>중에서 한 장면


최근 문규현 신부님께 보낸 편지에 앨 고어를 한 마디로 나쁜 놈 취급한 적이 있다. 직후 나는 이 글을 썼는데, 이 글은 두 권의 책, 앨 고어의「불편한 진실」과 기 소르망의「진보와 그의 적들」에 대한 저널의 성격을 띠었으며, 무엇보다 보수, 진보의 리트머스처럼 되어버린 환경문제의 진실로 들어가고 싶은 나 개인의 탐구에서 시작했다.


지구온실화와 빙하기 도래, 뭐가 덜 무서울까?

나는 지금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인 환경 문제에 대해 일방적인 관점이나 확신을 갖지 못하는 편으로, 다른 어느 문제보다 환경에 대해서는 진실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다. 환경문제는 생존의 문제, 비용의 문제, 미래세계 존재여부의 문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회의 갈등을 가장 불러일으키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긴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른 돌파구를 간절히 찾고 있다. 그래서 빙하기의 순환이라든가 하는 말들에 솔깃해지곤 한다. 차라리 빙하기가 다시 온다고 믿는 것이 지구 과열을 믿으며 발전을 억제하고 비용을 지출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빙하로 얼어 죽든 온난화영향으로 죽든 그 죽음은 재앙일 것이고, 일단 그 재앙을 늦추는 데는 비슷한 경비가 들 것이지만, 나 역시 막연하게 위기를 벗어나고 싶어 가져보는 바람인지도 모른다.

이런 나의 방심을 여지없이 깨부수는 것이 앨 고어다. 앨 고어는 그의 다큐멘터리와 책 「불편한 진실」의 첫 부분을 놀랍게도 바로 빙하기의 도래에 대한 추측을 단칼에 없애버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말 잘 하는 앨 고어가 꼭 나 같은 사람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아 놀랍기도 했다. 사실 무지 뜨끔했다. 서글서글 잘 생기고 열정적이고 설득력 있는 앨 고어니까 그의 말이 더욱 먹힌다는 것 아닌가. 앨 고어는 생태계를 파괴시키는 지구온난화의 원인이 탄소가스 배출이라고 믿고 국가와 개인의 온실가스 방출을 제한하고 비용을 물리는 지구적 아젠다에 앞장서고 있다.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은 정말 너무 불편하다

‘화석연료를 쓰는 자동차와 기계들이 배출한 가스들이 대기를 덮어 태양열의 방출을 막아 지구의 온도를 상승시킨다, 이는 빙하를 녹이고 해수면을 상승시켜 해안에 위치한 도시들이 바다 속으로 잠기게 될 것이고 해양온도가 높아져 더 강력한 열대성폭풍을 만들 것이다, 뉴올리언즈를 강타했던 카트리나도 바로 그 한 예이다, 또한 기후를 변화시켜 질병을 퍼뜨릴 것이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이야기이지만, 제작자들 말마따나 지구온난화에 대한 논쟁을 끝내버릴 정도로 강력한 방식으로 ‘그것이 진실이다’라고 외치니까 진짜 불편한 것이다. 거기에 대안이나 해결방안이라는 것이 인간의 욕구 발달과 의식, 습성으로 보아 거의 불가능해보여 더 암담하다. 우리가 믿고 있듯이 탄소배출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는 미국의 일방적 횡포와 마구잡이로 탄소가스를 배출하는 중국과 인도의 걷잡을 수 없는 개발 욕구만 통제한다고 해서 결코 해결될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앨 고어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은 우익 논객이라고 할 수 있는 기 소르망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곧잘 기 소르망을 언급하고 또 그의 책(특히 「진보와 그의 적들」)을 권하는데 그의 말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자인 그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논리와 지식을 갖지 않고서 환경운동을 하거나 신자유주의를 배격하는 것은 상당한 한계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가 시종 강력한 논조로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가.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신념은 한편 도그마로 흐르기 쉽다. 그것으로 선동을 하고 사람들은 편을 가르는데, 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권력화가 되고 부정을 위한 부정에 목숨을 걸게도 되니까 말이다. 환경운동이 인위적인 행위에 따른 과학적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 대안 제시라고 할 때 그들의 주장 역시 철저히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환경운동가들이 과학의 진보를 막는다?

