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박일수 열사가 노동운동에 던진 고소장

[기고] 미포 조선 굴뚝 투쟁의 이영도 선배와 동행한 참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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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를 감싼 영축산 봉우리엔 운무가 가득하다. 겨울인데도 며칠을 계속 비가 내리고 있다. 지난봄에 뜯어 말려 놓은 나물들인가, 한겨울인데도 고사리며 취나물이 가득한 비빔밥을 한 그릇씩 비운다. 생명이란 참 오묘하다. 오래전에 뿌리를 잃은 나물들이지만 아직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을 봄날의 향기를 담고 있다.

박일수 열사의 묘역을 참배하고 내려온 한 무리의 노동자들이 통도사 앞의 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다. 박일수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육년, 올해는 기일인 2월 14일이 설날이라 미리 참배를 하는 모양이다. 지금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은 해마다 열사의 묘역을 참배해 왔겠지만 나는 올해 처음으로 그의 영원한 집을 찾았다. ‘노동 열사 박일수’라는 큰 문패를 단 그의 집. 도착해서야 처음으로 오면서도 술 한 병 사들고 오지 않은 나의 무심함을 자책했지만, 허나 어쩌랴. 나의 삶은 자주 그랬다. 항상 순간에 무심했고 뒤늦게 미안했고, 그러면서도 늘 이해받길 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오늘은 정말 부끄럽다.

박일수 열사는 현대 중공업 사내 하청 노동자였다. 1954년생인 그는 쉰 한 살의 봄을 맞지 않았다. 2004년 2월 14일, 그는 절망스러웠던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뒤로하고 차라리 그 자신이 겨울을 이기고 힘겹게 피어 오른, 그러나 차가운 바닥으로 몸을 던져 버린 동백꽃이 되었다. 그해 2월, 그는 방어진 동백꽃처럼 붉은 불꽃으로 저물었다.

나도 앞서간 열사들의 고뇌와 희생에 같은 심정이다. 나의 한몸 불태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이 착취당하는 구조가 개선되길 바란다. 악질 협력업체 사장 박진용 같은 사람이 이 사회에 발붙일 곳 없어야한다. 부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도 사람답게 살수 있는 진실된 노동의 대가가 보장되는 일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박일수 열사의 유서 중에서-

울산에서 경남 양산에 있는 솔밭산 공원묘지를 찾아 가는 동안 여러 번 길을 잃었다. 운 좋게도 나는 이영도 선배가 운전하는 진보신당 차를 얻어타고 편하게 올 수 있었지만 운전하는 사람은 한번 길을 잘못 들기 시작하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빗길 속에서 이정표까지 확인하며 운전을 해야 하는 그는 핸들을 안은 듯이 잡고 운전석 유리 앞을 살피고 있다. 길이란 그런 것이다. 자주 오는 길이라 해도 날씨와 상황에 따라 사람을 흔들리게 한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지만 차를 세우고 근처 가게에 들러 공원묘지로 가는 길을 몇 차례 더 확인하고서야 우리는 솔밭산 묘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영도 선배는 2008년 12월 24일 새벽, 미포조선 현장 탄압 중단과 하청 노동자들인 용인 기업 노동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며 미포 조선 노동자 김순진 (‘현장의 소리’ 의장)씨와 함께 현대 중공업 소각장 백미터 굴뚝에 올라 한 달간 투쟁을 하신 분이다. 2009년 1월 23일 굴뚝에서 내려온 후 병원과 감옥에서 한동안의 세월이 지나갔다. 일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때를 회상하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는 나의 질문에 돌아온 그의 대답이 무겁다.

“회상이요? 회상할 시간도 없지만, 회상을 잘 안하죠. 미포 현장은 더 안좋아졌고, 투신했던 이홍우 조합원은 건강이 여전히 안좋고, 노조 운동이 바르게 서야 하는데,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방보다는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책임을 느끼죠.”

“박일수 열사가 현장에서 소장에게 두들겨 맞고 민주노총으로 상담온 적이 있었어요. 그는 현대 중공업 노조에 대한, 회사에 대한 항의를, 민주노조 진영으로 고발장을 접수한 거죠.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충을 담아 고소장을 제출한 거죠. 노동 운동권이 고소장을 접수안하니까 죽는 거죠 .이게 지금 민주 노조 운동의 수준이에요. 우리 책임이에요.”


