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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힘들었으면’...정신분열된 쌍차 노동자의 비애

[쌍용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 “형, 미안해. 먼저 나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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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만에 평택역을 찾았다. 파업 1년을 맞아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서 열린 결의대회에 참석한 것이 6월 초였다. 이번에는 촛불문화제다. 그동안 쌍용자동차지부의 행보가 궁금했기에 겸사겸사 촛불문화제를 찾았다.

일곱 시를 훌쩍 넘겼는데도 평택역 광장은 환했다. 6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문화제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 놀고 있는 아이들. 한쪽엔 유모차가 세워져 있고, 가족 단위로 온 조합원들 모습이 눈에 띈다. 지부에서 준비한 프로그램도 다양해, 토크쇼와 조합원 율동 등을 보고 있자니 입가에 살짝 웃음이 괸다. 그러나 웃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율동을 하고 무대에서 내려온 장준호 정책실장이 말한다.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춤을 췄는지도 모르겠네요.”

떨렸다는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문화제 직전 한 조합원의 집을 방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77일의 블랙홀

계영대씨는 지난 여름 공장 점거파업에 68일간 참여한 후 희망퇴직을 한 조합원이다. 12일, 계씨의 친형에게 연락이 왔다. 경찰서였다. 술집에서 핀 소란으로 잡혀온 것이었으나 계씨의 상태는 심각했다. 두 눈에 살기가 가득했고, 행동은 불안했다. 계씨는 그날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며칠 뒤 조합원 두엇이 그의 집을 방문했다.

거실과 방에 생수, 라면, 담배, 배터리, 노트북 등이 박스 채 가득 쌓여 있었다. 모두 파업 당시 조합원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던 물건들이었다.

“처음 들어갔을 때 물이 한가득 쌓여 있는 걸 보는데 저도 마음이 울컥하더라고요. 우리가 그 안에 있으면서 7월21일부터 물이 끊겼잖아요.”

정부는 공권력을 통해 식량 반입을 막았다. 회사는 전기와 물을 끊었다. 인권은 사유재산이라는 이름 아래 무릎을 꿇었다. 회사는 소화전마저 끊어 공장이 불에 타더라도 파업은 막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조합원들은 그 무더웠던 여름, 물도 나오지 않는 공장에 갇혔다. 그 경험이 공포가 된 탓일까. 계씨의 집은 마치 파업 당시 공장을 방불케 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정책실장이 건네준 계씨 집 사진을 보니, 베란다 근처에 놓인 망원경이 눈에 띈다.

“자기가 파업을 지휘하는 거예요. 그때로 다시 돌아가서. 노트북이 뜯지도 않은 게 몇 박스고, 여기에 망원경도 사 두고.”

파업 직후 조합원들을 괴롭혔던 것 중 하나는, 후회였다. 그때 우리가 이렇게 했다면 이기지 않았을까. 그때 우리가 이런 방법을 썼다면 지지 않았을 텐데. 그들은 끊임없이 77일을 되돌리고 자책했다. 쓰라린 기억이 그를 일 년이나 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형, 미안해

다음날 만난 계씨의 형 계영휘 조합원이 병원에 입원한 동생의 소식을 들려준다. 계씨는 입원한 날부터 음식을 거부하고 있다.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으나 계씨는 일단 6개월 입원 치료를 권유받았다.

동생 이야기를 하는 계영휘 조합원의 눈이 퀭하다. 중간 중간 언성이 높아진다. 전에 집회장에서 계영휘 조합원을 만난 적이 있다. 이것저것 묻다가 형제가 파업에 참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동생이 파업 후에 힘들어한다는 말을 넌지시 했다. 연락이 잘 안 된다는 말도 들은 기억이 난다.

“내가 불렀어요. 파업 때 공장에 들어가자고. 하는 게 옳다고. 무임승차하면 안 되고 내가 불렀어요.”

그의 표정에 씁쓸한 후회가 비친다.

