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있으나 현실을 보려 하지 않는 눈먼 이의 땅
귀가 있으나 진실을 들으려 하지 않는 귀먹은 이의 땅
입이 있으나 정의를 말하려 하지 않는 입 다문 이들의 땅
법이 있으나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꼭두서니들의 땅
국가는 있으나 국민은 존재한 적이 없는 허무의 땅
죽었으나 흙에 묻혀 넋이 떠나지 못하는 냉동의 땅
결국 용산 4구역 남일당 앞 은행나무는 더 이상 은행을 맺지 못한다
불임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천구년 일월 이십일 아침 여섯 시 이후론 용산은 세상의 시계를 멈추게 했다
겨울이 지났고 봄이 왔으나 달력은 찢기지 않았다
봄이 가고 여름 왔으나 시계 바늘은 여전히 그 자리다
여름 가고 가을 왔으나 검은 옷을 여전히 벗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덧없는 숫자만을 세고 있다
한 달 백일 이백일 그리고
이천구년 십일월 십사일 용산4구역 남일당에서 이백하고도 아흔아홉 날
눈멀고 귀먹은 땅의 분향소에는 외로이 국화 향기 피어나고 있다
보아라 허나 나는 밥을 먹고 있지 않는가
들어라 허나 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는가
시를 쓰고 있고 그림을 그리고 있고 돈을 벌고 있고
불임의 땅에서 밤에는 사랑을 나누고 있지 않는가
가을 가고 어느덧 그날의 아침처럼 매서운 바람 부는 겨울이다
불길 훨훨 타오르는 망루다
여기 사람이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다
용산의 절규는 평택 쌍용자동차에 울리고 있다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반도의 땅 혈맥에서 신음하고 있다
단식에 삼보일배 기자회견에 국민대회 허무한 불법 되어 범법자만 난무하다
지독한 저항은 거짓 눈물과 위장 부도를 계획한 약속에 철저히 겁탈 당하고 있다
나의 무능의 부끄러움을
나의 침묵의 비겁함을
이젠 할 만큼 하지 않았느냐
홀로 도망가기 겁나 옆 사람의 손목마저 잡고 있지 않는가
이미 한의 눈물은 남일당 옥상 망루를 훌쩍 넘겼다
이미 분노의 목소리는 인왕산 아래 푸른 기와 서까래를 흔들고 있다
이젠 한 걸음이다 이젠 한 사람이다
내가 한 사람이 되고 내가 한 걸음만 나서면 된다
용산 참사 삼백일을 앞둔 오늘
한 사람의 한 걸음을 더하고 더해
마치 오랜 된 과거처럼 지우고 싶은 내 몸 안의 독재를 버리고
여기 사람이 있다
여기 내가 있다
여기도 사람이 있다
여기 우리가 있다
떨쳐 있어서면 된다 삼백일이 별 거냐
기념하거나 기억하지 말자
이미 멈춘 시간들 오늘이 첫날이자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지독한 저항으로도 안 된다면 별 거 있나
더 더욱 더더욱 지독스럽게 할퀴고 찢으며 달려들면 그만이다
눈먼 이들의 땅 귀먹은 이들의 땅 입 다문 이들의 땅
꼭두서니들의 땅 허무의 땅 차가운 냉동의 땅
불임의 땅 용산에 눈물의 망루가 아닌 희망의 망루를 쌓고
끈질기고 악착스러운 지독한 저항을 하자
저항만이 양심이다
저항만이 민주주의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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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용산참사 300일 범국민추모대회에서 오도엽 시인이 낭독했습니다.