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최근 노조 전임 활동 문제와 관련해서 근로시간면제심의위가 가동되고 있다. 또 복수노조 허용과 관련해서 사측과 정부는 교섭창구 단일화로 노동계를 압박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 논의를 통해 노조전임자와 복수노조 관련한 노동조합법도 바뀔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정규직 철폐 운동을 하고 있는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에서 두 개의 기고 글을 보내왔다. 다소 전문적이고 논쟁적인 글이다. 하지만 최근 상황과 관련해서 독자들과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글이라 전문을 게재하기로 했다.
불법을 감행하는 적극적 연대전략으로 교섭창구 단일화를 분쇄하자!
개악노조법은 민주노조 운동의 자율적 연대 질서를 부정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제도적 관리 하에 두고 통제하고자 한다. 그래서 자율교섭이 아닌 창구단일화라는 방식으로 교섭대표노조에게 대사용자 관계 및 법제도적 사안의 주체로서의 권한과 함께, 노동조합들을 관리⋅통제할 권한까지 부여한다. 교섭대표노조의 대표자가 교섭권과 체결권을 가지고, 쟁의행위도 노동조합들이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만약 교섭대표노조가 소수노조나, 비정규노조의 권리를 위해서는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붙이지 않는다면? 그에 대항할 방법 역시 개악법에 따르면 교섭대표노조에게 부여되어 있는 공정대표의무를 요구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독자적으로 교섭하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투쟁을 결정하지 못하는 노동조합, 교섭대표노조가 되지 못한 노동조합에게 권리는 없다. 노동조합으로서의 활동이 무의미해 지거나, 교섭이나 쟁의행위와 관련하여 독자적으로 활동한다 하더라도 불법적인 것으로 통제 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다수가 되어 교섭대표노조가 되는 것이 우리의 선택이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노동조합의 활동은 다수가 되기 위한 조직화와 조합원의 이해에 집중하는 실리적 협상일 뿐이다.
다수화를 통해 권리를 획득한다는 것은 소수에 대한 배제를 동반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민주노조운동이 합법성과 실리에 묶여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불법’이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본과 정권이 정한 절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수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과감하게 계급적 원칙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바로 그 지점을 노리고 자본은 ‘교섭창구 단일화’를 내밀었던 것이다. 그럴 때 노동조합은 필연적으로 다수가 되기 위해서 더욱 실리중심으로 활동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조합들이 교섭대표노조가 되기 위한 다수화 전략에 집중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끊임없는 조직화, 일상적 조직화는 노동조합의 당연한 과제이나, 이것은 노동자의 권리 확장과 단결을 위한 연대의 과정이고 민주적인 조직운영의 과정이자 결과물인 것이지, 결코 다수가 되어 제도적 권리를 보장받기 위함이 아니다. 다수가 되기 위한 조직화는 조합원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노동조합을 만들어낼 뿐이다. 다수가 되어서 합법적으로 주어지는 혜택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그로부터 민주노조다운 노조 운영과 연대활동을 끌어내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미조직 노동자를 조직하며 다른 노조와 연대하기 보다는, 비조합원을 비롯한 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를 배제하고 조합원 중심의 이해를 도모하게 될 우려도 존재한다. 조합원의 이해를 철저히 옹호하는 노조가 조직화에서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결국 전체 노동자를 위한 투쟁보다는 조합원의 이해를 위한 활동, 조합원에게만 적용되는 단체협약의 체결을 위해 투쟁하는 것만으로 활동이 집중될 것이다.
