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30일 새벽, 노조법 개정논의에 항의하며 여의도 한나라당사에서 점거 농성 중이던 장석춘 한국노총 위원장이 농성장에서 몇 시간 사라졌다는 얘기가 돌았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인 오후 1시 30분, 장석춘 위원장은 한국노총 지도부와 국회 정론관에 섰다. 장석춘 위원장은 기자들 앞에서 대국민 담화문을 읽어 내려갔다. 담화문 내용은 한 마디로 한국노총의 합리적 노동운동 노선에 따라 투쟁은 접고 대화와 타협으로 노사정 합의를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장석춘 위원장은 이날까지 한나라당의 태도 변화가 없다면 정책연대를 파기하고 총파업 돌입을 선언하겠다고 엄포를 놨던 터다. 당시 장 위원장의 전격적인 대국민 담화와 협상 선언은 노동계 전체에 엄청난 억측을 낳았다. 항간에선 장 위원장이 사라진 새벽 동안 한나라당 지도부를 만나 뭔가를 주고받은 것 아니냐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 한국노총은 지난해 10월 15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고 만장일치로 한나라당 정책연대 파기와 총파업을 결의했다. |
4일 뒤 노동부와, 경총, 한국노총은 노조법 개정안의 토대인 1204노사정 합의안을 내놓고 손을 맞잡았다. 한국노총 내부는 들끓었다. 복수노조 문제와 노조전임자 문제를 전부 재계에 유리하게 합의해줬다는 비난으로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은 지도부 성토가 이어졌다. 한국노총 산하 연맹들과 지역본부장들의 지도부 사퇴, 노사정 합의 폐기, 한나라당 정책연대 파기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러나 장석춘 위원장은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한도가 한국노총에 유리하게 결정 날것이라는 자신감을 드러내며 총사퇴 요구를 봉합해냈다. 한국노총 위기는 여기서 멈추는 듯했다. 지도부가 가장 강하게 믿었던 한나라당과 정책연대를 통해 정치적으로 한국노총 주장이 먹혀드는 것 같은 착시 효과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임오프 한도가 올해 노동절 새벽 강행처리 되고 산하 금융노조가 강력히 반발하면서 착시효과는 끝났다. 한국노총이 막판 협상에서 조차 정부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났다. 임태희 노동부 장관과 김태기 근심위 위원장은 한 목소리로 4월 30일 자정께 2차로 낸 공익위원 조정안에 장석춘 위원장과 의견 접근이 있었다며 노동계의 반발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2차 조정안을 재계도 거부하자 공익위원들이 재계와 한국노총의 의견을 담아 최종안을 강행처리했기 때문에 의견접근이 이뤄졌다는 주장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모두 이 2차 조정안을 거부하기는 했지만, 한국노총 장석춘 위원장이 2차 조정안에 일정 긍정적인 의사를 낸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부가 노동계를 싸잡아 의견접근을 이뤘다고 주장한 것이다. 투쟁력이 뒷받침 안 된 협상은 큰 파고를 일으키지 못하고 의견접근이 이뤄졌다는 주장 속에 강행처리 됐다.
▲ 타임오프 한도가 강행처리된 노동절 아침, 한국노총은 임태희 노동부장관,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 정부, 정치권, 재계 인사와 함께 축하행사를 했다. |
합리적 노동운동 노선, ‘하박상쪽박’으로 귀결
한국노총이 철석같이 믿었던 한나라당 정책연대는 타임오프 논의과정에서 아무 힘이 되지 못했다. 대화와 타협, 양보교섭, 노사상생으로 상징되는 한국노총의 합리적 노동운동은 타임오프 한도 결정으로 파탄에 이르렀다. 합리적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생존권이 침해당해도 대화와 타협을 기초로 파업보다는 대외 이미지 제고와 다소 양보를 통해 일정한 실리를 얻겠다는 노선으로 요약된다.
