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2010년 현재 노동자들은 과연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보면 ‘아니요’라는 결과가 나온다. 결국 지난 23년간 무수한 투쟁과 파업, 징계와 해고, 구속을 마다 않고, 열사까지 배출하며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투쟁했지만 인간다운 삶이라는 목표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세계 최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으며, 시간당 임금은 OECD 가입국가 중에서 최하위이다. 비정규직 1위이고 사회복지비용은 꼴찌이니 세계 12위 경제국에서 1등도 꼴찌도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물론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함께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이 급격하게 상승하며, 비록 빚은 졌지만 내 집 마련과 자가용 한대는 가질 만큼 물질적 향상은 이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97년 외환위기 사태와 함께 자본의 대반격이 시작되며 신자유주의 노동의 유연화 정책, 빚쟁이로 살기를 권장하는 천민자본주의가 확산되며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후퇴하고 하락하기 시작한다. 불과 10년 승리했다면 내리 13년째 양보와 패배만 거듭하며 내부는 분열하고 신뢰는 떨어지니 노동운동의 위기는 해묵은 논쟁일뿐이다.
결국 현재대로라면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 노동탄압에 궤멸하여 실패로 나타날 확률이 높다. 정권과 자본, 보수언론의 탄압이라는 외부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노동운동 실패의 내부적 요인을 찾아 해결하지 못하면 이대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세상에 걸맞는 새로운 대안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망하는 길이다. 자본주의 국가경영의 원리라는 ‘저곡가 저임금 정책’은 오히려 확대 강화되고 있다. 즉 저곡가 정책을 통해 농촌을 피폐화시켜 산업화의 노동력 확보 수단으로 삼는다. 도시로 흘러 들어온 노동자들은 ‘실업자 저수지’에 모여 일자리 경쟁을 하게 되고, 저임금을 감수하며 먹고 살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장시간 노동을 선택하는 지옥의 문으로 들어가는 자동시스템이 현재 한국의 천민자본주의 본질이다.
이제 국민소득은 3000달러에서 2만달러로 상승하고 노동자들은 생산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유지를 위한 소비도구로 전락, 자신의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는 ‘과소비 고비용’ 가정경제가 되며, 많이 벌어 많이 쓰기 위해 장시간 노동을 선호하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또 1998년이 지나며 ‘기업은 성장하고 고용은 감소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기업의 발전이 고용을 감소시켜 국민들에게 실업의 고통을 안겨주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럼에도 취업노동자들은 여전히 세계 최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으며, 노동운동의 노동시간 단축은 구호에 그치고 있으니 신자유주의 대응능력 상실이 위기이다.
실업이 증가하고 비정규직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강화된다. 늙은 부모는 장시간 노동을 하여 백수인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 더 열심히 일할수록 자식들의 일자리는 감소한다. 늙은 부모는 장시간 노동하여 과로사로 죽어가고, 백수인 자식은 실업을 비관하며 자살로 죽어가는 사회가 왔다. 현대자동차 같이 노조가 조직되어 있어도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일자리를 나누어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시대에 역행하는 노동운동이 지속되니 이는 얼마나 큰 불행인가.
한편에서는 주간연속2교대라는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면서도, 내용적으로 장시간 노동을 위해 물량확보 투쟁을 한다. 물량확보 투쟁을 하여 조합원들을 장시간 노동의 구렁텅이에 빠뜨려 과로사로 죽이는 게 민주투사가 되어 버렸다. 회사를 위해 차를 한 대라도 더 많이 만들어 주겠다며 물량확보 투쟁을 하는 노조활동을 정몽구 회장이 본다면 얼마나 귀엽고, 착하고, 예쁜 노조이겠는가. 세계 노동운동 역사상 이렇게 자본을 위해 투쟁하는 노조는 없었다.
물량확보와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스스로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면 노조의 존재가치와 정체성은 사라진다. 이 모순이 노동운동의 본령인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인간다운 삶을 파탄냈다. 우리 모두의 통렬한 자기반성과 각성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