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의 연수기간 내내 마음 한구석을 우울하게 만든 나라.
다녀온 지 한 달이 지나 연수 감상문을 적는 이 순간까지 처음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여전히 ‘우울’이다. 빈민촌의 아이들과 어우러질 때는 그렇게도 즐겁다가 이동을 위해 승합차에 오르면 가슴이 뻥 뚫린 듯 멍해지는……. 캄보디아에서의 일주일은 조울증에 걸린 사람마냥 즐거움과 우울의 반복이었다. 그래서인지 돌아와서 사람들이 “재미있는 여행이었냐”고 물을 때마다, “음……. 굉장히 충격적이고, 비참했다. 그래서 참 좋고 즐거운 여행이었다”고 답했다. 우울의 기억을 더듬기가 싫었나보다. 다이어리에 ‘연수보고서 쓰기’라고 한 달 전부터 적어놓고는 하루하루 미루기만 했다. 사실 지금도 피하고 싶다. 그러나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를 온통 짊어지고 살아가는, 그러기에는 너무나 작고 어린, 캄보디아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느끼려고 노력하며, 그들과 함께한 기억을 더듬어본다.
▲ 앙코르와트라는 거대한 사원을 건설하기 위해 수천수만의 노예들과 인민들이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피와 땀을 흘리며 죽어갔을 것이다. |
앙코르와트, 피땀이 서린 수치의 역사
많은 세상 사람들은 캄보디아 하면 화려하고 웅장한 앙코르와트를 떠올리지만, 내게는 그것조차도 ‘우울’의 연속이었다. 앙코르와트라는 거대한 사원을 건설하기 위해 수천수만의 노예들과 인민들이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피와 땀을 흘리며 죽어갔을 것이다. 거대한 제국은 영광스러운 역사가 아니라, 수치스러운 역사다. 그 거대한 규모만큼의 약탈, 강간, 살인이 병행되었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있어 한반도의 역사 중 가장 치욕스러운 역사는 바로 고구려의 역사다.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 국가주의자들의 가장 큰 오류가 바로 ‘제국’이 가지는 이러한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과거의 앙코르와트가 약탈, 강간, 살인, 착취의 산물이라면, 현재의 앙코르와트는 ‘오빠 이것 예뻐요. 1달러, 1달러!’를 끊임없이 소리치는, 남한에서 태어났다면 아마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음직한, 아이들의 비극적인 생존 현장이다. 그마저도 상당수는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앵벌이 노동이라고 하니, 앙코르와트 아이들의 눈을 쳐다보기가 어렵다. 캄보디아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역사라는, 동남아시아 일대를 전부 다스렸다는, 그 제국의 상징물인 앙코르와트는 그런 의미에서 ‘우울’의 연속이다.
캄보디아 연수에서 1일차에 앙코르와트를 방문한 것을 빼고는 관광(?)은 없었다. 물론 그 조차도 언급한 것처럼 절망적이고 우울한 감정과 함께해야 했지만……. 2일차부터 본격적인 연수가 시작됐다. 연수의 방식은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NGO나 종교단체에 방문해서 그 지역의 상황과 활동내용 등을 듣고, 직접 현장을 순회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10곳 남짓이었는데, 대체로 그 지역에서 가장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돕는 곳이었다. 우리는 뽀이뻿이라는 태국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농촌을 둘러보기도 했고, 반티에이쁘리엡이라는 장애인재활센터도 방문하고, 도시빈민·철거민들이 강제 이주를 당한 얼롱깡안 마을을 가기도 했다. 각각의 사연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들의 처참한 삶은 같았다.