2008년 장석춘 한국노총 위원장의 해외자본유치 활동과 2009년 노사민정 대타협 주도, 노조법 개정안 노사정 합의, 2010년 타임오프 협상을 이끌었던 합리적 노동운동은 재계와 정부의 찬사를 받았지만 돌아온 것은 배신과 쪽박이었다. 이는 IMF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가 정리해고와 파견제를 담은 노사정위 합의안을 수용하면서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 노선’의 실패가 부른 뼈저린 기억과 비슷하다. 민주노총은 이때부터 사회적합의주의 폐해를 깨닫고 노사정 합의체 참여엔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투쟁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한국노총이 그나마 실리라도 획득했다면 쪽박을 차는 일은 없었겠지만 노동절 새벽 통과된 타임오프 한도는 그마저도 정부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실리를 취할 힘은 정책연대로도 부족했음이 드러났다. 김태기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장은 타임오프 한도의 기준을 ‘하후상박(소규모 노조엔 전임자 수를 후하게 대규모 노조엔 박하게)’ 원칙으로 정했다고 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하박상쪽박(소규모 노조에도 박하고 대규모 노조는 아예 쪽박을 찬)’ 격이었다.
▲ 한국노총은 5월 6일 타임오프 한도의 노동부 장관 고시를 강행하면 정책연대 파기, 한나라당 낙선운동 등을 하겠다며 국회 앞 무기한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
한국노총의 해외자본 유치활동은 노동조합의 과격한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파업이나 단체행동 같은 투쟁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외국자본에 보여줘야 했다. 이는 헌법에 보장된 단체행동권의 포기로 이어진다. 2009년 노사민정 대타협도 임금양보와 무파업 선언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였지만, 임금은 임금대로 까이고 구조조정은 구조조정대로 당해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당시 노사민정 대타협 참가를 반대한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은 “한국노총은 투쟁할 능력도 안 되고 투쟁하는 지도부도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이미 한나라당과 한 몸이라 노사민정 대타협에서 고용과 임금문제를 모두 내주고 악용만 당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한국노총의 이런 행보 속에 한나라당과 3년 여간 이어온 정책연대는 일부 지도부의 정치권 줄타기 통로가 됐고 뒤통수와 퍼주기의 온상이 됐다는 내부 비난의 목소리까지 나왔다. 한국노총은 자신들이 불리할 때마다 지역 노사민정 협의체 참여 중단, 한나라당과의 정책연대 파기를 선언했지만 정치권 줄타기 통로를 포기하지 않았다. 금융노조는 정책연대에 목 맨 한국노총 지도부에게 “한국노총은 정부와 한나라당에게 철저히 농락당했다”면서 “ 정책연대의 댓가는 전임자 반토막과 노동조합 말살로 귀결 되었을 뿐”이라고 정책연대의 즉각적인 파기를 촉구했다.
자기희생의 거룩한 결단, 그 뒤를 따라오는 배신
한국노총은 정부와 재계에 대한 합리적 타협의 후과로 매번 찬사와 배신을 번갈아 받아 왔다. 2009년 2월 25일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대강당에서 열린 한국노총 대의원 대회는 장석춘 한국노총 위원장에 대한 찬사로 가득 찼다. 대회에 참석한 재계, 정부, 여당 정치인 등 외빈들은 한 목소리로 2.23 노사민정 대타협을 이끌어낸 장석춘 위원장에게 찬사를 쏟아냈다.
김영배 경총 부회장은 “이번 노사민정 대타협은 한국노총 위원장님의 노력이 컸으며 대의원 여러분이 대승적 견지에서 협력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고 찬사의 말을 전했다. 축하의 바통을 이은 당시 이영희 노동부 장관도 “장석춘 위원장과 한국노총 임원의 지도력과 대의원의 노력과 협력으로 대타협이 가능했다. 지난해 장석춘 위원장님이 취임한 이후 외국 투자 유치에 앞장서는 등 대화와 협력을 통한 합리적인 노동운동을 이끌고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 3월 10일 한국노총 창립 64주년 행사에서 장석춘 위원장의 노동관계법(노조법) 노사정 합의 결단을 두고 재계, 정부, 정치권은 장석춘 위원장에게 찬사를 쏟아냈다. 오른쪽에서 부터 장석춘 한국노총 위원장, 임태희 노동부 장관, 김영배 경총 부회장. |
이날 대의원 대회엔 여당대표도 참석했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도 “경제위기에 가장 어려운 근로자들이 대타협으로 자기희생의 거룩한 결단을 내린 것에 감사한다”며 “여러분의 소망인 전임자 문제, 비정규직 문제는 한국노총과 정책 협의회 등을 통해 한국노총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 해결하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하겠다”고 말해 전임자 문제엔 한국노총에 손을 들어주겠다는 식의 발언도 곁들었다.
