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두시, 바람조차 잠잠해진 시간이다. ‘천막 농성 10일째’라는 알림판을 단 푸른 천막밖에서 몇 분의 선생님들이 책을 읽거나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바깥의 시간과는 달리 정지되거나, 혹은 아주 느린 속도로 흘러가는 듯한 이곳의 시간, 전날 교육청 광장에서 열린 집회장에 나온 선생님들은 살이 많이 빠져 있었고, 오래동안 몸이 아파 병가를 내신 선생님도 계셨다. 지난 해에도 여러 선생님들이 징계를 당하거나 해고를 당했다. 올해는 다시 열여섯분의 선생님들이 정당 후원금을 냈다는 이유로 징계대상자 명단에 올랐다. 징계 결정에 맞서기 위해 천막 농성에 돌입한 지금, 학교에서는 교원 평가제가 실시되고 있다. 학교에서는 교원 평가를 막느라, 퇴근 후에는 농성장으로 달려오느라 젊은 나이에도 머리가 허옇게 새어버린 선생님들도 눈에 띈다.
나는 여전히 수업이 즐겁다
사흘을 연이어 농성장을 찿았다. 자꾸 오다보면 자연스럽게 선생님들의 속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했지만 일부러 말을 걸어 물어 보지 않으면 선생님들은 먼저 이 상황들에 대해 말씀을 꺼내시진 않으신다. 모이면 열여섯 명이지만 흩어지면 학교에서는 혼자라는 한 선생님의 말이 떠오른다. 함께 있기 보다는 모두 자신이 속한 학교에서 혼자 견뎌야 하는 시간이 길기 때문일까. 좀체 말이 없는 선생님들의 마음이 문득 섬처럼 느껴진다.
“ 내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데 주변 사람들의 마음은 비슷하지 않은 것 같아요. 교사들은 어릴 때부터 모범생들로 자란 사람들이 많아요. 크게 일탈을 해본 경험이 없으니까 위로할 줄도 다가설 줄도 잘 모르죠. 징계 대상에 오른 교사들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학교에서 외톨이가 된 느낌도 들죠.”
우원태 선생님은 초등학교에서 근무한 지 30년이 되었다. 전날 열린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은 그는 나이 50세를 넘으니 세상사는 이치가 의외로 간단해 보인다고 했다. ‘적으면 오천원, 많으면 이만원, 힘내라고 후원금 준 것 가지고 징계한다는데, 이게 무슨 민주주의냐, 민주주의가 뭐 이래’라는 명쾌한 말로 그는 정당 후원금을 낸 교사를 징계하는 권력을 꾸짖었다. 울산에서 징계 대상에 오른 열여섯 명의 선생님들 중 가장 선배 교사인 그는 만약에 징계가 내려진다 해도 후배들보다 자신이 징계 수위가 낮아지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이 든다고 했다. 징계가 없어야 하겠지만 만약에라도 징계가 내려진다면 자신이 가장 크게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아리다. 또 다른 선생님은 차라리 자신이 징계 대상에 올라 마음이 편하다고도 했다. 다른 동료가 징계를 받는 걸 보는 건 더 큰 고통이기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도덕과 체육을 전담하고 있는 우원태 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친 지 3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수업이 즐거우시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고, 또 그런건 물어 보지도 않았지만..... ’이라고 단서를 붙이시며 말씀을 하시지만 아이들도 선생님을 참 좋아할 것 같다. 농성장에 있는 쥬스 몇 병을 엄마 따라 집회장에 온 아이에게 꼭 쥐어 주시던 선생님, 어린 아이들의 눈빛만 보고도 몇 살인지 기가 막히게 알아 맞추시던 선생님은 영락없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시다.
노예로 살기 힘들어 죽겠습니다
힘든 건 아이들뿐이 아니었다. 일제 고사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이후, 초등학교에서조차 방학 중에도 보충 학습을 받으러 아이들이 학교에 나오는 일은 더 이상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시험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이들뿐만 아니었다. 투쟁 문화제 집회에서 만난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지금 당장 자신에게 닥친 징계 문제보다 학교 현장에 불어 닥치고 있는 교원 평가제가 얼마나 교사와 아이들을 죽이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4교시에 했던 수업을 5교시에 또 한다고 해요.”
보여 주는 수업을 하기 위해 같은 수업을 계속 반복해서 하는 선생님들의 현실을 증언하는 말을 들으니 문득 나도 생각나는 일이 있다.
올해 5학년인 큰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지난 5월에 공개 수업을 했다. 공개 수업조차도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부담되는 일이라고 느끼고 있었는데 며칠 뒤에는 담임 선생님이 수업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학교 홈페이지에 올려놓았으니 동영상 자료를 보고 평가한 내용을 적어 학교로 보내라는 과제가 나왔다. 그 과제를 보고는 오히려 내가 얼굴이 달아올랐다. 공개 수업을 했으면 됐지, 또 무슨 동영상 촬영한 걸 보고 평가 하라니, 마치 남의 집 안방을 들여다보라는 것 같은 부끄러움에 나도, 아이도 그 숙제를 하지 않았다. 나중에 동영상을 본 다른 부모님들의 말씀도 내 생각과 다를바 없었다. 한마디로 ‘죽어있는 수업’이라는 거였다. 영상촬영을 위해 각본을 짜고 아이들을 훈련시키고 몇 번이나 더 연습을 한 후에 수업 영상을 찍었을까.