▲ 상당수는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앵벌이 노동이라고 하니, 앙코르와트 아이들의 눈을 쳐다보기가 어렵다. |
방치된 빈민들의 비극 혹은 일상
뽀이뻿에서는 ‘뽀이뻿 프로젝트’라는 것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주로 2가지의 사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너무 가난해서 취학연령임에도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 보내주기 사업’이고, 다른 하나는 돈이 없어 방치되어 있는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치료 및 영양보급 사업이었다. 이 사업의 진행방식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당사자들에게 직접 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학교 보내주기 사업에 선정된 아이가 있으면, 부모들이 아이를 학교에 다니게 하면, 그 가정으로 한 달 단위로 먹을거리와 생필품을 지급한다. 에이즈 환자 영양보급도 마찬가지로, 마을 보건소로 직접 찾아오거나 활동가들이 각 가정으로 방문해서, 환자들이 영양식품인 ‘두유’를 먹는 것을 확인해야만 한다. 이는 돈만 받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거나, 두유를 배고픈 다른 가족들에게 먹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가난의 극치에 이른 사람들에게 학교와 두유는 사치품이었다. 남한의 아이들이 너무나 쉽게 누리는 것들이 뽀이뻿의 아이들에게는 애타게 갈망하는 것이 된다.
이 사업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는 약 80명이라고 한다. 이들을 위한 비용은 모두 외국인들의 성금이란다. 부산에 있는 아시아평화인권연대라는 단체를 통해 한국인들이 약 40명의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고, 스페인 사람들이 나머지 약 40명을 후원하고 있다고 한다. 캄보디아 정부는 가난한 민중들을 위한 정책에서 손을 놓고 있단다. 97년 쿠데타로 집권한 훈센 정부는 현재까지 10년을 넘게 독재정치를 하면서 온갖 비리와 착취로 일관하고 있었다. 남루한 집에서 제대로 끼니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뽀이뻿에만 수천 명이나 되는 에이즈 환자들을 위해, 캄보디아 정부가 하는 일은 ‘nothing’이다. 이렇게 방치된 민중들에게 NGO나 종교단체들은 그들의 정부보다 더욱 믿음직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남한의 민중들에게 있어 나는 혹은 내가 몸담고 있는 민주노총은 얼마나 믿음직한 존재일까!’ 캄보디아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활동가들을 보며 혼자 조용히 되뇌어 본다.
구정물에서 뒹굴고 있는 굶주리고 헐벗은 아이들을 보면 누구나 가장 먼저 ‘연민’의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빈민촌에 방문할 때마다 그들의 비극적인 생존 현장에 놀랐고, 너무나 밝은 그들의 표정에 또 한 번 놀랐었다. 환경에 적응한 것일까? 아니면 행복 추구의 꿈을 포기한 것일까? 둘 다 사실일지도 모르겠으나, 아마도 그것보다는 우리의 시선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입장에서 ‘이러이러한 삶이 행복한 것이다’라고 규정지어 놓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내 친구들이, 나의 가족들이, 민주노총이라는 빨갱이집단(?)에서 일하는 나를 보며, ‘넌 참 위험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규정하는 것처럼. 어쨌든 빈민촌의 아이들과 어울릴 때 참 즐거웠다. 사소한 것에도 너무 환하게 웃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의 동심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 캄보디아 방문 내내 경악을 금할 수 없었지만, 갈수록 심각한 상황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
▲ 구정물에서 뒹굴고 있는 굶주리고 헐벗은 아이들을 보면 누구나 가장 먼저 ‘연민’의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
도움 대신 밥 먹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
뽀이뻿 다음으로 돈보스코학교, 시스폰 성당, 바탐방 성당, 따헨 성당, 원불교무료병원을 방문했다. 각각 조금씩 방식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그 지역의 최빈민층들을 위한 교육, 의료, 복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캄보디아 연수 5일차에 우리가 방문한 곳은 반티에이쁘리엡라는 장애인재활센터다. 캄보디아는 오랫동안 내전을 겪은 나라다. 그 과정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지뢰사고로 신체장애를 입게 되었다. 반티에이쁘리엡은 내전 당시 크메르루즈군의 살육현장이기도 했으며, 통신군부대, 감옥, 공장 등으로 활용되었다가, 1991년에 장애인재활센터로 바꿨다고 한다. 갈등과 상처의 상징이었던 곳이 치유의 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반티에이쁘리엡에서는 장애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조각, 전기전자, 기계, 농업, 재봉 등 다양한 기술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91년부터 현재까지 졸업자가 총 1,500여명에 이르고 있단다. 경제적 빈곤과 함께 열악한 사회인식에서 비롯된 편견의 테두리에 갇혀 이중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장애인들에게 반티에이쁘리엡은 새로운 희망을 선물해오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외부의 원조나 도움 속에 묻힐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 밥을 먹여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밥 먹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 이것이 반티에이쁘리엡의 선물이었다.