칼 포퍼를 대표하는 유명한 말이 있다.
“과학적 이론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물론 증명하려 하지 않는 것도 과학이 아니다. 그건 도그마다. 포퍼는 그것을 증명할 때에만 진보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과연 우리의 액티비스트들은 그것을 증명하려는 데 얼마나 철저한지. 환경운동가들이 이제까지 거의 다 공부했다고 말한다면 기 소르망의 주장들에 대해 다시 공박해보라는 것이 내 요구였다. 나는 칼 포퍼를 좋아하는데 그의 냉철한 과학철학이 맹한 인문학도인 나를 오래 전부터 자극하는 면들이 있다.

기 소르망은 라블레를 인용했다.
“자각 없는 과학은 분명히 영혼을 파괴할 뿐이다. 그러나 훌륭한 자각을 지키는 데 과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여지없이 인류의 멸망을 재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너무 복잡해서, 그리고 너무 갈등과 긴장이 심해서 나 역시 생존의 문제, 삶의 질의 문제로서 이것들을 밝혀보고 싶은데, 결국 과학이 그것을 해결해줘야 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내가 과학, 과학 하는 것은 과학에 대해서는 완전 맹탕인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논리’라고 하는 것도 가치가 있지만 거기에 ‘과학적 사실’이라고 하면 깜박 죽어야 하는 것이 인문학도들의 처지다. 나는 최근 토론 중에(내 토론 상대는 동생이다. 지금 캐나다에 살며 공학도지만 과학철학을 하면 더 잘할 거라고 여겨지는 사람이다. 나는 동생과 날마다 서너시간 이상씩 온갖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심지어 어느 날은 내리 여섯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우리의 주제는 거의 신자유주의와 대안체제로 귀결된다) 한 편의 글을 얻어 읽었다. 동생이 쓴 것으로, 요는 이렇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뉴튼의 제 2 공식을 원자물리학에 적용하니 수치가 맞지 않는다. -이를 증명하는 엄청난 물리학의 공식이 들어 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충격에 빠지고, 과학적 수식의 허점이 과학 전반에 걸쳐 발견되고 있다. 이런 허점투성이의 과학을 절대적으로 믿고, 그 권위를 철학하고 연결시키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

그런 면에서 기 소르망이 ‘과학’과 ‘진보’를 주장하는 것도 극적인 ‘사기’일 수도 있다는 것인데, 정말 사기인지 그의 한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문제만큼은 뒤에 언급을 하겠다.

아무튼 기 소르망은 무엇보다 도덕적, 사회적 이유로 과학적 진보를 막는 것을 반대한다. 이를 ‘반과학’이라 말하면서, 이 반과학에 대해 엄청난 분노를 표출한다.

“그것은 민감한 분야를 선별하여 거짓정보를 유포하면서 이것들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한다. 비밀을 손아귀에 쥔 채 실제 지식을 대신하는 단순한 설명을 조작해낸다. 그러고는 변화에 민감하거나 그것에 민감한 사람들을 유혹한다. GMO, 기후온난화의 가능성, 복제, 아마존 숲의 파괴 등등에 관하여, 우리의 새로운 새천년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인류의 구원자로 내세우기 위해 우리에게 두려움을 각인시키려 애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자신들에게서 도망치려는 권력이다. ...... 미래는 바람직하게 되기 위해 다시 원시적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논조가 마치 조중동이 ‘소위 진보’들에 대해 퍼부어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가? 진실을 위한 공분을 넘어 감정적인 분노감마저 엿보인다. 하지만 성실하게도 기 소르망은 과학과 도덕의 논쟁이 붙은 모든 발명과 개발의 현장으로 달려가서 직접 인터뷰를 하고 사실을 확인하여 별 문제가 없음을 전달한다.

비정치적으로, 비이데올로기적으로 논쟁해보자!

기 소르망은 유전자 조작, 배아 복제 등을 막는 도덕성에 대해 마구잡이로 공박해 들어간다. 먼저 신의 ‘창조’는 얼마나 완벽하냐는 거다. ‘창조는 신성한 작품’이라고 해버리기 때문에 토론의 여지는 없지만 다른 문제, 곧 신이 우주를 창조했는데 다른 누군가가 우주에 손을 대는 것을 금지했을까? 그(그녀)만이 독점권을 쥐고 있다는 말이야? 하고 묻는다.