파업 68일째, 계영휘 조합원에게 문자가 하나 왔다.

<형, 미안해. 먼저 나갈게.>

공장을 나오라는 회사의 선무방송이 극성인 날이었다. 계영대씨는 파업 기간 도장1공장에서 머물렀다. 페인트, 신나 같은 발화성 물질이 가득한 도장 공장은 늘 폭발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던 곳이었다. 조합원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다. 회사는 어차피 보험에 들었기 때문에 도장 공장에 불이 나는 것을 개의치 않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일부러 불을 낼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회사가 소화전까지 끊은 상황이 오자 소문은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조합원들은 늘 긴장했다. 담배조차 편히 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옆의 동료가 회사 편에 서 일부러 불을 내지 않을까 의심하기까지 했다.

결국 계씨는 형에게 말도 못한 채 공장을 나왔다. 파업을 철회한 조합원들에게 형사적 책임을 묻지 않고 바로 귀가시키겠다는 경찰의 선무방송도 그가 공장을 나오는 데 한 몫을 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경찰은 공장을 나오는 계씨를 그 자리에서 연행했다. 수갑과 포승줄에 묶인 계씨에게 회사 사람이 와서 ‘희망퇴직’을 강요했다. 이 사실은 전해들은 형 계영휘씨는 가슴을 쳤다.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닌 놈을 가둬놓고 강요해서 퇴직서를 쓰게 하고. 사람도 아니에요!”

희망퇴직을 강요받은 건 계씨만이 아니었다. 이즈음 파업을 중도에 포기했던 조합원 60여명이 경찰에 억류된 상태로 회사 직원들 앞에서 희망퇴직서에 서명을 했다.

그때의 경험이 상처로 남아서일까, 계씨는 늘 누군가 자신을 해칠 것이란 망상으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제야 계씨가 병원 식사를 거부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차린 음식만 먹었다. 누구도 믿질 못했다. 아내와 자식들도 그런 그를 피해 집을 떠났다.

계영휘씨는 얌전하기만 했던 막내 동생이 이런 꼴을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용회복위원회에서 신용불량 통보 우편이 날아와 있는 상태예요. 하도 기가 차서 열어보지도 않았어요. 카드 고지서도 잔뜩 쌓였는데 열어보지도 않았더라고요. 퇴직금 받은 걸로 노트북, 가전제품, 생수 이런 거 사고, 그것도 모자라서 마이너스 통장이랑 현금서비스를 받은 걸로 알고 있어요. 동생은 그 전에 빚도 없었어요. 빚은 빚대로 남고. 저 놈이 정상적인 생활을 못한다고요. 내가 평생 수발을 해야 하는데, 나도 나이가 있고 한계가 있다는 거예요. 지금이야 형제들이 십시일반 도와준다 하지만 도와주는 것도 한두 해지, 쉬운 게 아니거든요.”

그는 이 문제의 책임을 당시 공권력을 지시했던 정부와 쌍용 사측이 져야 한다고 했다. 언론에 이 사실을 알리고, 법적 소송을 진행할 거라며 그는 ‘나는 이제 무서울 게 없어요! 차라리 어디로 끌고 가서 죽여줬으면 좋겠어요’라고 울분을 토한다.

“가족 파괴되고, 평택 지역 경제도 다 무너지고. 그런데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노동자만 다 죽으라고 하고.”

동생이 곧 괜찮아질 거라는 동료의 말에 계영휘씨는 고개를 젓는다.

“집에 가서 그 꼴을 봤으면 그런 말이 안 나와. 내가 그걸 보는데 미치겠더라고.”

함께 집을 방문한 장준호 정책실장이 말을 거든다.

“옆에 따라가서 보는 나도 미치겠던데요.”

