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으로 조성된 새로운 정치·사회적 분위기 속에 결성한 지 1년 남짓 하던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는 5·16 군사 쿠데타로 좌절을 겪게 된다. 1960년 당시 교육연감에 따르면 총교원수 8만 3천여 명 중 1만 8천여 명이 교원노조에 가입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당시 참여했던 교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4만 명이 넘는 인원이 가입했다고 하니 상당히 많은 교사들이 이에 동참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1961년 당시 이목 선생은 대구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교사로 종사하면서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 사무국장의 일을 맡고 있었다. 4.19혁명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상황에서 교원들의 자주적 조직인 교원노조를 결성해 막 활동을 시작하려던 무렵, 5.16 군사정변으로 '특수범죄처벌에 관한특별법 위반죄로 혁명재판소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게 된다. 5.16 직후인 1961년 5월 18일 오전 재직 중이던 학교에서 영장도 제시하지 않은 대구경찰서 정보과 형사 2명에게 연행돼 160일간 불법 구금을 당한 상태였다.
"이승만 하야로 새 세상이 온다니 모두 얼마나 흥분했겠나. 당시만 해도 선생이 어떻게 노동자냐 이런 분위기가 우세적인 상황이었고 노동자를 천시하는 의식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대한교육연합회('한국교총'의 전신) 말고는 다른 단체에 가입 못하도록 했다. 다른 형태의 법률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단체는 만들 수 없다고 해서 노동조합법을 보니 노조가 있더라."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가 만들어진 이유를 말하면서 선생은 "4.19 당시 거리로 나섰던 제자들이 없었으면 그냥 지나갔을 것"이라는 말로 제자들을 챙겼다.
"대구에서 2.28(대구학생민주의거-3.15의거와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됨)안 일어났으면 모르는데 대구에서 일어났고 내가 있던 학교에 아이들이 가장 열렬히 뛰어들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경북대 사대부고에 '이행오'라는 학생이 있었다. 2학년 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 밖으로 못 나가게 하니까 나를 보더니 '선생님, 나 좀 봅시다'했다. 좋은 음성이 아니더라.
그래서 인기척 뜸한 데로 갔더니 이 제자가 손을 옆구리에 끼고 '선생님, 저희를 왜 말립니까. 수업 시간에는 민족과 정의를 위해서는 싸워야한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왜 막습니까'이랬다. 가르친 제자한테 힐난 받으니 무슨 할 말 있겠나. '우리는 비겁하지만 너희는 용감해야지'. 그렇게 말하고는 둘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역사는 전진한다. 세상의 진리다. 역사의 역류는 순간이다
소명의식과 신념으로 전교조 활동해달라. 전교조는 청년시대다."
4.19당시를 회상하는 선생의 마른 눈매가 잠깐 젖어들었다. "우리는 4.19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4.19혁명 과업은 우리(교사)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는 게 선생의 말이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북괴의 음계수행에 이익이 된다는 사정을 숙지하면서 반공임시특별법안과 데모규제법안에 대한 비판문을 산하 교원노조가 도연합회에 배부케 하는" 등의 일을 했다고 돼 있다.
선생은 당연히 상고했으나 이는 기각됐고 10년형이 확정돼 1965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될 때까지 5년여를 복역하게 된다.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가 법률로 제정됐다. 그 결과 조사해보니 범죄 사실에 해당 안 되는 걸 10여년 징역 살게 했다. 과거사위에서 조사하니 그런 것이다. 과거사위에서 정부에 권고했다. '국가 권력이 이렇게 많은 행위를 저질렀으니 이들의 명예를 회복해주는 게 민주주의다'라고. 그래서 내가 재심 신청했다. 선생은 지난해 말 재심을 청구했고 대구지법은 이것을 이유 있다고 받아들였다.
재심 심판하는 검사, 판사들이 30 ~ 40대들이더라. 보지도 겪지도 않은 사건을 재판하는 것이다. 재판받으면서 50년 쌓인 회한이 오죽했겠나. 마지막 선고할 때 판사가 내게 무죄를 선언하고 '할 말 없습니까' 묻는데 가슴이 먹먹해서 '할 말 없습니다'했다. 그런데 법정을 나오면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다른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 젊은 검사·판사들이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싶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이다."
아흔을 바라보는 선생의 가슴에 50여 년 전의 억울함이 얼마나 큰 상처로 자리 잡고 있었는지를 알게 한다. 여전히 민주주의를 지켜야한다는 생각이 손자뻘의 판·검사들에 대한 애정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러면서 선생은 지난 1989년 30여년의 교원 운동을 정리해 직접 저술한 <한국교원노동조합운동사>의 한 부분을 펼쳤다. 교원노조운동 태동 당시인 1960년 대구시 교원조합 결성 준비위원으로 위촉받아 쓴 '전국 교원 동지의 분기를 촉구한다'는 제목의 격문이었다.
"격문은 지금 읽어도 피가 끓는다"며 글자를 짚어가며 돋보기 너머로 선생은 낭독을 해 나갔다. 1922년에 나셨으니 올해 우리 나이로 89세이시다. 미수(米壽)의 연세인데도 선생의 음성은 맑고 카랑카랑했다.
이목 선생은 조전혁 의원이 전교조 명단을 공개한 것과 관련해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게 아니다. 이승만 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다. 국회의원이 어떻게 법에 저항하나? 차라리 항고를 하지. 법을 만드는 이가 법의 심판을 안 따르면 그에게 어찌 법을 맡길까. 우스운 이야기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꼭 하고 싶은 말'이라며 종이에 써온 걸 읽어내려갔다. "이 땅에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권이 꽃피는 사회를 건설하려면 교직원들의 운동이 우리 사회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단, 역사의 전진은 자연의 시혜물이 아니고 반드시 그에 따른 희생을 요구한다"는 내용이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이어오고 있는 전교조에 대해서도 '남기고 싶은 말'이라며 남다른 애정을 보탰다.
"전교조도 이제 청년시대다. 역사는 언제나 전진한다. 진실이다. 민주주의 시대에 자유와 평등, 인권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그 반대로 흐르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잠시 역류할 수 있지만 오래 못 간다. 역사가 전진한다는 신념을 안고 전교조 활동을 해주면 좋겠다." (교육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