마지막 날 방문한 곳은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 외곽에 위치한 도시빈민·철거민들의 마을이었다. 캄보디아 방문 내내 경악을 금할 수 없었지만, 갈수록 심각한 상황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우리는 얼랑깡안마을과 언동마을을 방문했는데, 뽀이뻿의 시골빈민촌에 비해 이곳은 상황이 더욱 처참했다. 배수시설이 제대로 없어서 무릎 높이까지 물이 마을 전체에 차있고, 나무로 대충 지은 집들은 거지촌이라는 느낌이 들만큼 남루했다. 마을 곳곳에 쓰레기가 물에 둥둥 떠다녔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집들이 즐비했다. 파리 모기 같은 해충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물에서 세수를 한다. 집안에 까지 무릎높이의 물이 들어찼다. 이 와중에 비좁은 공간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이 상황을 어찌 글로 형용할 수 있을까. 글을 쓰면서 떠올려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아…….” “아…….”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정말 울고 싶다. 온몸에 힘이 빠진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 각각의 사연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들의 처참한 삶은 같았다. |
▲ 우리는 얼랑깡안마을과 언동마을을 방문했는데, 뽀이뻿의 시골빈민촌에 비해 이곳은 상황이 더욱 처참했다. |
가진 이들의 행태는 세계적으로 닮았다
이 도시빈민·철거민촌은 캄보디아 독재정권과 가진 자들에 의해 강제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원래 이 사람들은 프놈펜 도심에 살고 있었는데, 정부에서 관광객들 보기에 안 좋고 각종 개발 사업을 해야 한다며 이곳으로 강제이주를 추진했다. 당연히 이들은 철거에 반대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이들의 집들만 전부 타버리는 대규모 방화사건이 있었다. 누구의 짓일까!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만, 범인은 당연히 밝혀지지 않는다. 그 후 이들은 프놈펜 외곽으로 강제이주를 당하게 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마을이 바로 우리가 방문한 얼랑깡안마을과 언동마을이었다. 가진 자들의 행태는 전 세계적으로 어찌 이리도 닮았을까. 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인들 보기에 안 좋다며, 대대적으로 철거된 서울의 달동네들. 거리 곳곳의 노점상들.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6명이나 화형당해버린 2009년 용산의 어느 빌딩 옥상. 부산 해운대 승당마을……. 도심의 높은 빌딩에 가려진, 우리네 버려진 삶이다.
캄보디아 연수 내내 우리는 대부분 천주교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운영하는 단체를 방문했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는데, 캄보디아 독재 정권이 종교단체가 아닌 약간이라도 정치적인 색채가 있는 NGO단체는 허용하지 않는 것도 있었고, 우리가 방문한 곳이 모두 충분히 검증된(?) 곳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검증이라…….?? 사실 좀 표현이 이상하긴하다. 처음 일정표를 봤을 때 죄다 종교단체 방문이라서 고개를 약간 갸우뚱했었다. 특히 나는 믿는 종교가 없었기 때문에 방문하는 곳을 너무 편향적으로 정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런데 그곳의 종교인(?)들을 만나고 나서야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특정 종교인이라기 보단 사회운동가에 가까웠다. 그들의 헌신적인 삶만을 보고 든 생각이 아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반티에이쁘리엡에서 첫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거기 신부님께서 내일 아침 6시20분에 미사가 있다며, 우리 일행과 동행한 다른 신부님에게 참석하라고 했었다. 그 때까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문득 궁금증이 들어서 물었다. “캄보디아는 불교국가 인데, 이곳에는 천주교 신자가 몇 명이나 되요?”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변이 “한명도 없어요!”였다. 매일 아침에 미사를 하는데, 늘 신자 한명도 없이 신부님과 수사님들끼리만 한다는 것이다. 천주교 신부님들이 91년부터 반티에이쁘리엡에서 장애인재활사업을 했는데, 단 한명의 신자도 없다! 신기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런데 신부님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지금 우리가 학생들에게 미사에 참가하라고 한다면, 아마 거의 대부분 참가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우리의 권유는 뿌리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삶의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의 권유를 고사하겠습니까? 하지만 이는 평등하지 못한 것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전도랍시고, 미사 참가를 권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겁니다.”