과반수 노조가 되면 좀 더 편하게 교섭할 수 있기 때문에, 소수노조를 위해 공정대표의무를 지키며 잘만 하면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은 될 것이라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아무리 경계한다고 하더라도 교섭과 단협 체결의 권한을 독점하는 순간, 교섭대표노조로는 사용자와 소수노조 사이에서 중재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이 상태에서는 아무리 잘 한다고 하더라도 비정규노조나 소수노조에 대한 시혜적 태도를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그렇다면 개악법을 깨기 위한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저들이 원하는 것은 노조끼리 경쟁하여 다수를 차지하는 노조만 상대하여 노동관계에 드는 비용과 노력을 줄이고, 가능하면 사측과 타협이 잘 되는 노동조합을 상대하고 싶을 것이다, 어용노조를 만들기도 할 것이며, 노조 간 경쟁을 부추기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다수가 되어 교섭대표노조가 되거나, 노조 간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적극적인 연대전략을 펴야 한다. 그래야 개악법이 구상하는 것, 기업별로 꽁꽁 묶어 두고, 실리를 중심으로만 교섭하고, 또 타협하게 만드는 것을 깰 수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 연대파업을 조직하자.
교섭대표노조로 관할되는 노동조합의 합법적 권리 안에서 연대파업은 불법화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노동조합이 노동조건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사안으로만 노조활동을 가두면서, 연대파업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정치적 활동과 투쟁을 봉쇄할 것이다. 물론 지금도 노동자의 연대파업, 정치파업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불법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산별의 파업이라는 방식으로 연대투쟁이나 정치파업에 대한 탄압을 최소화하고자도 했고, 임단협 시기에 맞춘 시기집중의 방식으로 투쟁을 벌여보기도 했다.
하지만 산별교섭 부정, 장기간의 단일화 절차를 통해 그 조차도 어렵게 만드는 것이 개악법의 내용이다. 합법의 틀에 들어가려고 한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합법의 틀을 벗어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 영세사업장 노동자의 투쟁 및 여타 민주노조 운동 진영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연대하자. 노동자들의 연대투쟁, 연대파업을 저들은 두려워한다. 그래서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막으려 든다. 복수노조 시대가 된다면, 더 많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벌어지고, 더 많은 연대투쟁이 필요하고, 또 전개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연대파업에 대해 불법의 낙인을 찍고 더욱 강하게 통제하려 들 것이다. 그를 뚫고 조직해 내는 연대투쟁, 불법을 무릅쓴 연대파업이 노동자 투쟁을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악법을 정면으로 깨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이다.
또 소수노조는 독자적으로 투쟁과 파업을 실행하자.
개악법은 모든 노조의 공동의 투표라는 절차적 요건을 요구하고, 그 외의 투쟁을 모두 불법으로 규정하겠지만, 절차적 요건 미비가 투쟁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다수 소수를 불문하고 독자적 요구를 가지고 투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권리를 실현시키는 실질적 힘은 소수노조의 독자적 파업으로만 형성될 수 있다. 비록 그러한 독자적인 투쟁은 개악된 법안에서는 불법이다. 하지만 불법을 감내하면서 투쟁할 수 있을 때, 노조가 노조를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고, 그럴 때 독자노조의 파업권이 사회적으로 제기될 가능성도 생긴다. 소수노조가 다수가 되기 위해 연합하는 것은 다수화 전략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연합이 아닌 공동의 투쟁 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연대해야 하고, 그 투쟁을 실질화하기 위해 독자적인 투쟁을 벌여나가야 하는 것이다.
교섭대표노조를 포함한 노동조합 전체의 투표를 통해 결정하지 않은 소수노조의 독자적인 투쟁은 절차적으로는 무조건 불법의 낙인이 찍힐 것이다. 연대파업, 정치파업은 당연히 불법으로 규정되고 탄압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권리를 위해 투쟁하지 않을 것인가? 연대하지 않을 것인가? 불법을 감행하는 단호한 결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보다 적극적인 불법파업의 조직이 개악법을 깨뜨리고 권리를 쟁취하는 길을 여는 방법이다.