복제를 카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에서 반대하고 있는데 이미 내적으로 진즉 비기독교화된 사회에서 교회가 무슨 적법성을 가지고 있는가 라고 따지기도 한다. 기실, 교회가 도덕적, 비도덕적이라고 결정하는 것은 거의 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잖은가? 나 역시 역사적으로 변하는 것에 다른 어느 제도보다 과학이 좌우되는 것은 인간 이성의 수치라고 생각한다.

기 소르망은 갈수록 재미있어진다. 인간복제는 인간의 노예화, 도구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과연, 글쎄, 정말로?, 그건 아니지’다. 복제된 모든 개체는 개성을 소유한 개인이 될 거라고 말한다. 개성이란 단순히 유전적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유전자와 환경으로부터 재생산될 수 없는 일종의 연금술이라는 그의 말이 맞지 않은지. 그는 그 복제 인간이 만일 노예로 귀착된다면 그것은 개체의 본질 때문이 아니라 그를 만들어 낸 사람의 행동 때문으로, 윤리의 구실 아래 정치적 사용과 혼동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복제 없는 이 세상의 개인, 즉 자연적으로 수태된 개인은 결코 도구화 되는 일 없는 완벽한 윤리적 세계에 살고 있느냐고 따진다. 문명 세계에서도 얼마나 많은 어린 아이들이 도구화의 목적으로 태어났느냐고.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유산을 세습하기 위해, 양친을 보살피기 위해,,, 이것이야말로 비유전학적인 복제이지만 훨씬 더 지배적인 ‘문화적 복제’라는 거다.

이런 논박들은 그럴듯하다. 사람들이 이 정도만 본질적이고 구조적으로 접근해 들어간다면, 이런 문제들, 이런 모순들을 제대로 직시한다면, 더구나 이런 것들을 수용하고 넘어갈 수 있다면 세상은 보다 더 냉정하고 평온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대론자들은 과학적으로는 물론이고 철학적 종교적으로 더욱 치밀해져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앞에 인용한 것처럼 이 사람은 GMO에 대해서도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빈곤 국가들을 도울 것이라는 여러 증거들을 내 놓는다. 그리고 그 위험성에 대해서는? “한 천년 후에 유전자 변형 야채가 공격성이 아주 강한 나쁜 잡초를 낳게 될지 모르는데” 이것도 ‘신중의 원칙’에 의해 곧 금지되겠지? 라고 아주 시니컬하게 말할 따름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기 소르망의 문제점을 적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철저한 신자유주의자라는 것이 이렇게 드러나는데, 왜 빈곤국가에서 GMO 식품을 재배하고 먹어야 하는가? 지구상에는 지구인들이 먹고 살 식량이 충분하지만 미국과 서구 신자본주의 국가들이 그걸 제대로 분배하지 않아서 빈곤과 기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데 말이다. 기 소르망은 그 점에 대해서는 입을 딱 다문다. 그리고 곳곳에 국가불개입의 시장경제가 아주 성공적인 것처럼 말해놓고 있는 점에서도 그가 어떤 사상적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인가 놓칠 수 없다.

기 소르망의 주장을 반동적이라 치부해버리기에는 불확실한 것들로 인한 고통의 대가가 막심해서 나는 그를 계속 붙들고 있다. 그만큼 환경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정신적으로 심각한 공포감을 주고, 매 순간마다 죄책감을 느끼게 하거나 자신의 미래와 후세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런 거대한 집단적 스트레스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지? 무엇보다 그 진실을 규명하는 것에서부터. 진실을 규명하는 것은 단순한 주장과 왜곡과 선전과 정치적 암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기 소르망을 그래도 참고하자고 하는 이유는 그는 지성적이고 논리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지구온난화 현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인정한다면, 인류적 대의를 위해 비정치적이고 비대중매체적 자세로 돌아가 비이데올로기적이며 비투쟁적인 논쟁을 벌이는 게 바람직하다. 그럴 경우, 먼저 지구온난화를 가져올 수 있는 모든 원인을 알아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자연현상으로 인해 발생하지 않는 것들, 즉 인간이 원인을 제공하며, 인간이 개입해서 수정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 존재를 찾기조차 힘든 것들로부터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 인위적인 요인이 제거될 때 비로소 과학적인 신뢰를 쌓을 수 있다.”