▲ 반티에이쁘리엡에서는 장애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조각, 전기전자, 기계, 농업, 재봉 등 다양한 기술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
선교는 종교가 아니라 종교정신을 전하는 것
반티에이쁘리엡 뿐만이 아니었다. 마지막 날 방문했던, 한국외방선교회가 운영하는 코미소직업학교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곳 신부님께서는 “과거 선교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거나, 그 나라 민중들의 사상을 무시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선교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선교는 종교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정신을 전하는 것입니다. 즉 우린 종교의 정신인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라고 나직이 말했다. 충격이었다. 선교는 종교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정신을 전하는 것! 몇 번이고 되뇌었다. 과연, 검증(?)된 곳을 방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물 부족 국가 2위. 통계조차 낼 수 없을 만큼 방치되어 있는 에이즈 환자들. 산업시설도 부족하고 일자리도 없는 절대 실업의 상태. 구정물에 세수를 하고 빗물을 식수로 이용해야만 하는 환경. 굶주림에 익숙해진 아이들……. 캄보디아는 UN이 지정한 세계 최빈국 중에 하나다. 이 최빈국에서도 최빈민층에 위치한 사람들의 삶은 직접 보고 느끼지 않고는 어떤 문장으로도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그런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고, 어깨가 어스러지는 듯했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살아가며 그들을 위한 사업을 오랫동안 묵묵히 진행하는 현지 활동가들은 대체 그 정신의 크기가 얼마 만큼일까! ‘나를 버리고 간’ 전태일의 정신을 정작 우리 노동운동가들은 망각하고 있는데……. 캄보디아에서 살아있는 전태일들을 보았다.
총궐기보다 삶에의 의지가 먼저
내가 무척이나 존경하는, 그래서 그를 만나러 연고지도 없는 충청북도까지 가게 만든, 어느 맑스주의자는 “연민이라는 감정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위한 계급적인 인식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동의한다. 민중의 해방을 위해서는 ‘연민’이 아니라, ‘투쟁’이 필요하다. 진정한 장애해방은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장애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극복’은 자기 노력으로 얼마만큼의 달성이 가능하지만, ‘인정’은 전 사회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 연민으로 ‘극복’은 가능하지만, ‘인정’은 쉽지 않다. ‘인정’은 투쟁으로만 가능하다. 충북장애인권연대에서 일 할 때도, 지금 민주노총에서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나의 지배적인 사상이다.
그런데 약간의 수정이 필요해졌다. 수차례의 내전을 통해 숨죽이며 살기를 강요받았던 민중들에게, 당장 먹을 밥도 없는 민중들에게, 삶의 의지가 상실된 민중들에게, 오늘의 총궐기는 불가능하다. 지금 당장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연민’이었다. 아니, 실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무기력함과 허무와 우울을 달래기 위해 필요한 건 ‘연민’이었다. 나름 깐깐했던 노동해방 사상을 잠시 접고, 내 마음이 달래질 때까지 연민을 느낀다.
캄보디아. 일주일의 연수기간 내내 마음 한구석을 우울하게 만든 나라. 이제 그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노력해보련다. 캄보디아가 내게 준,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힘을 남한의 노동자민중들을 위해 써보련다.
* 이 여행은 '민들레기금'을 통해 다녀왔습니다. ‘민들레기금'은 진보진영 활동가들이 후원금을 내서 부산지역 활동가들의 재충전을 위한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매해 진행하는 기금입니다. 일반적인 여행으로는 갈 수 없는 곳이지만 민들레기금 운영진들의 안내를 받아 제휴 맺고 있는 캄보디아 사회단체 곳곳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다녀온 다음에 없는 돈 털어서 한 달에 3만원으로 캄보디아 빈민촌 아이와 자매결연을 맺었습니다. 그 아이가 클 때까지 매월 3만원씩 후원해서 학교에 보내주고 생필품을 지원합니다. 더 많은 활동가들이 제3세계의 현실을 적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필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