개악법은 기업별 노조운동의 관성에 기대 힘을 발휘한다, 민주노조 운동의 재구성으로 개악법이 기대고 있는 지반을 부수어야 한다
민주노조는 그간 사업장 단위의 활동 관성을 극복하고 노동자의 더 큰 단결을 위해 초기업 단위 노동조합을 결성해 왔으며, 그 가운데 산업별 노조의 건설은 민주노조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러나 개악법은 기업의 틀로 노동조합 활동을 강제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흐름을 역행시키려 하고 있다. 교섭창구단일화의 대상으로 초기업단위 노조의 지부, 분회 등을 포함하도록 하여 산별교섭의 봉쇄 및 산업별 차원의 노조 활동을 불인정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노조 운동을 후퇴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산별 강화, 중앙교섭으로의 돌파라는 구호만으로는 개악법의 의도를 분쇄하기 어렵다. 기업단위 교섭창구단일화라는 개악법의 의도가 산별운동을 해체하려는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기업의 벽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운동의 관성이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라는 개악법의 힘을 오히려 키우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의 상태를 분명히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실질적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산별교섭은 여전히 공전하거나, 후퇴하고 있고, 사실상 기업별 교섭, 사업장별 교섭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으며, 노동조합의 활동 또한 사업장의 벽을 쉽게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산별노조를 포함한 초기업단위 노조는 소수, 개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권리를 실현할 수 있도록 했으나, 그 이상의 활동을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의 관성은 자본의 전략에 더욱 힘을 싣고 있다. 자본은 수직적 하청계열화와 비정규직화를 통해 위기를 지속적으로 하위로 전가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기업단위로 아무리 투쟁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자본은 그 부담을 하청으로, 비정규직에게로 전가시켜 버리면 그만이다.
이를 극복하고 전체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사수하며, 노동운동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덩치만 큰, 사업장 단위 집합체의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산별교섭의 제도화, 중앙교섭으로 돌파하겠다면, 그 내용은 노동자들을 분할하고 위계화하는 자본의 의도를 분쇄하는 것으로 분명히 잡아야 한다. 다만 체결을 목적으로 한 형식적인 산별단협이 아니라 투쟁을 조직하는 중앙교섭을 하자.
지금까지 최저임금이나 비정규직 사안은 체결이 가능한 수준에서만 제기되어 오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 왔다. 투쟁으로 쟁취하기 위한 요구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고,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를 위해 투쟁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 그것을 어떻게 투쟁으로 만들 것인지를 고민하고 제출해야 한다. 흉내만 내는 것으로는 전체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끌어올리지 못한다. 조직된 노동자들은 최저임금 수준이 되고, 미조직된 영세사업장의 노동자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산별의 최저임금 요구도 이제 실질적으로 하위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전체 노동자의 노동조건 상승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투쟁으로 만들어 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별최저임금에 대한 중앙교섭만이 아니라 그것을 현실에서 쟁취할 수 있도록 합의된 산별최저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사업장에 대해서 조사하고 폭로하고 타격하고 투쟁하면서 대상 노동자들을 투쟁의 주체로 세우는 과정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또 하나 원청의 사용자성 책임 쟁취를 위한 투쟁을 전면화 해야 한다. 이 정치투쟁을 기획함으로써 우리는 기업단위로 강제하는 교섭의 틀을 깨는 기반을 형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위기를 하위 자본에게로 전가하고 하위자본은 다시 노동자들에게로 책임을 전가하는 이러한 구조를 분쇄할 수 있다. 그리고 원청의 사용자책임을 물음으로써 원청 사업장의 노조와 하청사업장 노조가 기업단위를 넘어서는 공동투쟁을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긴다.
그리고 산별의 지역강화라는 구호를 실질화 해내야 한다. 우리는 미약하나마 지역운동의 흐름을 만들어 오기도 했고, 충북이나 경북 등에서 지역 총파업을 시도해 본 경험을 또한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산별노조의 지역 활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해 오기도 했으며, 의미 있는 사례를 발굴하고 지역차원의 연대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토론하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맹아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지금, 개악법은 초기업 단위 노조의 활동을 다시금 사업장 단위로 분할하려고 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업의 틀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이에서 연대하고 공동으로 투쟁할 수 있는 주체들의 만남이 필요하기에 지역을 기반으로 민주노조 운동을 구성하는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다는 것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지역 차원의 집단교섭, 공동 교섭이 필요하다. 지역교섭을 실질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자를 집단화하고 호출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사용자들을 호출하여 교섭하고, 필요하면 집단적으로 나와서 교섭하도록 요구하고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기업으로 노조를 묶어두려는 개악법의 의도를 깰 수 있다. 또한 이는 사업장 단위로는 소수인, 개별 조합원들의 실질적 권리 쟁취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작은 사업장에서 잦은 이동을 하는 노동자들은 기업단위 구조로 조직되기 어려우며, 조직된다 하더라도 사업장을 중심으로 한 노조운동 속에서는 많은 이들이 개별 조합원으로 존재하여 실질적인 권리의 쟁취나 노조활동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지역의 집단교섭을 진행하고, 전략적인 조직화를 통해 이후 지역 교섭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기획이 필요한 것이다.