여기에 토머스 프리드먼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 "순수하게 진실만을 추려 보고서를 만들면 (불필요한) 논란은 사라질 것"이라고. 지구기온상승의 진실이 이제 뒤죽박죽이 된 이상 우리가 붙들 것은 바로 이런 태도들이지 않을까?

기 소르망은 기실 정치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아무 힘이 없어 보인다. 다만 칼럼니스트로서 자기의 신념을 자신이 파악한 일단의 사실에 근거하여 환경문제의 시장에 쏟아 붇는 것에 불과해 보인다. 그가 원하는 것은 파스퇴르와 마리 퀴리의 프랑스 공화국, 핵에너지를 그 어느 나라보다 앞서 개발한 자기 나라의 위상과 부를 되찾고 싶은 것 같다.

지구는 과연 뜨거워지고 있는가?

앨 고어로 인해 이 글이 시작되었으니 앨 고어와 지구 온난화 이야기로 돌아가자. 지구온난화의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정말 궁금한 진실이고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게 진실게임의 블랙홀로 들어가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지구 해수의 온도가 과연 상승했을까?

지구온난화를 강력 주장하여 그 의장이 앨 고어와 함께 노벨평화상 공동수상을 한 ‘과학자 전문가 집단’의 과학자들과 영국의 기후연구소장이 주고받은 메일이 해킹되어 드러난 사실은 지구의 온도가 상승되었다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불충분하고 정치적 주장에 불과한 내용들이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온난화 주장자들과 비판자들은 서로 석유자본에 놀아나고 있다, 녹색산업 관련업체와 금융산업의 자문역할로 엄청남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고 비난한다. 온난화 가설에 대한 반론은 오히려 더 탄력을 받아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누구의 편인가, 그리고 왜?

“그것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 많던 예전의 함박눈은 어디에 있을까요?”
15세기 프랑스의 시인이 읊은 구절을 기 소르망이 기온상승 의혹의 재미있는 사례로 들어놓았는데, 나 역시 비행기 안에서 읽은 책 속에서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헝가리의 작가 산도르 마라이가 쓴 「섬」이라는 소설인데, “이럴 수가” “삼십팔 도” “그늘에서 삼십팔 도”라는 말이 북유럽의 한 도시가 배경인 소설의 첫 부분을 장식한다. 이 소설은 1934년에 발표되었다. 지구는 언제나 그렇게 가끔 이상스럽게 뜨거웠던 것 같다.

기 소르망은,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입증할 수 없으며 입증을 위한 어떠한 증거도 댈 수 없다고 말한다. 미디어 정치그룹과 환경운동가들만이 그렇게 주장한다는데, 기실 권위 있는 과학자들은 지구가 뜨거워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대답하며, 어떤 과학자들은 너무 천천히 뜨거워지고 있어 별 의미가 없다고 한다. 나아가 아무도 지구온난화 현상을 정확히 측정할 수가 없다는 결론인데.(지금, 그렇게 양상이 드러났지 않은가.)

그럼에도 유엔이 주최하는 기후회의에서는 각국 정부대표단과 환경단체가 지구온난화는 확실하며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고 하고, 거기에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기온이 2도 상승할 것이라고까지 하다가, 이 수치가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자 그 온도가 기이하게 올라가서 그 회의가 끝날 즈음인 5일 후에는 5도까지 수정 상승되었다고 한다. 아무 출처와 가정도 없이. 이건 2000년의 회의 때 말이고, 2007년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에서는 그 기온이 9도를 치고 있다. 그 동안 자동차가 많이 늘어났으니까 그렇게 말할 법도 하다.