그러나 노사가 함께 고통을 분담하자던 노사민정 합의는 이날 바로 휴지조각이 된다. 2009 대의원대회가 있던 날 오전 한국노총과 함께 대타협을 선언한 전국경제인연합회는 "30대 그룹 대졸 신입사원 연봉을 최고 28%까지 차등 삭감하기로 결정했다"는 '고용 안정을 위한 경제계 대책 회의' 합의를 발표했다.
한국노총은 즉각 반발하고 “합의문의 잉크도 마르기전에 초임 삭감을 들고 나온 것은 대타협의 합의정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자 도발이 아닐 수 없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한국노총의 반발은 노동조합의 일방적인 고통분담 분위기를 막지 못했다. 정부는 공공기관 임금 삭감과 구조조정을 주도하고 대졸초임 임금삭감 등의 정책으로 단기적이고 질 낮은 일자리 대책만 쏟아냈다. 이는 결국 한국노총 내 일부 공공부문 노조의 반발로 이어지기도 했다. 금융노조도 노사민정 대타협을 강하게 반발했지만 한국노총은 내부 비판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노동부도 한국노총을 이용한 노사민정 대타협의 여세를 몰아 양보교섭과 임금동결 분위기를 이어갔다. 노동부는 지난해 내내 양보교섭의 성과를 지속적으로 홍보했다. 올 1월 13일 노동부가 2009년 노사 양보교섭·협력선언과 100인 이상 사업장의 임금교섭 타결현황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양보교섭·노사협력선언은 6,394건으로 2008년 2,689건에 비해 2.4배 증가했다. 노동부는 “산업현장에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 양보교섭과 협력선언은 크게 증가하였고, 협약임금 인상률은 외환위기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특히, 노사가 자발적으로 고용유지, 임금동결·반납, 무파업, 기업내부 유연성 증대 등을 약속한 양보교섭이 3,722건으로 전체 58.2%를 차지해 전년에 비해 32배 이상 급증했다.
이런 결과를 예상한 한국노총은 정부-재계-한국노총이 함께 개최한 2009년 6월 4일 노사민정 합의 100일 평가 토론회에서 지도부의 입을 통해 강하게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다. 당시 장석춘 한국노총 위원장은 토론회 축사에서 "솔직히 왜 대타협을 했는지 착잡하다"며 "정부가 노사민정 합의정신을 위반하고 공기업 초임을 삭감했다. 내년엔 전쟁이 온다"고 경고했다.
이날 지정토론자로 나선 김종각 한국노총 정책본부장도 "노사민정 합의이후 대졸초임삭감, 공기업 초임 삭감과 구조조정, 공기업 단협에 대한 감사원의 직접적 개입은 위기 극복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합의에 참여한 한국노총이 움직일 여지를 없게 하고 조직원에게 비난을 받게 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성토했다.
노동기본권 강탈당했어도 정책연대 목매는 한국노총
개정 노조법 시행령이 확정 된 후 2010년 3월 10일. 한국노총 창립 64주년 행사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도 장석춘 위원장의 노조법 노사정 합의 결단에 대한 재계, 정부, 정치권의 찬사가 또 쏟아졌다.
김영배 경총 부회장은 “한국노총은 일부 노동계의 무책임한 투쟁 돌입보다는 실질적인 대화를 중시하고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한 대국민 선언 등을 통해 노사정 합의를 주도한 바 있다”면서 “무엇보다 장위원장의 포용력과 리더쉽이 중요했다. 2010년에도 한국노총이 한국경제를 담당하는 한축으로써 그에 걸 맞는 책임과 역할을 다하도록 힘을 모아주기를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도 노조법 결단을 축하하고 “한나라당에 심부름을 시키시면 열심히 하겠다”고 밝혔다.