또 이 지역 교섭에서는 자본가뿐만 아니라 지자체 역시 사용자로서 호출되어야 한다. 지역의 노정 투쟁, 노정 교섭을 통해 노동권을 쟁취하고 삶의 권리를 쟁취하는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이 또한 기업단위의 노동조건 투쟁으로만 운동을 가두려는 개악법의 의도를 분쇄하는 방법이다.
개악법에 대한 대응으로서 중앙교섭으로 돌파, 산별 강화가 의미가 있으려면 이렇게 기존 관성을 극복하는 노력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 다만 구호뿐인 산별 강화는 기업별 활동 관성을 고착화시킬 뿐이며, 기업별로 알아서 살아남기를 하게 만들 것이다. 또한 산별노조 지역 활동의 강화 없이 다만 덩치만 키우는 더 큰 산별 건설로 산별 강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업종 강화와 기업단위 관성 강화로 회귀될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정규직, 소수노조의 권리는 산별 내에서도 소외되고 배척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악법이 노리는 것, 바로 이렇게 자충수를 두어 가는 것이다.
복수노조 시대, 악법을 넘어 우리가 열어가야 할 조직화의 방향은 무엇인가?
더 많은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끊임없는 조직화, 일상적인 조직화는 노동조합의 당연한 활동이다. 그러나 지금, 이 조직화가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복수노조의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수화를 통해 합법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조직화가 아니라, 더 많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권리 쟁취를 위한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미조직 노동자의 조직화는 지금까지 보다 더 큰 과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오랜 기간 복수노조 금지라는 악법은 민주노조의 조직과 활동을 가로막아 왔다. 그 속에서 초기업단위 노동조합의 조직으로 한계적이나마 노동자들의 조직과 활동의 가능성을 열어왔다. 이제는 그를 넘어 더 많은 노동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해야 한다. 이 조직화를 통해 우리가 해내야 하는 것은 ‘법으로 인정된 노동조합’으로만 권리가 제한되고 있는 상태를 뛰어넘는 것이다.
헌법이 보장하고 부여하는 노동3권은 모든 노동자들에게 있다. 반드시 노조법이 인정하는 노동조합‘만’이 가지는 권리가 아니다. 그러나 정부는 마치 합법적 절차를 거쳐 구성된 노동조합에게만 권리가 있는 것처럼 노동3권을 협소화 시켜왔다. 노동조합이 아니라면 교섭권도 없고, 파업도 하지 못하고 정부와 자본의 탄압에 고스란히 당하게 되는 상태로는 권리의 확장을 이룰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쟁취하고자 하는 권리, 확장하고자 하는 권리는 무엇인가? 바로 단결권과 파업권이다.
노동자는 자유롭게 단체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노동조합이라는 법적 형식을 가지든, 아니든 관계없이 단결하고, 요구의 쟁취를 위해 교섭하고 투쟁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또한 노동자의 요구는 개별 자본만을 상대로 하지 않는다. 때로는 개별 자본일수도 있지만, 산업의 자본가 단체와 교섭할 수도 있고, 정부와 교섭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모두를 상대로 투쟁을 전개할 수도 있다. 그 권리는 노동조합이라는 법적 형식에 갇힐 수 없는 모든 노동자에게 부여된 헌법적 권리이다.