며칠 전에는 한술 더 떠 아이들 스스로 담임 선생님을 평가하라는 내용을 담은 공지문이 아이 편에 들려져 왔다. 무서운 선생님께 낮은 점수를 줘서도 안되고, 혼 안내는 선생님께 높은 점수를 줘서도 안된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진 내용을 보니 기가 막혔다. 한마디로 이런 교원 평가는 ‘개무시’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나름의 판단을 하고 있지만 학교 현장의 선생님들과 아이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큰 아이와, 같은 반 친구들 말로는 담임 선생님이 3월 달에는 참 친절하셨는데 요즘은 매일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신다고 한다. 저희들 딴에는 담임 흉을 보는 건데 그대로 듣기엔 선생님의 처지가 하도 안타까워 내가 ‘너희 선생님 같은 분이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걸 보면 정말 힘이 드신 거다. 무조건 너희가 선생님 말씀을 잘 따르라’고는 했지만 그것도 답은 아닌 것 같다. 학부모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원 평가를 넘어서 학교 안에서는 동료 평가도 하고 있다고 한다.
“동료 교원 3인 이상이 참석해서 수업을 참관하고 평가하라는 건 옆집에 사는 이웃을 보고 평가하라는 것 하고 똑 같아요.”
초등학교에 근무하시는 한 선생님은 동료 평가 자체가 현실에서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지만, 한 선생님이 여러 과목을 가르치는 초등학교의 현실을 고려하면 과목마다, 단원마다 여러번을 참관해야만 그나마 평가가 가능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상 한 선생님이 수 십번의 평가를 받아야만 한다고 설명하신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교원 평가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인 듯하다. 이 불가능한 평가를 가능하도록 조립하기 위해 선생님과 아이들의 일상은 잘리고 찢겨져 나가고 있다.
“죽겠습니다. 노예로 살기 힘들어 죽겠습니다.”
지난해 시국선언에 이어 올해 정당후원금 납부 명단에 올라 이중 징계로 파면 대상에 오른 박현옥 선생님(울산 전교조 비상대책 위원장)은 오늘 이 순간부터 노예로서의 삶을 거부하겠다며 마이크를 잡는다. 아이들의 개성과 끼가 가장 살아나는 시간이 예·체능 시간이라던 그이는 지금 초등학교에서 체육을 전담하고 있다. 아이와 함께 달리기를 하다가 선생님이 꼴찌하면 아이들이 그렇게 신나할 수 없다며 웃던 그의 수업을 누가 평가할 수 있을까. 달리기에서 선생님을 이긴 아이들의 높은 사기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추상명사는 수치로 나오는 게 아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수치로 나옵니까?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수치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건 평가 수치로 매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성찰, 자율에 맡기는 것이 대안입니다.”
우원태 선생님은 교원 평가에 대해서 수치로 평가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 하신다. 사실 나의 경험을 되돌아 봐도 선생님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이고 일괄적인 기준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불행하게도 내 기억 속에는 직업적인 교사는 있지만 마음으로 느낀 스승은 없다. 교감이 되고 교장으로 승진한 교사는 있었지만 마음을 어루만진 스승은 남아 있지 않다. 단 한번,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교생 실습을 나온 한 선생님이 그가 실습한 국어 수업 시간에 제출한 내 글을 보고 ‘계속 글을 써보라’는 권유를 한 기억이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어렴풋하게나마 살아가야 할 길을 보여 준 선생님. 희미하지만 따뜻했던 그 격려를 누가 평가할 수 있을까.
“트라우마라고 해야 하나, 초등학교 때 일어난 일은 아이들이 평생 기억해요. 공부 못하는 애라고, 시험쳐서 한번 그렇게 찍혀 버리면 아이들은 평생 자신감을 잃게 되요. 초등학교에서는 특히 수치로 평가해서는 안되요.”
교원 평가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학생들의 성적도 점수로 나타나서는 안된다며, 선생님은 아이들은 무조건 잘한다고 격려해야 한다고 하신다. 아들의 수학 점수가 낮아서 걱정이라고 내가 말하니, 엄마 걱정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인식되는 아들이 더 큰 문제라고 말씀하신다. 공부 못하는 아이라는 인식을 은연중에 엄마인 나조차도 하고 있었던 걸 들켜 버린 것 같아 가슴이 뜨끔하다.
“나는 좀 더 나이가 들면 살아오면서 미안했거나 고마웠던 사람들을 찿아 여행을 하고 싶어요. 사람은 어느 때가 되면 돌아보게 되요. 나라가 나에게 이만큼 해주면 나도 이 나라에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요. 의무 교육을 무상으로 하는 게 그 시작입니다. 전부다 내 돈으로, 부모 돈으로 하면 그런 사회에서 무슨 책임감과 고마움을 느끼겠습니까?”
우원태 선생님이 첫발령을 받은 1980년에는 앞으로 10년만 기다리면 전면 무상교육이 이루어질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10년을 지나, 20년을 지나, 3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무상교육은 우리 사회의 뜨거운 화두로만 머물고 있다. 아니, 오히려 무상 교육과 교원 평가 반대를 외치는 전교조 선생님들에 대한 대량 징계가 예고되고 있다.
일제고사 반대 교사와 시국선언 참여 교사 징계, 전교조 교사 명단 공개에 이어 정당에 후원금을 납부한 교사들에 대한 징계가 모두 같은 의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모두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사이 학교에서는 교원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입과 귀를 모두 막고 말 잘 듣거나 침묵하는 교사들만 가두어 두겠다는 학교, 죽은 학교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오늘 이 선생님들이 다치지 않고 반드시 학교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곳에 우리 아이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