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해기스는 한국 관객들에게 그다지 알려진 감독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최근까지 제작자 겸 각본으로 평판을 얻었다. 2005년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아카데미 작품상을 선사한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제작ㆍ각색하였고, 2006년 <007 카지노 로열>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2009년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같은 대작영화 각본을 맡았다.
1993년 캐나다에서 <레드 핫>으로 데뷔한 해기스에게 2006년은 잊을 수 없는 해가 되었다. <크래쉬>가 그를 할리우드 명감독 대열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세계의 용광로라 불리는 미국의 인종문제를 살 떨리게 다룬 영화 <크래쉬>에서 그는 감독ㆍ각본ㆍ제작을 도맡았다. 2006년 아카데미에서 <크래쉬>는 작품상, 각본상, 편집상을 받았다.
해기스의 신작 <엘라의 계곡>은 <크래쉬> 만큼 울림이 깊은 영화다. 밖으로 보이는 미국과 안에서 보는 미국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닮았다. 그런데 <크래쉬>가 용광로 내부에 머물러 있다면, <엘라의 계곡>은 제국의 경계 너머를 본다. 아메리카의 작은 영웅들이 제국과 전쟁의 본질적인 의미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지옥에서 괴물이 되다
퇴역헌병 행크가 어느 날 전화를 받는다. 이라크로 파병된 작은아들 마이크가 부대로 귀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해진 시각까지 귀대하지 않으면 탈영병으로 처리할 것이라는 전갈에 행크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해기스는 이라크 전쟁을 이라크가 아니라, 미국으로 단숨에 끌고 들어온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조지 부시의 미국으로!
영화 곳곳에서 관객은 아메리카와 미군이 생각하는 이라크와 전쟁을 목도한다. 그것을 집약하는 단어가 '지옥'이다.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다고 그들은 입을 모은다. 그들이 내리는 결론은 명쾌하다. 지옥을 뭉개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원자폭탄으로. 마이크처럼 선량한 미국인을 괴물로 만드는 이라크를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낫죠... 이렇게 살 바에야..."
마이크의 동료 분대원 스티브 페닝의 말이다. 페닝의 길지 않은 대사에서 관객은 이라크에서 미군이 무엇을 경험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마이크가 휴대전화에 찍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이라크 전쟁의 참상을 도처에서 확인한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미군 병사들이 겪어야 했던 심리적 외상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미군 병사들을 싣고 트럭이 질주한다. 트럭은 어떤 상황에서도 질주를 멈추면 안 된다. 부대에 귀환할 때까지. 달리는 트럭 앞으로 축구공 하나가 굴러 나오고, 소년이 공을 따라 거리로 나온다. 트럭의 병사들이 혼란에 빠진다. 질주하느냐, 혹은 멈춰서 소년을 기다릴 것이냐. 이런 식으로 <엘라의 계곡>은 관객의 시선과 호흡을 일시에 정지시켜 버린다.
다윗과 골리앗: 개인과 국가
아들을 찾으려는 행크의 노력은 쉽게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군부대와 경찰이 영역다툼과 지휘권을 두고 대립ㆍ경쟁하기 때문이다. 행크는 직장 성희롱으로 괴로워하던 에밀리 샌더스와 조우하며, 사건은 본격적인 가닥을 잡는다. 행크는 에밀리의 아들 데이비드에게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성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 제목은 거기서 나왔다.)
'엘라의 계곡'에서 팔레스타인의 골리앗을 새총으로 물리친 다윗 이야기에 푹 빠져드는 데이비드. 거인을 퇴치하고 이스라엘 영웅으로 다시 태어난 소년전사 다윗에게 매료되는 데이비드. 데이비드가 다윗에게 경도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이름도 같을 뿐 아니라, 순수함으로 빛나는 앳된 소년이며, 조국애로 뭉친 작은 영웅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다윗 이야기에 힘입어 나름의 용기를 키워나가지만, 행크는 반대양상을 보인다. 마이크 실종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회의의 나락으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큰아들을 헬기사고로 잃은 터였기에 작은아들의 행방불명은 더욱 큰 상실로 다가온다. 그것을 보다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마이크에 대한 동료들의 일관된 진술이다. 파병 전에 선량했던 아들이 마약복용은 물론이고 사디즘마저 보였다는 사실에 행크는 경악한다.
유순한 개인이 폭력에 노출되고, 집단의 기강과 규율에 길들여질 때 도달하는 궤멸적인 결과를 행크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엘라의 계곡>은 전쟁의 파괴적인 양상이 이라크를 넘어 전쟁 도발국가 미국에까지 이르렀음을 적실하게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다윗(개인)이 아직도 골리앗(국가)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거꾸로 걸린 성조기: 세계여, 미국을 구원하라!