그래서 한 번 생각해보자. 활동가로 모인 노동자 조직이 파업투쟁을 전개한다고 하더라도 헌법상 정당한 노동권의 행사라면 적어도 그 조직이 ‘노동조합’이라는 형식을 갖추지 않았다고 하여 노동조합이 아닐 이유가 없고, 처벌받을 이유 또한 없는 것 아닌가. 또한 법적으로 노동조합 신고를 하지 않은 법외 노조가 투쟁을 하고 파업을 전개한다고 해서 투쟁의 정당성이 무조건적으로 부정될 이유 또한 없는 것 아닌가. 다만 그들이 요구하는 형식을 갖추지 않았다 해서 말이다.
노동조합에게만 권리를 부여하는 것에서, 개악법은 더 나아가 교섭대표노조에게만 이 권리를 부여하고자 한다. 합법적인 노동조합으로의 조직화만으로는 이 체계를 뒤집기가 힘들다. 여전히 노동조합으로의 조직화를 통해 다수노조를 꿈꾸게 되고, 그를 통해 보다 편하게 교섭하고, 실리를 찾기를 원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개악법에 맞서 적극적으로 법외노조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제도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다양한 노동자 조직을 구성하고 적극적으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복수노조 시대, 노동자가 반드시 하나의 노동조합에만 가입할 필요도 없듯이 노동자가 다양하게 조직을 구성하고 가입하고 활동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각각에게 형식에 무관하게 노동3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 권리들은 제도를 통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미 보장된 합법적인 노동조합 틀의 바깥에 놓일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하는 데에서부터 그것은 시작된다. 그 조직은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하지만 정부에서 인정하지 않고 탄압을 하더라도 건설기계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노동조합으로 선언하며 투쟁함으로써 그러한 제도의 한계를 드러내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벌여나가듯이, 이미 제도 바깥에 놓인 많은 노동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서 적극적으로 조직할 때, 노동조합의 한계를 더욱 좁게 만들려는 자본의 의도는 균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권리를 위한 투쟁, 노동조합이 아닌 다양한 노동자 조직의 투쟁, 노동조합과 단체교섭으로 갇히지 않는 다양한 노동자들의 요구와 투쟁이, 복수노조를 허용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교섭하고 투쟁할 수 있는 노동조합 숫자를 줄여 노동자의 힘을 죽이려는 개악법을 깰 수 있는 방안이다.
마치며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는 심각한 악법이다. 하지만 조직된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지키는 것에 급급하다면 개악법에 대한 대응을 고민하기도 전에 복수노조 자체가 귀찮은 일이고, 오히려 기업단위 복수노조를 금지하고 있는 지금의 상태에 만족하게 된다. 하지만 초기업단위로 조직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노동조합을 만들 때 마다 복수노조 시비가 있고, 그로 인해 노동3권을 침해당하는 노동자들은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현 상태 그대로 가자는 의견은 비정규직 노동자, 소수인 노동자들이 여전히 실질적으로 노동3권이 침해당하는 상태를 외면하겠다는 것일 뿐이다. 복수노조 허용, 자율교섭 쟁취가 되더라도 그를 새로운 운동의 계기로 삼기 위해서는 운동의 방식, 관성이 바뀌어야 한다. 기존의 것을 지키기 위해 꼼수를 쓰거나, 법이 다시 유예되기를 바라는 것은 반노동자적 행위로 흐를 수 있는 지름길이다.
개악법 분쇄 투쟁 속에서 우리가 외치는 ‘복수노조 인정, 자율교섭 쟁취’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여기에 있다. 이 요구는 타협할 수 있는 선이 존재하는 요구가 절대 아니다. 소수노조의 권리를, 비정규 노조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연대하고 조직하겠다는 투쟁의 결의를 담아 외쳐야 하는 구호다. 그리고 불법의 낙인에 맞서 노동자 투쟁에 대한 사회적 정당성을 쟁취해 내는 투쟁,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복수노조 시대를 예비하며 노동자를 조직해 내는 노력, 그로부터 다시 운동을 확장해 가는 전략과 태세를 이제는 진정 갖추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