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3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의 UN 본부에서 ‘2010년 NPT 평가회의’가 개막됐다. 이번 평가회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전에 없는 희망과 기대가 담겨 있다. 지난 해 4월, ‘핵 없는 세계’를 표방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프라하 선언> 이후 첫 번째 열리는 평가회의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바마 행정부는 <프라하 선언> 이외에도 러시아와 함께 <새로운 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을 체결하고 <핵안보정상회의>를 개최하는 등, 현존하는 핵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번 평가회의에 189개 조약 당사국 외에 세계 121개 반전평화운동 단체에서 1000여 명의 활동가들이 옵저버 자격으로 참가한 것에서도 위와 같은 기대감을 읽을 수 있다.
▲ 개막 전체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는 반기문 UN 사무총장.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프라하 선언을 언급하며 ‘지금이 바로 행동할 때’라고 말했다. [출처: 수열=뉴욕] |
살아봐야 아는 게 인생
그러나 이번 평가회의가 많은 사람들의 기대만큼 ‘핵 없는 세계’를 위한 전환점이 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그것은 우선, 미국과 러시아가 New START 협상을 맺으며 핵군축을 약속했지만 여전히 불충분하고, 실현 가능 여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평가회의의 사이드 이벤트로 러시아 정부 대표단이 5월 6일에 주최한 ‘러시아의 NPT 준수 브리핑’에서도 이러한 우려를 확인할 수 있었다. New START가 핵군축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는 참석자의 질문에 러시아 정부 대표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집을 지었다고 가정해보자. 그 집이 정말 좋은 집이라고 언제 대답할 수 있는가? 물은 잘 나오는지, 전기 공급 문제는 없는지, 살아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언제쯤 정말 훌륭하다고 답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문제다.” 그는 또한 이렇게 덧붙였다. “New START는 아직 발효되지 않았다. 그것이 미국 의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도 우리로선 알 수 없다.”
줄이긴 줄이는데
New START를 통해 미국과 러시아는 보유하고 있는 전략 핵탄두를 1,500-1,675개 수준으로 감축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교묘한 탄두 계산 방식 때문에 실제 감축 효과는 미미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협정은 핵무기를 탑재한 폭격기 수를 기준으로 해, 핵 폭격기 수만 줄이면 탑재된 핵탄두 모두 감축된 것으로 계산하도록 되어 있다. 장거리 폭격기 한 대가 6-20개 정도의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데 폭격기 한 대를 줄이면 그것이 탑재할 수 있는 탄두 개수만큼 감축한 것으로 셈하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START가 ‘전략’무기 감축 협정이란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핵무기는 그 용도에 따라 전략 핵무기와 전술 핵무기로 구분하지만, 이렇게 구분해보면 보통 300Kt(킬로톤)의 파괴력이 그 기준이 되기도 한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 ‘리틀보이’의 파괴력은 13-18Kt, 나가사키에 떨어진 ‘팻맨’은 21Kt 정도로 추정된다. 폭탄 투하 후 4개월 내에 사망한 사람만 히로시마 9만-16만 6천명, 나가사키 6만-8만명 정도로 추정되고, 이후 사망자나 후세의 고통은 측정조차 불가능하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전술핵은 내버려두고 전략핵만 일부 감축하는 것이 핵 없는 세계를 위해 어떤 기여를 하는지 의문이 든다. 참고로 1Kt은 TNT 1000톤(톤이다! 그램이나 킬로그램이 아니다!)의 폭발력을 나타낸다.
평가회의를 통해 드러난 미국의 속셈
평가회의 개막 당일 오후 전체회의에서 미국 측의 발언이 있었다. 미국 대표로 발언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몇몇 이탈 세력들(outliers)이 국제 사회에 도전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규칙은 지켜져야 하고, 위반은 처벌되어야 한다...(중략)...지금 이 회의가 강력한 국제 사회의 응답을 보여줘야 할 순간이다.” 오바마가 표방한 핵 없는 세계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미국이 응답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핵무기 감축 의무와 비확산 의무는 NPT 체제의 양대 축이다. 핵보유국은 핵무기를 줄여가야 하고, 비핵보유국은 핵무기 보유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이 말하는 ‘국제 사회의 규칙’은 핵무기 감축보다 비확산 쪽으로 훨씬 더 기울어져 있다.
1995년 NPT의 연장을 결정하기 앞서 미국은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의 비준을 약속하면서 핵보유국들의 지지부진한 군축에 불만이었던 비보유국들을 달랬다. 그러나 막상 NPT의 무기한 연장이 결정되고 나서는 태도가 달라졌다. 1999년 미국은 CTBT에 대한 국회 비준을 거부했고,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행이 되지 않고 있다. 또한 2002년에는 미사일방어망(MD)을 추진하기 위해 <탄토탄요격미사일제한협정>(ABMT)도 파기했다. 미국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국제 사회의 규칙’을 꺼내들었다, 쓰레기통에 쳐박았다를 반복하고 있다. 결국 미국이 주장하는 ‘국제 사회의 규칙’은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하다.
▲ 평가회의 사이드 이벤트로 5월 5일 미국의 국무부가 주최한 ‘미국의 군축 이행’ 모습. 국방부 관료 등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미국은 자신들의 정책 홍보에만 주력하고 시종일관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출처: 수열=뉴욕] |
멀고도 먼 ‘핵 없는 세계’
동어반복이지만 ‘핵 없는 세계’는 ‘핵이 없어야’ 가능하다. 아무리 차단 조치를 강화한다고 해도 핵무기의 확산을 막을 수 없다. 1971년 인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파키스탄이 ‘온 국민이 풀만 먹는 한이 있더라도 핵폭탄을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그 말을 실현한 것처럼, 지금과 같은 절대적 전력 차이는 수많은 국가들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절멸의 무기 경쟁에 뛰어들도록 만드는 유인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차단하고 처벌해도 암시장은 뒤편 어디선가 존재하기 때문에 암시장이다. 핵무기와 이에 필요한 물질, 장치들이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을 차단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거래될 수 있는 상품이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핵분열 물질을 생산하지 않는 것(FMCT. 핵분열물질금지조약), 핵무기 개발을 위해 핵실험을 하지 않는 것(CTBT), 그리고 핵보유국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핵무기를 하루빨리 폐기하는 것이 바로 핵무기와 핵테러의 확산을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제 ‘핵 없는 세계’를 향해 국제 사회가, 그리고 민중들이 올바른 해답을 보여줘야 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