임태희 노동부 장관도 “이번 과정을 통해 한국적 노사상생 협력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해준 장석춘 위원장과 지도부 결단에 대해서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찬사를 받았던 ‘지도부의 결단’은 지도부 천막농성과 총사퇴 요구로 돌아왔다. 심부름을 시키면 열심히 하겠다던 한나라당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타임오프 한도를 다시 정하겠다는 모양새만 취하고 실제 행동엔 나서지 않고 있다.
▲ 한국노총 산하 최대조직중 하나인 전국금융산업노조 본조간부 및 34개 지부 대표자와 상근간부 200여 명은 5월 3일 한국노총에 몰려가 "한국노총은 투쟁과 협상 모두 실패했다”며 한나라당과 정책연대 파기-한국노총 지도부 총사퇴를 요구했다. |
합리적 노동운동 이후엔?
장석춘 위원장은 이번에도 정책연대 파기 카드를 꺼내들었다. 노동부장관 사퇴와 정책연대 파기 예고 선언에 6일 오전 김무성 한나라당 신임 원내대표가 긴급하게 장석춘 위원장을 찾아왔다. 여의도 국회 앞에서 농성 중이던 장석춘 위원장은 농성장을 벗어나 한국노총 사무실에가서 기자들과 함께 김무성 대표를 맞았다. 이날 오후 3시 경찰은 한국노총 농성천막을 철거했다. 김무성 원내대표는 저녁 8시 30분께 국회 앞 한국노총 지도부 단식 농성장을 다시 방문했다. 두 번째 방문은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 한국노총을 만나 직접 이 문제의 심각성을 전하겠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번째 방문을 놓고 한국노총은 “김무성 대표가 ‘한국노총 출신 의원들과 잘 협조해서 한국노총이 수용할 수 있는 문제로 반드시 해결해 보겠다’며 ‘원내대표 되고 외부와 처음하는 약속인 만큼, 진정성을 알아달라. 2~3일 내에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며 여전히 정책연대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였다. 김무성 대표도 원내대표로써 첫 시험무대인 지방선거에서 한국노총이라는 변수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한나라당이 얼마나 한국노총의 요구안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이명박 대통령은 9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노사개혁도 중요 과제 중 하나”라며 “이번 노동법 개혁을 통해 선진국형 노사문화로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고 타임오프 한도 강행처리에 힘을 보탰다. 정책연대를 하고 있는 한국노총조차 정부주도의 노사관계 재편에 반발하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한국노총 소속 산별연맹의 여러 관계자들에 따르면 더 이상 정책연대로 이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애초 풀릴 문제면 날치기 처리도 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이다. 이렇듯 현 정부의 노사관계 선진화 자체가 노동기본권을 후퇴를 기본으로 하고, 심지어 근로기준법까지 후퇴 시킬 계획을 세운 상황에서 현재 한국노총 식 노동운동이 할 수 있는 것은 퍼주기 협상을 통한 지분 유지 밖에 남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공공부문이든 사기업이든 노사관계 전반을 들여다보면 이명박 정부는 합법적 노동조합 활동 까지도 전부 무력화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위해 노동기본권 자체를 부정하고 모습도 보이고 있는 MB정권과는 타협을 하면 할수록 노동조합이 더 많은 것을 내줘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국노총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투쟁력을 중심에 둔 노동운동을 펼칠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정책연대의 한계가 완전히 드러났고, 노동기본권과 노동조합 말살을 현실로 체감하는 상황에서 한국노총의 운동노선에 변화가 없다면 정권의 2중대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는 높아지고 있다.
한국노총은 애초 대의원 대회에서 노조법 개정 투쟁을 위한 총파업과 정책연대 파기를 결정한 바 있다. 현 국면에서 대의원 대회 결정 사항과 다른 투쟁 전술로의 전환, 투쟁 실패, 협상 실패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라는 현장의 요구는 한국노총도 운동노선과 조직운영의 혁신이 새로운 과제임을 알려주는 징후로 읽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