현대 중공업 소각장 100미터 굴뚝위의 고공투쟁은 애초 미포조선 하청기업인 용인기업 노동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던 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되었다. 해고된 후 오년, 대법원의 복직 판결을 받고도 미포 조선 현장으로의 복귀가 막히자 미포 조선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하청 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해 투쟁하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만난 미포 조선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하청 노동자인 용인 기업 노동자들의 삶을 진심으로 가슴 아프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규직인 자신들의 처지와는 거리가 있는 하청 노동자들의 삶이었지만, 미포조선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잔업중단과 감시, 협박등 회사의 모진 탄압을 받으면서도 용인 기업 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굴뚝에 오른 이들도 정규직 노동자인 김순진씨와 상급 단체인 민주노총 울산본부 수석부위원장인 이영도 선배였다. 자신의 삶과 관련된 이익만 놓고 보면 굴뚝에 오를 일이 전혀 없을 사람들이었다. 눈 딱 감고 살면 못살 것도 없지 않은가. 눈 뜨고도 보지 않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가.

태어나면서 귀족노동자 하청노동자로 태어나지 않았고 어떡하다보니 직영노동자,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로 살 뿐인데 직영노동자라 하여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를 기만하고 멸시할 자격은 없다. 이런 현대 개좃같은 풍토가 개선되어야 한다. -박일수 열사의 유서 중에서

박일수 열사의 유서에는 회사에 때한 분노뿐만 아니라 직영이라 불리는 정규직 노동자들에게서 당한 모멸의 아픔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박일수 열사가 분신한 후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박일수 열사가 마지막까지 가슴에 안았던 한은 조금도 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러기에 더욱 미포 조선 노동자들의 투쟁은 소중하다. ‘미쳤냐’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위험을 감수하고 불구덩이로 들어간 사람들. 진작에 그랬다면, 우리 모두가 그랬다면, 박일수 열사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또 다른 노동자가 죽지 않을 것이다. 그 깊은 자책이 그들을 굴뚝으로 끌어당긴 것일까. 박일수 열사가 던진 고소장을, 열사가 있는 하늘 가까운 굴뚝위에서나마 그 아픈 고소장을 받아들이고 싶었던 건가.

지난 1월 29일, 미포조선 현장 투쟁위원회(의장 김석진)의 주최로 열린 ‘미포 투쟁 승리 결의와 투쟁 기금을 마련을 위한 일일 주점’에서 이영도 선배는 미포 투쟁 1년을 돌아본 소감을 말했다. (녹취가 아니라 급하게 받아 적은 말을 그대로 정리한 거여서 빠뜨린 내용도 많다. 최대한 내용을 복원해서 정리해 본다.)

“작년 겨울, 너나 할 것 없이 고생한 지역의 동지들, 전국의 동지들! 미포 투쟁을 통해 지역 연대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지난번에 미포 투쟁 지원 대책위 일을 하다 구속된 최병승 동지를 면회했는데, 보기에는 잘 있다고 하지만 저희는 딱 보면 알 수 있거든요, 잘 있는지, 괴로워하는지. 제가 보기엔 괴로운 거 같았는데요, 다른 이유도 있을 거구요.

미포 조선 이홍우 동지가 건강이 안 좋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잘 회복이 안 된다고, 여전히 개선되고 있지 않는 민주 노조, 오늘의 상황이 여전히 구속된 동지를 괴롭게 하는 것 같습니다. 밖에 있는 동지는 한번 접견해야지 하면서도 접견을 끝내 못하고, 안에 갇혀 있는 동지는 모든 동지들께 편지를 해야지 하면서도 끝내 못하고 출소를 하는, 그래도 그런 마음이 남아 있다면......,

밑에서 싸우는 동지들이 더 고생이 많았죠. 굴뚝 투쟁을 비교적 소상히 적은 일기를 노동 뉴스에 연재했는데 빠진 이야기 중 하나가 헬기 이야기였습니다. 헬기가 뜰 때마다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렇게 진압이 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너무 괴로웠습니다. 순진이는 순진이대로, 나는 나대로 생각이 있고, 헬기가 뜰 때마다 너무 괴로웠습니다. 어떤 문제든 자기 입장이 분명히 서있지 않으면 사람이 괴롭습니다. 진압을 당하든지, 죽든지, 입장이 정해지지 않아서 너무 괴로웠습니다. 배고픔 보다 더한 고통은 이런 상황에 대해 입장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전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밑에서 무척 많은 고생들을 하셨습니다. 정말 열과 성을 다해 열심히 활동해서 거의 다 죽은 우리 민주 노조 운동이, 미포 투쟁에 참여한 우리 동지들의 그런 정신으로 활짝 꽃피울 수 있도록 열심히 투쟁했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작업에는, 힘과 나이가 아니라, 갈고 닦은 새로운 연장이 필요했다던, 감나무 과수원에서의 그의 경험담처럼 지금 우리 운동에도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겨울인데도 벼리듯 돋아 있던 박일수 열사의 봉분위의 풀들, 떠올리면 가슴이 베인 듯 자꾸만 아파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