그럼에도 쌍용차지부 조합원들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었다. 지난해 노동환경건강연구소와 금속노조가 파업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한 정신건강 실태조사에서 48.2%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71.1%가 심리상담 등의 치료가 필요할 정도의 우울 증세를 보였다. 수치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쌍용의 위험도는 이미 속출하고 있는 자살자가 말해주고 있었다. 파업이 끝난 이후에도 2009년 7월에는 희망퇴직자가 목숨을 끊었고, 9월에는 경찰 수사를 받던 조합원이 자살을 시도했다.

간신히 버티는 겁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사태는 지금부터라고 노동조합은 말한다. 무급휴직자들을 두고 한 말이었다. 노동조합이 상태를 파악할 수도 없이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다.

쌍용자동차는 지난 8월26일 파업 참가 조합원 중 48%를 무급휴직으로, 52%를 희망퇴직 및 분사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물과 식량이 보급되지 않고 공권력이 공장에 들어오는 긴급한 순간에 이뤄진 합의였다. 48%의 무급휴직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구제였고, 어떤 의미에서는 분열이었다. 그 결과는 파업 직후, 노동조합 지도부가 구속되고 노동조합의 활동이 정체되는 순간이 되자 드러났다.

무급휴직자들의 생활고는 정리해고자들보다 심각했다. 해고자가 아니니 실업급여를 받을 수도, 다른 회사에 취직할 수도 없다. 근근이 일용직이나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가는 정도였다.

곧 다가올 8월6일은 무급휴직 기간인 1년이 끝나는 시점이다. 회사는 복직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무급휴직자 같은 경우는 지금 간신히 버티고 있는 거예요. 8월6일까지 간신히 버티는 겁니다.”

이 말을 하는 이창근 기획실장의 얼굴이 어두웠다. 쌍용자동차 소속인 무급휴직자들은 회사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누가 자신의 복직을 보장해줄 것인가를 판단해야 했고, 그 판단의 결과로 노동조합을 찾지 않았다. 그들은 함께했던 동료들의 품을 떠나 어려운 시기를 홀로 버티고 있었다.

“어떠한 대화나 이런 것이 없고, ‘우리는 싸움 졌어’라는 생각만 돌고 있어요. 외부에서 보면 일반 시민 연대단위들이 쌍차 투쟁을 기억하고 위로하고 위무해주고 있지만 실제 당사자들은 이것조차 잘 모르잖아요. 혼자만의 생각에 갇혀 있는 거죠.”

그러나 8월6일이 되어도 복직될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 앞서, 파업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징계휴직을 당한 이들이 징계휴직이 끝나는 날, 회사로부터 휴직 연장 통보를 받았다. 그것도 일방적인 문자 통보였다. 회사가 무급휴직자를 어떻게 대할지는 예상가능한 일이다. 현재 회사는 무급휴직자 복직에 관해 입을 다물고 있다.

지지 않았다, 다만

황인석 지부장을 찾아 8월6일을 앞둔 지부의 계획을 물었다. 지부장은 노동조합과 조합원들이 소통하지 못하고 벽만 높아지고 있는 상황을 지적한다.

“지역별로 나눠서 조합원들을 만나러 갔었는데, 안성에 12명의 조합원이 있는데 겨우 2명을 만났습니다. 거의 만나고 오지 못했죠. 아예 전화를 안 받는 사람도 있고. 조합원들의 생각도 듣고, 노동조합의 생각이 무엇인지도 알리는 게 필요한데 말이에요. 조합 차원에서는 임원들이 나누어서 집을 직접 방문하는 가정방문을 해서라도 휴가 전까지 조합원들을 만나기로 결의했습니다.”

한달 전 노동조합 사무실을 찾았을 때, 계획을 하고 있다는 무급휴직자 간담회가 잘 이루어졌는지를 물으니 지부장은 고개를 젓는다. 무급휴직자들의 처지를 알기에 예상된 일이다.