진보와 그의 적들」에 갑자기 빙하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까지의 경험은 지구온난화에 대한 논쟁에서 신중한 태도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예컨대 사클레이 소재 원자에너지센터의 기후학 연구소에서 일하는 상당수 학구적인 연구자들은 지구는 여전히 주기적으로 도래하는 빙하의 위기에 놓여 있으며, 일부에서 산업화에 따른 이산화탄소의 방열이 지구온난화를 초래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빙하주기 순환설의 위기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 탓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지구냉각화 현상이 지구온난화 현상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앨 고어가 「불편한 진실」의 처음을 빙하기의 도래에 관한 설을 일축하는 것으로 시작했지 않았나 싶다.

지구온난화 설의 승리

지금 기후에 관한 논쟁에 관한 것 중에 확실한 사실 하나는 빙하기 도래설과 지구온난화설 두 개가 대립되어 있는데, 그 주도권을 지구온난화가 잡았고, 1등공신이 앨 고어라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환경적으로 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을 것 같다.

기 소르망은 정치인들이 국가의 새로운 정당성을 이산화탄소라는 ‘악’에 대항하는 ‘선’을 구체화하는 데서 찾았다고 말한다. 온실효과는 대의명분이 고갈된 시점에서 정치적 명분의 노다지라는 것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앨 고어로 온실효과에 그의 정치생명을 걸었다고 말하는데... 미덥지 않은 정치행태와 문화를 볼 때 나로서는 아주 잘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유행하는 이슈에 대해 먼저 선점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정치인의 모습 말이다.

물론, 새로운 이슈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전부 다 ‘정치 쇼’냐고 반문할 만하다. 사실, 돌아보면 한 국가의 정치지도자가 어느 특정 이슈에 대해 그토록 열렬하게 매달리며 그 자신 또한 세계적 스타가 된 적은 그 어느 시대에도 없다. 앨 고어는 자신의 작품인 「불편한 진실」로 지구인들을 지독히도 불편하게 만들었는데, 그게 과연 진실인지 아닌지 알 필요가 있지 않은가?

그의 진정성 문제까지는 나는 거론하고 싶지 않다. 그건 자기 자신과 신만이 아는 일일 것이니까. 정치인들은 정말 자신의 진실성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라고 나는 본다. 어떤 문제가 정치적으로 연루될 때 그것이 진실게임의 블랙홀로 들어가 버리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했는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지만, 역사의 해석은 또 강자 편에서 이루어지지 않던가.

이미 사람들은 엘 고어 활동의 이면을 추측하고 있다. 정치적 혹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추측, 사실로 드러나지 않고 언론에서도 결코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보통 ‘음모론’이라고 한다. 우린 얼마나 많은 음모론을 가지고 있는가. 참으로 불편한 것은 바로 이러한 결코 알려지지 않은 구린내 나는 진실이 아닌가 말이다. 불쾌하고, 정치에서 가장 심한 인간모독은 ‘음모론’의 횡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엘 고어가 진정으로 환경재앙을 막기 위해 그렇게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니는가? 부시에게 패한 이후 '정치에서 손을 떼고‘ 라는 말이 그의 위대성을 칭송하는 수식어로 늘 따라 붙는 앨 고어만큼 행복해보이고 자유로워 보이는 정치인은 드물다. 명예와 부와 인기를 다 얻은 대표적인 정치인이다, 앨 고어는. ‘음모론’을 말하는 사람들은 앨 고어는 ’탄소배출권‘을 만들어 그것을 미국이 확보하고 전 세계의 모든 국가들에게 팔아먹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환경 이슈를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꼭, 음모를 꾸미는 사람만큼이나 의심 많고 약게 보이는 추측의 방법이 아니고라도, 우린 충분히 다음 단계는 ‘탄소배출권’으로 간다는 것을 예측해볼 수 있다. (벌써 우리나라도 단체장들의 공약이 탄소은행 어쩌고다.) 작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기상기구회의에서 그 사전작업을 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탄소시장의 싸움은 더 이상 버블이 없는 신자유주의 경제에서 유일한 출구로 보고 있다고 할 정도로 막대하다.

‘기후변화로 인한 환경재앙은 온실효과 때문이다, 온실효과의 원흉은 이산화탄소다, 이산화탄소는 화석연료로 인해 발생한다, 너희들 나라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의 양에 따라 벌금을 내라, 미국에.’
웃기지 않은가? 우리나라가 이만큼은 탄소를 배출할 건데 그걸 미국의 어느 탄소배출회사에서 수십억 불을 주고 사온다...

