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악산 금산사 |
봄비가 그치고 넓게 펼쳐진 보리밭과 개울을 가로질러 모악산 허리를 이어서 펼쳐진 너무 선명한 무지개가 한동안 넋을 잃게 한다. 그러나 무지개에서 일곱 가지 색을 찾을 수가 없다. 손가락을 꼽으며 빨,주,노,초,파,남,보를 중얼거리며 눈에 힘을 주지만 다섯 가지색 이상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명하지도 않았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무지개마저 잃어버린 도심의 하늘엔 따스한 봄바람에 여울지는 종달새 소리도 가물대는 아지랑이 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문제인식과 반노동자정책과 억압, 탄압이 지속되어도 노동자계급의 분노가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 위기를 외치면서도 노동운동의 위기를 동시에 제기하는 오늘에 현상이 찌푸린 5월의 하늘만큼 답답하다.
계급적 단결의 상징인 산별노조와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으로 노동운동의 성과를 모아 형식과 양적발전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파편화된 단결은 자본의 공세에 무기력한 상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노동자계급의 정치와 진보의 개념은 각각의 주관적 평가 속에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변혁을 향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평가와 대안이 제시되고 있으며 최대강령과 이행기강령도 다양한 틀에서 논의되고 있다. 그 중 계절과 같이 반복되어 불려지는 게 ‘무지개연합’이다. 정치에서 ‘무지개연합’이 등장한 건,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의 소수자 연대운동과 유럽의 사민당에서 시작되었고, 한국의 경우 홍사덕이 중심이 되어 만든 ‘무지개연합’당으로 기억한다. 그 ‘무지개연합당’은 만든 지, 8일 만에 신한국당으로 입당함으로써 ‘무지개연합당’의 의도와 목적이 확인되었고 그 이후 결을 달리하는 다양한 ‘무지개연합’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무지개는 태양빛이 프리즘과 같은 작용을 하며 작은 물방울 알갱이에 의해 나타나는 태양빛의 스펙트럼 현상이 우리들의 시야에 여러 가지 색으로 비춰지는 것 일게다. 무지개는 각각의 문화에 따라 인간에게 아름다움으로 인식되고 꿈과 희망의 상징으로도 비춰지고 있으며 이는 자연이 빚어내는 조화의 상징이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무지개연합’이라는 표현은 부르주아 정치의 무차별 이합집산과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목표 없이 각각의 정치적 이해득실에 의해 모이는 개량적 집단을 지칭하는 것 일게다. 따라서 상대방이 지닌 사상적 검토와 내용을 분석하지 않고 ‘무지개연합’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없다.
상대조직의 조직발전경로나 전망이 소수자 연대운동에 매몰되었거나 노동자계급성을 간과 했다거나 생태, 여성, 등등을 노동중심성과 수평적 가치로 설정하고, 변혁에 대한 분명한 자기전망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 정치집단을 무지개연합이라고 규정하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논쟁을 포기하고 사소한 차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무지개연합’으로 규정하고 비판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그 자체가 비난일 수밖에 없다.
누구든 상대에 대한 평가와 비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강령적 내용의 검토와 확인 없이 상대를 규정하는 건 동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럼에도 원론적으로 상대방을 비판할 자유가 보장된다고 주장한다면 무지개연합과 중도주의, 관료주의라고 비판한 그들에게 역으로 ‘소아병적’이라고 비판한다면 그들은 그 비판을 수용할 수 있을까. 현상적으로 주관적 시야에 보여 지는 형식만으로 사상과 철학을 편의적, 분파적으로 재단하는 게 현 시기 ‘혁사진영’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알맹이와 껍데기를 완전히 분리하여 사고하고 껍데기에 도취되어 현상적 껍데기만을 표현하는 걸 형식이라고 할 것이며, 애써 한쪽 눈을 가리고 한쪽만 바라보려는 사고는 과학이 아니며 좌측 프레임 속에 갇혀버린 낡은 것일 수밖에 없다.
▲ 공장에 핀 무지개 |
누구를 막론하고 무지개 앞에서는 가슴 속에 슬며시 번지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마다 '야, 무지개다' 외치며 저도 모르는 사이 탄성을 내지 않는가.
우리가 갖는 모든 가치는 자연의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자본이 쏟아내는 잉여가치의 오물들이 세상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듦으로서 점차 우리주변에서 투쟁의 실종과 함께 사라진 무지개를 재구성하기 위해 선명하지 못한 무지개 색상 중에 어떤 색상이 변혁에 역행하는가를 분명히 발견해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하늘에 펼쳐지는 오색 빛의 향연은 노동자계급의 희망을 향한 함성이다. 높고 넓은 하늘에 노동자계급의 비장한 심장의 박동을 퍼트리고 인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임무를 하나씩 되새기는 결의가 중요하다. 논쟁으로 발생하는 사소한 이견에 사활적 대응으로 일관하고, 함께 할 수 없는 대상으로 치부한다면 사회주의운동이 어떤 결과로 평가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모순에 대한 투쟁을 조직하지 않고 비판과 비난에 사업의 상당부분을 투여하는 건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 적과 동지를 분명히 구분하고 자본주의의 근본적 폐기를 향해 노동자계급의 힘을 집중시켜 내는 게 현 시기 ‘혁사진영’의 임무인 동시에 역할이 될 것이다.
이제 계절 너머로 사라진 부드러운 연두 빛 4월은 다음에 다가올 계절을 기약하며 시야에서 멀어진다. 화사하게 피어난 향기 잃은 라일락이 봄바람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5월을 담금질하고 있다.
120년 전 피의 5월, 30년 전 학살과 오욕의 5월, 뜨거운 항쟁과 혁명의 5월이 넋과 투혼들을 일깨워 보다 거대한 계급적 무지개를 만들어내는 것은 변혁을 향한 행보에 핵심이다. 머지않아 뜨거운 햇살과 함께 무지개 빛깔 자귀꽃이 피어날 6월이 눈앞에 와 있다.
바람 불고 비 내린 오늘, 작고 큰 물방울들이 다시금 결집하여 투쟁을 조직하고 투쟁의 성과가 산허리를 가로질러 우뚝 솟은 거대한 해방의 무지개를 세워 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작지만 견고한 입자들이 봄바람을 타고 노동자계급의 감동적 무지개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려운 상황일수록 변증법적 사고로 투쟁해 나가는 게 변혁을 향한 행보라고 생각하고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거친 봄바람을 일으키며 질풍노도와 같이 솟구쳐 오르길 희망한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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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노동자역사 한내>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