한편 노동조합은 사무실을 공장 근처로 옮긴다. 공장 앞에서 다시 싸움을 조직하고, 조합원들을 만나가겠다는 의지였다. 계씨에 대한 인터뷰를 하기 위해 노조사무실을 방문한 날, 노동조합 사무실 개소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전날 열린 촛불문화제가 떠오른다. 가족대책위 아이들의 공연 순서가 됐지만 무대에 올라오는 아이들이 없었다. “얼른 오세요!” 한참을 사회자가 애타게 부르고서야, 공연이 시작됐다. 그것도 노래를 부르는 건 달랑 두 명 뿐, 나머지는 제멋대로 춤을 췄다. 그래도 사람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래, 격식 따위야 어떠랴.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마음이 한 데 모일 수 있는가 이다. 어느 날 조합원 집을 다짜고짜 찾아가 술 한 잔 먹자고 조르는 것도 나쁠 것 없다. 공장 앞에 천막을 치고 드러누워 조합원들에게 와 달라고 떼를 쓰는 것도 역시 나쁠 것 없다.

언젠가 젊은 조합원을 붙잡고 작년 파업의 성과가 현재 어떻게 남아 있냐고 물은 적이 있다. 조합원은 ‘남은 게 없는데……’라며 말을 흐렸다. 그럼에도 앞으로 지부가 어떻게 나아갔으면 좋겠냐는 말에 ‘우리’를 찾는다.

“투쟁에 대해서 지부가 중대한 결단을 내려서 전체가, 나를 포기를 하고 전체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그런 틀이 마련이 됐으면 해요. 역시 함께하지 않으면 한계가 있다 라는 걸 깨닫고, 하나하나씩 같이 만드는 게 필요하죠. 그게 ‘우리’라고 생각해요.”

이들은 여전히 작년 파업을 기억하고 있다. 나만이 아닌, 동료와 함께 살겠다고 싸웠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거다. 이창근 기획실장은 ‘함께 살자’로 표현되던 그 정신을 다시 앞세워야 할 때라고 말한다.

“작년에 우리가 제일 기억해야 하는 건 함께 살자라는 주장이에요. 내 피해를 고스란히 알면서도, 함께 전망을 열어갈려고 했던 그 정신이거든요. 이게 파업이 끝나고 1년 동안 계속된 탄압 국면, 생계 국면에서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20명 30명이 있어도 저기 참 즐겁게 가네, 저게 노동조합이지 라는 자연스러운 향기를 품어야 하는데…….”

요즘 무슨 정신으로 사는지 모르겠다는 계영휘 조합원에게 한 동료가 다가와 말을 건다. 텃밭에 심은 호박이야기가 나온다. 호박 농사를 망쳤는지, 두 사람은 ‘내년에는 다른 걸 심자’라는 이야기를 한다. 내년이 있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별 것도 아닌 사실인데, 새롭다. 어디선가 읽은 글귀 하나가 머리를 내민다. 쌍용자동차 파업을 다룬 글 중 마지막 구절이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지지 않았다. 다만 지금 당장 이길 수 없었을 뿐이다.”

그들은 언제 승리하게 될 것인가. 나는 지켜보기로 한다.(기사제휴=울산노동뉴스)
덧붙이는 말

이 글은 [울산노동뉴스]에 연재되는 글입니다.

  • 노동자

    혼자만의 시도와 좌절이 아니라, 곁에 있는 동지들과 함께 현실에 맞추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에 암울한 현실을 박차고다시 한번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 노동조합과 함께 힘차게 팔뚝질 하며 투쟁 합시다!
    용기를 내어 저항 합시다!! 투 쟁

  • 아...

    속이 막 터질것 같네요. 이놈의 돈세상...

  • 에스떼반에르마노기자

    충격입니다.
    공권력의 폭력과 자본가계급의 폭력책동으로 정신병원에까지가고 심지어는 일용직이나 고용살이동지직으로 추락한 로동자동지들을 보니 충격적이고 안타깝고 정부과 자본가 계급이 분노감이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