성조기가 바람에 펄럭인다. 길을 가던 행크가 차를 멈추고 성조기를 내건 사람에게 지청구를 한다. "거꾸로 매달린 국기는 국제적인 조난신호야. 구해달라는 얘기지." 그런 줄도 모른 채 성조기를 걸었던 사람의 국적을 행크는 끝내 묻는다. '엘살바도르'라는 대답을 듣는 그의 얼굴은 그다지 편해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인종차별주의자 냄새가 난다.
마이크와 같은 분대소속 병사 로버트 오티즈는 거칠게 항변한다. 그도 그럴 것이 행크의 말과 행동에 덕지덕지 묻어나는 인종차별주의를 온몸으로 겪기 때문이다. 제국의 작은 수호자 행크의 내면에 깔려있는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는 에밀리가 경험하는 여성차별주의와 성희롱과 결합하면서 아메리카 백인남성들의 가학적 폭력성을 보여준다.
다시 장면이 바뀐다. 부재중에 배달된 소포에서 행크는 먼지에 절은 성조기를 꺼낸다. 그가 성조기를 들고 국기 게양대로 간다. 어쩐 일인지 성조기는 거꾸로 매달려 바람에 나부낀다. 이리저리 찢긴 채 때에 찌들어 누렇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성조기가 힘없이 바람에 우줄댄다. 그런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는 행크. 그의 뒤 어딘가 '해기스들'이 서있다.
<엘라의 계곡>에서 감독이 제기하는 문제의 본령 가운데 하나가 여기 있다.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팍스 아메리카나'와 '아메리카 제국'의 첨병이자 애국자이며 작은 영웅 행크의 변신. 무엇이 이런 극단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는가. 지옥 같은 이라크인가, 전쟁의 참상인가, 마이크의 감춰진 본질인가, 행크의 맹목적인 애국심인가, 제국내부의 문제인가.
이라크 전쟁은 성전이었는가
<엘라의 계곡>은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돌아와 살해된 참전병사 리처드 데이비드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2007년에 제작되었으니, 대한민국에는 꽤 늦게 개봉된 셈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구실로 전쟁광 조지 부시가 도발한 전쟁.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은닉되어 있고, 그것이 국제테러조직으로 넘어간다는 구실로 전쟁을 일으킨 아메리카.
사담 후세인의 악정과 폭압에서 이라크 민중을 구한다는 성전으로 포장된 이라크 전쟁. 대한민국 전역을 들끓게 하면서 결정된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조지 부시의 이른바 '악의 축' 발언과 북한의 연루, 그리고 대한민국 매파의 득세를 생각하시라.) 과연 이라크 전쟁은 '테러'를 축출하였으며, 이라크 인민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선물 받았는가.
토니 블레어 전 영국총리의 발언을 기억한다. 부시의 충실한 하수인으로 '부시의 푸들'이란 아름다운 별명을 얻은 블레어가 얼마 전에 일갈하였다고 한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다 해도 이라크 전쟁은 정당한 것이었다!"고. 아메리카 제국과 그에 충실한 하수인 노릇하는 동맹 국가들의 기본적인 관점은 뺄 것도 더할 것도 없이 바로 여기 있다.
오늘날 이라크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다. 아메리카와 그 앞잡이들에게 저항하는 자살폭탄 테러의 일상화. 지뢰밭으로 변한 나라 곳곳에서 빈발하는 폭발사고. 의약과 교육에서 소외된 어린이들의 부상과 죽음의 다반사. 미국 보장한 자유민주주의가 개화할 날이 언제인지, 누구도 기약할 수 없는 현실. 과연 그것은 성전이었는가?!
짧은 맺음말
여타 전쟁영화와 달리 <엘라의 계곡>은 파병국의 문제를 다룬다. 대개의 월남전 영화가 베트콩의 야만성(<디어 헌터>)과 미군내부의 문제(<플래툰>과 <지옥의 묵시록>)에 멈춰있는데 반하여, 해기스는 그것을 초월한다. 전쟁 자체의 문제와 그것을 강박하는 국가라는 거대권력의 실체에 물음을 던진다. 정말로 국가가 그렇게 정당한가, 하고 묻는 것이다.
해기스의 결론은 명쾌하다. 이라크 전쟁은 어떤 평화도 행복도 이라크 인민에게 가져다주지 않았다. 외려 그것은 이라크는 물론 미국에게까지 깊은 심리적 외상을 야기하였다. 따라서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전쟁의 본질과 과정 및 결과를 깊이 있게 사유하면서 국가라는 거대 공권력을 재삼재사 숙고해야 한다. 이것이 해기스가 던지는 주제 아닐까.
그런데 왜 한국정부는 제국의 무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하려는 것일까. 19세기 제국주의 영국은 물론, 1979년 이후 10년 동안 진행된 소련의 궤멸적인 파멸을 모르는가. 13만 5천 병사 가운데 1만 5천 이상의 전사자와 4만 이상의 부상자를 낳은 이라크 침공. 그 뒤를 따라 파멸을 목전에 둔 미국의 출구전략에 왜 한국군이 참전해야 하는가. 참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