누구를 위한 진보이고 무엇을 위한 진실인가?

기 소르망은 과학과 진보를 외치고, 앨 고어는 환경과 지구의 미래를 외치는데, 과연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위한 과학의 진보이고, 미래의 인간의 삶은 과연 지금보다 나을까? 진보의 개념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 걸까? 누구를 위한 진보이고, 테크놀로지의 발달이면 아무거나 진보인가?

우리가 왜 인간 체세포를 복제해야 하며, 유전자조작식품을 재배하고 그것을 먹어야 하는가. 미국 인구 가운데 4300만 명이 의료보험이 없이 살고 있는데, 그들이 먹는 것은 성장호르몬과 유전자조작식품으로 만들어진 최악의 싸구려 식품이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사람들이 햄버거와 후렌치후라이를 푸짐하게 쌓아놓고 행복하게 먹는 모습을 보면 나는 가슴이 찡 해온다. 이상한 것은 맥도널드에서 제대로 먹는 것이나 홈 메이드 레스토랑에서 평범하게 먹는 것이나 값 차이가 크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싸구려 식재료로 비싸게 파는 맥도널드가 문제다. 세계적으로 근로조건이 가장 안 좋은 대표적인 기업이 월마트, 그 다음이 맥도널드 아닌가.)

지구상에서 나는 그 많은 식품들은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는 달리 돈 버는 수단으로만 이용되고 있다. 좋은 음식을 생산하고 질 좋은 의료기술을 개발해내는 것과는 무관하게 이용되는 기술을 그저 진보라고만 하고 있는 기 소르망. 그는 신자유주의를 더욱 가속시키고 그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진보를 팔아먹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앨 고어한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환경문제에 생을 건 진실하고 열정적인 액티비스트? 그는 캘리포니아 해변에 수백억 원대의 빌라를 최근에 샀다. 그 돈은 어쩌면 진보, 보수, 동양, 서양, 기독교, 이슬람을 초월하여 사람들이 사 준 「불편한 진실」과 연간 천 회가 넘는 강연 수입에서 벌어들인 돈 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무브먼트와 액티비티는 결국 정치적 파워를 갖게 되는 것으로 그는 미국의 부를 위해 일할 것이고, 그가 가져온 미국의 부는 그를 미국의 영웅으로 만들지 모른다.

탄소시장이라도 만들어야 미국이 연명할 수 있지만, 또 추측을 잘 하는 사람들은 그 시장을 만들기 전에 미국은 몰락할 것이라고 한다. 과연 미래에 드러날 진실은 무엇일까. 환경재앙일까, 아니면 신자유주의와 함께 미국의 종말일까. 부의 집중과 빈곤을 가속시킨 신자유주의가 지금 단말마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은 자명한데,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이를 대신할 새로운 시스템을 우리는 찾을 수 있을까.

진정으로 불편한 진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진실, 우리의 생존과 연결되어 있고, 더 나은 미래와 연결되어 있으며, 지금 우리를 성장시켜 줄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사실이 어떻든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면 조금 더 나을까? 인간성을 믿는다면(위한다면) 함께 뭉쳐 움직여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자기구원만을 위해 종교로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인데, 자기를 미워함이 없이 인간성을 부정할 수 없으니 그래도 우리는 움직여야겠지.

진정성 있는 것만이 스스로를 비추고 남을 도울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진정성은 적어도 봉사와 희생의 참 의미를 아는 사람들, ‘살신성인’ 할 수 있는 정신과 상통하리라고 본다. 그렇지 않고서는 정치가 되었든 시민운동이 되었든 밥그릇 싸움, 내 앞에 감 놓기 이상 뭐가 되겠는가. (참소리)
덧붙이는 말

이재천님은 청소년 정신건강을 위한 사회연대 코디네이터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저서로는 '편지 속의 책들', "연불암 숲 속의 이야기', '의회의 리비히 법칙'등이 있습니다. 현재 캐나다에서 영화 칼럼집을 집필 중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